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에 깃든 시린 영혼, 김영갑

20여년 탐라의 원형 남은 제주를 사진에 담아

등록 2005.01.13 23:23수정 2005.01.1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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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두모악 갤러리에서 사 온 김영갑 선생의 이 사진들은 액자로 만들어 우리 집 거실 벽에 고이 걸어 두었다.

두모악 갤러리에서 사 온 김영갑 선생의 이 사진들은 액자로 만들어 우리 집 거실 벽에 고이 걸어 두었다. ⓒ 김영갑

회사에 반나절 휴가를 내고 김영갑 선생님의 사진전을 보고 왔습니다. 평일 오전인데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을 찾아와 오름을, 제주를, 지금도 용감하게 '살아 내고' 있는 김영갑의 영혼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지난 여름, 뜨거웠던 더위를 헤치고 두모악 갤러리를 찾아갔던 때부터 꼬박 반 년이 지났습니다. 아, 사진을 통해 선생님은 그렇게 또 세 개의 계절을 힘겹게, 하지만 지지 않고 너끈히 넘어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눈물겹게 고맙고 또 고마웠습니다.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 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199쪽


김영갑 선생은 '외로움과 평화'를 사진으로 찍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라산을 영혼의 고향으로 삼고 제주의 자연이 망가지기 이전, 탐라의 원형이 남아 있는 동안의 제주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20년 넘는 세월 동안 발품 팔아 그 땅을,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을 기록해 왔습니다.

베토벤에게서 귀를 빼앗아갔던 '운명'이라는 잔인한 존재는 그에게 '루게릭'이라는 천형의 병을 안겨 주었지만 끝끝내 지지 않았습니다.

끼니는 그냥 넘겨도 인화지와 필름이 없는 것은 견딜 수 없어서 밥은 굶더라도 필름만은 굶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하던 그가, 20만 장이 넘는 필름을 쓰면서 온 생으로 사진을 '살고자' 했던 그가, 셔터를 누를 힘이 없어서 사진을 찍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때 느꼈을 절망감이라는 것은, 저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절망을 딛고 그는 이렇게 다시 필름을 고르고, 인화를 하고, 사람들에게 제주의 오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종 안개비에 젖어 섬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를 외롭게 만든다. 섬에서도 내가 사는 중산간 마을은 유독 안개가 많고 비가 잦다. 광활한 초원의 목초지가 수평선까지 이어지고 소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군데군데 솟아오른 오름들은 이국적인 정취에 빠져들게 한다. 인기척이라곤 느낄 수 없는 중산간의 초원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들은 늘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빠진 나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초원으로 오름으로 내달린다. 그럴 때면 나는 오르가슴을 느낀다. 행복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199쪽



그가 그렇게 사랑한 오름들을 더 이상 찍지는 못하지만, '살고 싶다는 나의 기도는 사진'이라 말했던 그가 찍은 필름들은 아직도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인화한 오름의 사진들에는 그래서인지, 처절한 아픔과 준열한 자기 점검의 시간들이 얼핏 비치는 듯도 합니다.

전시되고 있는 용눈이 오름의 사진들은 한없이 풍성하고 따뜻하지만 그러면서도, 참 처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사진을 찍는 동안 건강했던 그가 지금은 조금씩 사위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래도 떨쳐 버리기가 힘들더군요.

내 앞에 펼쳐진 용눈이 오름의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그렇게 시리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어쩌면 사위어 가는 그의 시린 영혼을 마주 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난 여름, 제주의 돌과 풀과 바람과 꽃을 가득 마당에 풀어놓은 두모악 갤러리에 갔을 때 김영갑 선생은 제게, "은주씨, 서울 가면 꼭 같이 차 한 잔 해요, 우리"하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잔인한 통증 때문에 허리도, 다리도 자유롭지 못한 분이, 팔의 근육이 녹아 버려 휴지 한 장 한 손으로 들어올릴 수가 없다는 분이, 죽도 넘기기 힘에 부친다는 분이 '서울 가면'이라는 말씀을 하시니 저는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셔야지요,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서울만이 아니라 일본이고 미국이고 저 사막 한가운데라도 가고픈 곳 가셔야지요, 당연하지요……. 그렇게 혼잣말 하면서 선생님이 기적처럼 건강해지셔서, 거짓말처럼 가뿐한 몸을 안고 바람처럼 훨훨 다니시기를 빌었습니다.

a 한 손으로는 사인을 하기 힘들어, 이 사인을 하실 때 김영갑 선생은 왼팔로 오른팔을 받치고 힘겹게 적어 주었다.

한 손으로는 사인을 하기 힘들어, 이 사인을 하실 때 김영갑 선생은 왼팔로 오른팔을 받치고 힘겹게 적어 주었다. ⓒ 김은주


"얼굴에서 웃음을 잃은 지 오래다. 미소를 지으면 얼굴 근육에 통증이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을 자제하게 된다. 어쩌다 기자들이 와서 인터뷰를 할 때면 모두들 카메라를 보고 웃어 달라고 부탁한다. 웃으려고 하면 얼굴이 찌푸려지고 화난 표정이 된다. 그러면 다시 한번 활짝 웃어 보라고 주문한다. 잠깐이면 된다고, 안 되는데도 자꾸만 부탁한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웃음이다. 이제는 얼굴을 꼬집어도 아프지 않다."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233쪽

a 웃을 수가 없어서 한사코 사진을 찍지 않으려 하시지만, 선생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따스한 웃음이 그에게는 있다.

웃을 수가 없어서 한사코 사진을 찍지 않으려 하시지만, 선생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따스한 웃음이 그에게는 있다. ⓒ 권혁재

선생님 사진 좀 찍어도 되겠느냐 여쭈었을 때, 한사코 손사래를 치셨더랬습니다. 하지만 정작 선생님은, 웃으려고 하면 얼굴이 찌푸려지고 화난 표정이 된다고 잘못 아시는 그 얼굴이 참 곱고 환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다. 웃으실 때 잔뜩 주름진 그 얼굴이 어떤 얼굴보다 더 소박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선생님이 찍은 오름들이, 오름 속에 깃들어 사는 풀들이, 그 풀을 땅에 눕혔다 일으켜 세우는 바람이, 소들이, 살찐 궁둥이 씰룩대는 말들이, 까맣게 구멍 난 제주의 돌들이 이미 선생님 대신 웃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십니다. 그 웃음이 참 이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벌써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만 모르고 계십니다.

"날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날마다 사진을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해 홀로 지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 존재가 잊혀질지라도 나의 사진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제 막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제 친구는 지난 주부터 사진 강좌를 듣기 시작했는데,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김영갑 선생님의 전시회를 보러 올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제가 한 시간 남짓 전시장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언제까지 전시회가 계속되는지 물어보는 전화가 수도 없이 걸려 오고 있었습니다. 비록 선생님은 셔터를 누르지 못하지만 그의 사진은 이렇게 세상 속으로 걸어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날마다 사진을 찍으면서 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져도, 날마다 사진을 생각하는 날들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선생님이 잊혀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a 1997년에 하날오름 출판사에서 낸 책 <숲속의 사랑>. 이생진 시인의 시와 김영갑 선생의 사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책이다. 4년 전에 제주 토박이에게 선물받은 뒤로 내가 무지하게 아끼는 사진집이 되었다.

1997년에 하날오름 출판사에서 낸 책 <숲속의 사랑>. 이생진 시인의 시와 김영갑 선생의 사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책이다. 4년 전에 제주 토박이에게 선물받은 뒤로 내가 무지하게 아끼는 사진집이 되었다. ⓒ 하날오름

a 500부 한정으로 찍었다는 사진집 <은은한 황홀>. 이 책에도 염치없이 사인을 받아 왔다.

500부 한정으로 찍었다는 사진집 <은은한 황홀>. 이 책에도 염치없이 사인을 받아 왔다. ⓒ 김영갑

a 사람들에게 김영갑 선생의 존재를 널리 알린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이 책 덕분에 나는 제주를 떠올릴 때면 영락없이 김영갑 선생을 함께 떠올리게 되고 말았다.

사람들에게 김영갑 선생의 존재를 널리 알린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 이 책 덕분에 나는 제주를 떠올릴 때면 영락없이 김영갑 선생을 함께 떠올리게 되고 말았다. ⓒ 휴먼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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