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23회(4부 : 캠퍼스 연가 1)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1.22 15:56수정 2005.01.2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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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9월 16일쯤인가.
영희의 생일을 맞아 우리는 모처럼 학교 앞 카페에 모여 축하파티를 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한철이 지난번의 여자친구 진경을 데리고 들어왔다. 녀석의 얼굴을 보자, 소화가 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일어나려는데 초희가 잡았다.

나도 남의 생일 잔치에 와서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어색하게 녀석과 수인사를 나누었다.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 그만 오해 풀라고 했다.


"웬일로 오늘은 진경씨하고 같이 왔냐? 지난 주 같이 있던 여자는 어쩌구?"

내가 비아냥거리듯 말하자, 녀석은 당황해 하는 빛이 역력했다.

"언제 내가 누구하고 같이 있었다고 그래. 네가 잘못 보았겠지. 야, 나는 진경이 얘밖에 없어. 정말이야."

발뺌하는 녀석에게 내가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 며칠 전에 학교 식당에서 다정하게 밥을 먹고, 언뜻 보니 차도 마시는 것 같던데 그 여자는 누구냐?"


"봤냐? 그럼 아는 체를 하지? 그리구 어어‥‥ 걔는 으으응, 우리 서클 후배야. 자꾸 나한테 테니스 좀 가르쳐달라고 해서 그래서 만났던 것뿐야."

녀석은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위기에 몰린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어쨌든 이렇게 내가 여기까지 왕림한 것은 사실은 여기 진경이가 너희들을 보고 싶다며 함께 가자고 해서. 얘는 너희들하고 구면이잖냐? 그리고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다 용서해라. 다시는 안 그럴 게"

그러자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노진이 한 마디 던졌다.

"다시는 안 그럴 게?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라 임마. 너 '그 노무 다시는 안 그럴 게' 병에 거린 거 모르고 있냐?"

"허허 의사양반, 그만 하자니까. 오늘같이 좋은 날 자꾸 그런 얘기해서 시간 낭비 할래.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지난 일을 반성하고 영희씨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계산한다. 마음껏 먹고 마셔라. 뭐든지 시키기만 하라구."

녀석의 못 말리는 넉살에 나와 노진은 그만 웃고 말았다.

여차여차 하다보니 어느새 9시 30분이 되었다. 초희가 기숙사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다며 그만 일어나자고 했다. 한철은 자리를 옮겨 한잔 더 하자며 떼를 썼다. 나와 초희가 시간 때문에 안 된다고 하자, 자기가 오토바이를 타고 왔으니 걱정 붙들어 매라고 하였다.

뭐 여기서 10분 전에만 나가면 된다나. 또 녀석은 우리 늦은 김에 나이트 클럽에 가서 몸 좀 풀자고 했다. 그러자 노진이 거기도 12시면 문 닫는다고 하자, 자기가 밤새워하는 곳을 알고 있다며 가자고 했다.

“야, 말이 그렇지 어떻게 밤새 춤을 추냐?”

노진이 그렇게 말하자,

“그럼 온천장에 가서 하룻밤 묵으면 되지.”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했다. 우리는 어이가 없었다. 간신히 녀석의 횡설수설을 물리치고 노진에게 영희를 하숙집까지 잘 바래다주라고 말하고 나서 먼저 그곳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거의 기숙사에 다와 가는데 오토바이의 굉음이 밤하늘을 찔렀다. 무슨 소리인가 해서 돌아봤더니 한철이었다. 녀석이 진경을 뒷자리에 태우고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용감무쌍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녀석은 우리가 있는 곳에 와서 속도를 낮추었다. 진경은 한철의 허리를 꼭 잡고 있었다.

"네가 여길 웬일이냐?"

내가 묻자

"몰랐어? 진경이도 여기 기숙사에 있잖아."

"그랬니? 몰랐다야. 그런데 진경씨는 언제부터 기숙사 생활을 했어요?"

내가 이번에는 진경을 향해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번 학기부터요. 집에서 다니자니 좀 멀고 하숙이나 자취를 시켜달라니까 안된다고 하고, 그래서 들어왔죠 뭐. 어쨌든 여기 들어오니까 아빠, 엄마 잔소릴 안들 어서 정말 살 것 같애요."

"그래도 귀사 시간 등 통제가 철저해서 불편하지 않아요?"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다 방법이 있어요. 놀다가 10시가 넘었다 싶으면 저는 아예 친구 하숙집이나 자취방으로 가요. 거기 가서 하루 신세지는 거죠"

이런 얘기를 하며 기숙사에 도착하니 시간이 5분전 10시였다. 초희와 진경이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잠시 그녀들이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나는 술을 먹은 한철이 걱정이 되어 오토바이를 놓고 걸어가자고 했다. 녀석은 무슨 소리냐며 괜찮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에 3층과 4층 숙소까지 올라간 초희와 진경이 창문을 열고 우리를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한철이 갑자기 오토바이에서 내렸다. 나는 녀석이 웬 일로 내 말을 듣는가 싶어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걸 녀석은 기숙사 쪽으로 달려가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조한철은 서진경을 사랑한다! "

세 번씩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기숙사의 여학생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내다보다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녀석의 엉뚱한 행동에 나는 한편 무안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녀석의 배포 또는 객기가 한없이 부러웠다.

녀석은 나보고도 한번 자기처럼 해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도 술을 먹으면 저런 용기가 날까?' 그런 생각을 다 해 보았다.

9월 말, 우리는 어제의 용사처럼 다시 모였다.
토요일이었는데, 누군가 특별한 주말을 보낼 묘안이 없느냐고 물어, 내가

"우리 저녁 먹고 동학사 입구까지 한번 걸어서 갔다 올까?"
그런 제안을 하였다. 옥신각신 토론 끝에 내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내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출발했다. 내가 기타를, 노진은 작은 녹음기를 들었고, 그리고 한철은 버너와 코펠 등이 들어있는 배낭을 짊어졌다.

셋 아니, 여섯이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따라 불러 가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걸었다. 여자들이 힘들어하면 중간 중간에 쉬기도 하면서 말 그대로 소요음영(逍遙吟詠)하고, 미음완보(微吟緩步)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우리는 걷고 걸어 동학사 입구까지 다다랐다.

우리는 풍광 좋은 곳에 터를 잡고 모닥불을 피었다. 끝말잇기와 심리게임을 했다. 이번에는 하나씩 우스개 소리를 돌아가며 하기로 했다. 못하거나 세 사람 이상을 웃기지 못하면, 엉덩이로 이름을 쓰라거나 노래나 춤을 추라고 시키는 등 벌칙이 주어졌다.

갑자기 한철이가 사회자 행세를 하며 고스톱 순서로 돌아가라고 했다. 초희가 첫 번째로 걸렸다. 그녀는 다음에 하면 안되겠느냐고 했으나 한철이 녀석이 10초 안에 안 하면 벌칙을 주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말문을 열었다.

"시골처녀와 도시남자가 맞선을 보았대요. 장소는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는데, 남자가 종업원에게 '여기, 메뉴 좀 갖다 주세요.' 그러니까 그 시골처녀 하는 말, '저도 그걸로 주세요!' 이번에는 남자가 차림표를 보며 '함박스테이크로 주세요', 그러니까 여자가 이번에는 '저는 반 바가지만 주세요. 한 바가지는 너무 많거든요.' 그러더라나요"

다행히 웃는 사람이 과반수를 넘어 벌칙 없이 통과했다. 다음에는 내 차례였다. 나도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예전에 교회 선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다름 아닌 충청도 부자(父子) 시리즈.

"제 1 탄, 아버지가 산 아래에서, 그리고 아들은 산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아부우지이--, 도올- 굴러가유---' 말한 다음 아래를 보니 아버지가 이미 돌에 맞았더라나."

"애개개- 그게 전부야 다 아는 얘기잖아."

역시 반응이 썰렁했다. 한철이 벌칙을 주려는 순간,

끝까지 들어봐야지. 제 2 탄, 이번에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아아부우지이-- 도올- 굴러가유---' 하니까 밑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하는 말, '피이해앴느으니이라아--- ' 그러더래. 그런데 그만 아버지가 돌에 맞아 쓰러진 거야. 그 다음에야 위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말, '두우 개앤 디이---'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24회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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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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