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만 하다 간 큰형 생각에 간절한 갈매기살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84] 큰형과 김 그리고 갈매기살

등록 2005.01.11 17:06수정 2005.01.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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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막 잡은 돼지 갈매기살 진짜배기. 이걸 듬성듬성 썰어 고추장에 볶아줬던 포장마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막 잡은 돼지 갈매기살 진짜배기. 이걸 듬성듬성 썰어 고추장에 볶아줬던 포장마차는 사라지고 없었다. ⓒ 김규환

우리는 '가족'이라는 말보다 '식구'라는 말을 더 자주 썼다. 말도 시대마다 달라지니 이제 식구나 가족, 집안보다 '가정'이 흔히 쓰인다. 생활이 작은 단위로 나뉜 결과다. 대가족에서 단출한 소가족, 핵가족으로 변모한 도시 생활의 반영이다.


식구(食口)는 밥을 나누는 공동체였다. 한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어른과 아이 3대가 같이 밥 먹고 함께 자고 일정한 기간 공동의 운명을 걸어가는 소중한 존재다. 늘 옆에 있어 숨소리를 들어야 잠이 오고 안심이 되는 사람이다. 애지중지, 행여, 슬하, 걱정, 사랑, 출세, 건강, 서로 등 이 세상 말 중에서 가장 정이 물씬한 말을 총동원해도 아쉽지 않았다.

애잔하고 애처롭고 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보듬어주고 싶은 게 가족이다. 오늘은 어지러운 세상 살다보면 어쩌다 작은 다툼 한 번으로 원수가 되어 남보다 더 멀어져버리고 급기야 얼굴보지 않고 살고 싶다는 사람들 이야기는 내 관심사항이 아니다.

음력 12월 3일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첫째가 어머니요, 둘째는 큰형이다. 가장 먼저 내 곁을 순서대로 떠나간 두 분은 내겐 모두였고 희망이었다. 버팀목이었다. 그들을 잃음으로써 전부를 잃었다. 어머니가 중 2학년 때 이승을 떠나자 한창 사춘기였던 나에겐 충격이었다. 집안 꼴이 풍비박산 났다.

'큰성'이라 불렀던 큰형은 늘 힘없는 아버지 대신이었다. 우리 집안을 다시 일으킨 선봉장이었다. 동생들 뒷바라지로 10대와 20대를 보냈다. 30대 초반 잠시 아내인 형수와 두 아이들에게 정을 줬을 뿐이다.

초등학교 졸업이 끝인 큰형은 학업을 마치고 2년간 농사와 나무하기, 꼴을 베다 농한기를 택하여 열다섯 살인 1971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정든 고향을 떠났다.


취직을 하려 했지만 키가 작다고 퇴짜를 맞았다. 같이 인솔하여 간 동네 형은 쉬 받아줬지만 번번이 거절을 하니 결국엔 아버지께서 "밥이라도 먹여 달라"며 부탁했다. 첫 직장은 가방공장이었다. 아들에겐 "기술을 배우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형은 나에게 전태일 동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 다음해에 상경을 했으니 학번이나 군번은 없어도 공번(工番)은 엇비슷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치고 지나갈 인연마저 없었다. 당시 전태일 동지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떠나갔으니 열악한 노동환경은 방치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형과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2년 동안 사장은 설과 추석 때 고향에 갈 차비와 달랑 옷 한 벌, 운동화 사주는 것으로 끝이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묵묵히 일만 했던 형이다. 그 뒤로 한창 활황세를 타던 금속 관련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프레스를 배웠다. 그때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없어졌다.

어느 해던가. 나는 시골에 내려온 큰형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큰성, 왜 손가락이 없어? 손톱도 없잖아"하고 물었더니 11살 위인 형은 화내지 않고 "일하다 그랬어" 한다. "성, 아푸지 않았능가?" "괜찮아. 열심히 돈벌다가 그랬으니까."

손가락을 앗아간 기계를 탓하기보단 더 많은 돈을 벌어 우리 집을 일으킬 각오를 하곤 했다.

a 성남 모란시장에서 유일하게 갈매기살 언저리를 파는 곳을 찾았지만 예전 그맛이 아니었다.

성남 모란시장에서 유일하게 갈매기살 언저리를 파는 곳을 찾았지만 예전 그맛이 아니었다. ⓒ 김규환

두 번째 직장에서는 퇴근하라는 사장에게 사정사정해서 밤 늦게까지 일했다. 그때가 상경 4년째인 19살 때다.

큰형을 뒤따라 2~3년 사이에 둘째형과 누나가 합류했을 무렵부터는 하월곡동 밤나무골을 거쳐 구리시 인창동에 작은 공장을 차릴 수 있을 정도로 알뜰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형제 자매 셋이서 새벽 같이 일어나서 야근하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 다음 날 2~3시를 훌쩍 넘기곤 했다.

철판과 철사를 사다가 버클, 가방 부속 등 쇠로 만들 수 있는 각종 액세서리 1000여 가지를 중고 프레스로 찍고 자동기계로 잘라 도금하고 조립하여 동대문극장 안쪽 가게와 마장동 일대를 오가며 팔았다. 형제들은 돈 버는 재미로 살았다.

여름휴가 때 집에 와서도 며칠 쉬었다 가지 않았다. 두 형은 어찌나 기술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지 남들은 10년 걸려도 엄두가 나지 않을 가다(금형, 金型) 기술을 빠르게 습득했다.

돈을 버는 족족 마모된 기계를 교체하고 마력이 더 큰 프레스를 사고는 매달 30만 원에서 50만 원을 우체국 소액환으로 부쳤다. 그때 아버지는 우체국을 오가며 아들 자랑에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드디어 수냇소를 기르지 않고 우리 소도 한 마리 사서 길렀다.

20여 년 동안 '묵갈림'(병작반수(竝作半收)로 농사를 지어 절반은 땅주인에게 주고 소작농은 나머지를 가져가는 방식. 세금과 비료, 농약 값과 인부 품삯 따위는 소작농이 지불해야 한다) 논 일색이었던 우리 집에서도 땅을 해마다 서너 마지기씩을 샀으니 어른들과 동생들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큰형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월 15만원에서 20만원을 빠짐없이 부쳐주셨다. 동생이 공부를 하는데 돈 걱정해서는 안 된다며 조카 녀석들 기저귀 값을 아끼고 술 마시는 횟수를 줄여 형수 몰래 보내주기도 했다.

착하고 성실했고 의미 없는 화 한 번 내지 않았던 집안의 기둥인 큰형은 김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서울에서 라면에 김치쪼가리와 된장국만 먹어서일까, 형은 김에 환장한 사람 같았다.

어머니께서 김을 구워 내놓으면 밥을 한 숟갈 떠서 넣고 양념간장을 조금 얹어 재빨리 싸서는 입에 쏙 넣는다. 다음번엔 다른 걸 먹을까 쳐다보고 있노라면 다시 김 두장을 포개 먹는다. 순식간에 가족들이 먹을 김을 독차지하다시피 먹어대니 나는 그 맛있던 해우(김의 전라도 사투리) 한두 장 가지고 네 쪽으로 나눠 먹은 기억이 새롭다.

a 김 도둑 큰형은 김 한 톳이 언제 사라지는지 모르게 잘 드셨다.

김 도둑 큰형은 김 한 톳이 언제 사라지는지 모르게 잘 드셨다. ⓒ 김규환

큰형이 일군 집안이었으나 어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다시 가세가 기울었다. 그래도 3년여 고생 끝에 재기를 했다. 1986년 말에 내가 서울로 올라올 때는 항공대 근처 고양시 화전동에 터를 잡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도 예닐곱으로 늘었고 월 매출이 많을 때는 2억원에 이르기도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화전에서 안암동까지 대학에 다니면서 집에 붙어 있는 동안엔 공장 기름때가 싫어 일산까지 자전거 여행을 일삼던 못된 동생이었다. 그러다 형과 함께 일산에 갈 일이 있으면 형에게 "우리 여기다가 땅 좀 삽시다" 하고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러면 형은 "그래 1~2년만 기다려봐라. 그리고 맨날 데모와 술타령만 말고 영어를 좀 열심히 해라. 배움이 짧은 형을 대신해서 외국 바이어 좀 만나주련?"하며 타일렀다. 나에게 남다른 기대를 했던 형이다.

가끔 학교 갈 때 을지로와 청계천, 마장동에 들러 형을 대신해 쇳덩어리가 가득 들어 있는 가마니를 납품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제가 함께 완제품을 가득 싣고 안양을 거쳐 성남, 분당을 지나칠 때였다.

"큰형님, 우리 저기 땅도 좀 삽시다"하며 땅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자 "넌 땅에 대해 관심이 많구나" 하신다. 일산이든 분당이든 두 곳 모두 논밖에 보이지 않던 벌판이었다. 그때 형을 더 채근하여 땅을 좀 사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참 혜안이 있었는지 왜 그리 그 자리를 사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던 길에 마침 5일장 모란시장이 섰다.

"야 우리 잠시 쉬었다 가자. 출출한데 저기서 뭐 좀 먹을까?"
"좋아요."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폈더니 포장마차가 즐비하다.

"아줌마, 갈매기살 줘요. 소주도 한 병."

대낮에 쫄깃쫄깃한 갈매기살 볶음을 씹으며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그게 형과 단둘이서 그토록 맛있는 고기를 먹은 마지막이었는지 모른다.

"아짐마, 근데 이게 무슨 고기예요?"
"갈매기살이제라."
"바다에 있는 갈매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돼지고기랍니다. 나도 잘 몰라요."

a 껍질과 삼겹, 갈매기살을 섞어 볶는데 고추장이 빠졌구나. 포장 색깔이 빨개 사진마저 못쓰겠다.

껍질과 삼겹, 갈매기살을 섞어 볶는데 고추장이 빠졌구나. 포장 색깔이 빨개 사진마저 못쓰겠다. ⓒ 김규환

간을 감싸고 있는 갈매기살('간막이살'이 변하여 '갈매기살'이 되었다. 부산 갈매기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 육식동물과 사람 등 잡식 동물은 가슴부위와 간을 나누는 '가로막이'살이 붙어 있다. 한쪽이 240g 내외로 두 쪽을 합쳐봐야 1근 600g이 안 된다. 내장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감싸주기고 하고 서로 섞이지 않도록 막는 구실을 한다. 간에 붙어 있어서 숨골 다음으로 중요한 간을 보호하기도 한다. 육질은 기름기가 거의 없어 쫄깃하면서도 부드럽다. 안창살이라고도 한다)과 만나는 행운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형과 알딸딸한 기분에 의정부쪽으로 돌아 집으로 갔다. 참 맛있는 하루였다.

a 갈매기살 만나러 다시 마장동에 가봐야겠다.

갈매기살 만나러 다시 마장동에 가봐야겠다. ⓒ 김규환

85년 결혼을 한 형은 88년에 은평구 수색동에 57평짜리 주택을 샀다. 그토록 원하던 소원풀이를 했는가 싶었다. 그 해 말에 주문이 차차 줄더니 사양산업에 든 것인지 공장에 일감이 들어오지 않는다.

몇 해던가 근근이 운영을 하며 버티다가 집 살 때 빌렸던 빚을 모두 갚자 형은 정복한 자의 고독, 성취한 뒤에 오는 무력감에 방향타를 상실한 건지 삶에 의욕을 잃어버리고 힘이 몰라보게 떨어졌다.

파주 교하로 공장을 옮기고 나서 급기야 간경화라는 선고를 받고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처가인 장모댁과 우리 시골집을 옮겨다녔다. 그 몇 년 동안 작은 농사로 소일하며 몸을 추슬렀다. 실로 15살 이후부터 38까지 23년간 지속된 고된 노동 이후 처음 가져보는 휴식이었다.

마음을 잡아볼 생각에 방위를 받으며 외딴집에 살던 내게 자주 놀러 오라고 아이처럼 보챘다. 형수는 젊을 때 일을 더 해야 하는데 왜 시골로 가자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대인기피증에 걸린 형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간 짐을 벗고 싶었는지 큰형은 무너지고 있었다.

일 욕심 하나는 대단하여 게으름과는 담쌓고 살았던 사람, 여느 집안이라면 아버지 대에 겪어야 할 일을 몸소 다 짊어진 사람, 앞만 보고 자신을 버렸던 사람, 개인 잇속 챙기기엔 무관심했던 사람. 2년여 병마에 시달리다 40이 되던 해 큰형은 안개 자욱한 새벽 내 곁을 떠났다.

내가 사회로 나가 벅벅 기고 있을 때였다. 우리 집안 대들보가 빠지자 한창 물이 오른 내 20대 후반에 팍팍한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든든한 기둥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며 난 10년을 훌쩍 넘기고 있지만 형수와 아이들이 먹고 살 밑천은 남겨놓았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큰형님 안심하십시오. 어느덧 숙녀가 된 미리는 돈벌고 있고 한얼이는 착하게 잘 크고 있습니다. 형수님은 자상한 분 만나 형 제사를 몇 해째 같이 지내고 있지요. 고단한 삶 사시느라 애쓰셨네요. 동생은 형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잘 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2년 남짓 써왔던 고향이야기 600여 편 중 몇 개를 묶어 <잃어버린 고향풍경1>을 냈다. 고향의 맛을 찾는데 열심이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 대표이며 올해 말에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채원(山菜園)>을 만들 작은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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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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