[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22회(4부 : 캠퍼스 연가 1)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1.17 14:09수정 2005.01.17 16:09
0
원고료로 응원
김형태


그때 초희가 그런 말을 했다.


"바윗돌은 세월이 흐를수록 상류로 굴러간대."

물론 영희한테 한 말이었지만, 모두들 듣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껄껄껄, 호호호 웃었다.

"철민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짓궂게도 한철이 녀석이 나에게 물어왔다. 참으로 난감했다. 나도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터라 초희가 혹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허튼 소리를 할 그녀가 아니었기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실로 고민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글쎄."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한철이 녀석이 한 술 더 떠서 아예 나를 놀리기까지 했다.

"야, 그런 애매모호한 대답이 어딨냐? 예스면 예스고 노우면 노우지."


그러자, 초희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이래요."

그러자 이번에는 듣고 있던 영희가 반박했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물이 아래로 흐르듯 상류의 돌도 물살에 의해 자연스레 아래로 굴러가는 것이 정상 아니겠어."

초희도 물러서지 않고 반론을 폈다.

"일반적으로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지.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거야. 그 원리를 설명하자면 이래. 흙과 모래, 그리고 작은 돌들은 모두 물살에 의해 쓸려 내려가지만 바윗돌은 물살 정도에는 꿈쩍도 안하지. 오히려 바윗돌 위쪽의 모래와 자갈들이 급류로 말미암아 떠내려가게 되니까 그곳은 자꾸 패이게 되지.

그 패인 곳으로 큰 바윗돌은 자연히 기울게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바윗돌이 상류쪽으로 굴러가는 셈이 되지."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똑소리 나는 설명이었다.

이번에는 모두들 조금 전의 황당한 표정에서 180도 바꾸어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지구의 자전을 발견한 것 이상의 대발견이라며 한철과 노진은 박수까지 아끼지 않았다.

"왜들 이래요. 쑥스럽게,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에 불과한데‥‥‥, 어쨌든 신기하잖아요. 할 수 있다면 바윗돌처럼 살고 싶어요. 물살에 떠내려가기보다는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하류가 아닌 상류로 굴러가는 바윗돌의 위대한 삶, 참으로 멋있지 않아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시(詩)요, 철학이었다. 나는 순간 그녀가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마치 천상에서 하강한 선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속으로 다짐했다. 그녀가 선녀라면 동화속의 나무꾼처럼 결코 그녀를 놓지 않겠노라고.

저녁 늦게야 야영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서둘러 밥을 지어 끼니를 해결했다. 비록 3층밥이었지만 꿀맛처럼 달고 맛있었다. 식사 후에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수박을 쪼개 먹으며 기타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했다. 하늘의 별들도 내려와 우리와 함께 합창을 하였다.

70년대의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부터 시작하여 민주화를 열망하는 소위 데모가(민중가요)까지 우리의 노래는 끝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깊자 다른 텐트에 방해가 될까싶어 더 이상의 노래는 못하고 대신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철과 진경은 서로 말을 놓는 사이였으나 나와 노진 커플은 아직도 경어를 쓰고 있었다.

그게 이상하게 들렸는지 한철이 한 마디 했다.

"어색하게 무슨 존댓말이냐? 우리처럼 이렇게 반말 써라. 자아, 한번 잘 봐. 진경아!"

진경이 대답했다.

"왜?"

이번에는 반대로 했다.

"한철아!"

"왜 그러는데? 봤지. 이렇게 하는 거야. 말을 놓고 지내야 그만큼 더 가까워지지. 야, 니들도 빨리 연습해. 빨리! 내일부터는 존댓말 한 마디 할 때마다 벌금 천 원씩이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며 우리는 말도 안 된다고 하자, 한철은 자기가 이곳에 오자고 했으니까 자기의 말이 법이라나, 그러면서 그런 말도 덧붙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 가지고 갖다 붙이기는.

한철이 이번에는 깜박한 것이 있다며 텐트로 가더니, 술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양주 한 병에 소주 두 병 그리고 맥주 다섯 병이었다. 그러면서 취향대로 골라 마시라나.

"야 내가 술 못하는 것 알았으면 음료수도 준비했어야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는다더니, 이게 만반의 준비냐?"

내가 웃으면서 그렇게 묻자, 한철의 너스레가 괘도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야 여기까지 와서 술을 안마시면 언제 마시냐? 걱정하지 말고 마셔. 내가 다 책임질 테니까. 대체 누가 이 좋은 술을 못 마시게 해. 예수님? 하나님? 걱정하덜 말고 마셔. 내가 예수님께, 그리고 하나님께 눈 질끈 감고 계시라고 말해 놓을게. 야, 뭐해 빨리 마시지 않고, 자 우리 모두 주(酒)님을 위해 건배!"

웃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하여간 한철의 단순 무식은 알아줘야 했다. 한철과 노진, 그리고 진경 이렇게 셋이서만 술을 마셨다. 나는 초희와 영희를 위해 제법 멀리 떨어진 가게에까지 달려가서 음료수 몇 병을 사왔다. 갔다 와서 보니 한철과 진경은 담배까지 피워 물고 있었다. 한철이 담배 피는 거야 고교 때부터 봐왔으니 별로 이상할 게 없었으나 젊은 여자인 진경이 담배 피는 광경은 처음 보는 터라 무척 낯설었다.

술이 꽤 들어간 한철이 텐트를 하나 더 치고 커플끼리 잠을 자자고 하는 바람에 한참동안 실랑이가 벌어졌다. 말려도 이 녀석이 막무가내로 여자들 텐트 안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자들을 남자 텐트로 보내고, 대신 나와 노진이 여자 텐트 안에서 잠을 청했다. 결국 잠자리가 바뀐 셈이었다.

어젯밤 먹은 수박 탓인지 자다가 오줌이 마려워 새벽녘에 일어나 보니 한철이 없었다. 예감이 안 좋아 얼른 여자들이 자는 텐트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텐트 안에 녀석은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텐트 안에는 두 사람만 자고 있었다. 초희와 영희.

그렇다면 진경은 어디로 간 것일까? 두 사람은 아침 무렵에야 어디선가 나타났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썩 개운치 않았다. 노진은 두 사람이 나타난 다음에야 기상을 했으니까 몰랐지만, 초희와 영희는 두 사람의 일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내가 괜히 죄를 지은 것처럼 초희를 볼 면목이 없었다. '한철이 이 녀석, 내가 다시는 너와 어딜 가나봐라' 그렇게 속으로 용을 쓸 수밖에 없었다.


2학기 때는 초희가 하숙집에서 나와 기숙사로 들어갔다. 기숙사는 중앙도서관에서 약간 떨어진 한적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그녀가 그곳으로 숙소를 옮기면서 나에게는 좋은 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안 좋은 점이 훨씬 많아졌다. 무엇보다도 늘 그녀의 귀가 시간이 문제였다.

밤 10시를 넘기면 기숙사 문이 닫혔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다가도 10시까지 들어가야 위해 늘 뛰어야 했다. 한번은 시간이 가는 줄로 모르고 함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그대로 일어나 죽을 힘을 다해, 정말 개발에 땀나도록, 아니 거짓말 조금 보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그렇게 단거리 육상선수처럼 기숙사까지 뛰어갔으나 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다. 한참동안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니까 그때서야 직원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좀 일찍, 일찍 다녀요! 지금 시간이 몇 시예요?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다음부터는 늦어도 절대 문 안 열어 줍니다."
아저씨의 짜증과 호통에 초희는 무조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만 연발하고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없던 시대라서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볼 수가 없었고 심지어 전화연락까지 안되었다.

2학기 접어들면서 우리 만남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치근대거나 나에게 시비하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나 당당하고 공개적으로 교제를 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남의 구설수에 오르내리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래서 1학기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캠퍼스를 활보하며 사랑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 독자 여러분의 뜨거운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3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AD

AD

AD

인기기사

  1. 1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인촌의 문체부, 청소년은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2. 2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손님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다"는 사장, 그럼에도 17년차
  3. 3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선일보' 왜 이럴까
  4. 4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윤 대통령 측근에 이런 사람이... 대한민국의 불행입니다
  5. 5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주변에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번 사람 있나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