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 일곱살의 기억

소외된 사람들을 보면 일견 제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습니다

등록 2005.01.22 19:55수정 2005.01.2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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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글이 정식기사로 채택된다면 저는 100회 째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는 셈입니다. 생나무에 머문 글까지 합한다면 120편은 족히 될 겁니다.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제 볼품 없는 글을 기사로 채택해주신 <오마이뉴스>와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저는 지금껏 그랬습니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닙니다. 글은 가슴으로 쓰는 것입니다. 저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이웃들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들과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동류의식 같은 게 흐릅니다. 소외된 사람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을 보면 일견 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제 친구를 훔쳐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아픈 눈으로 제 가족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제게는 슬픔이었습니다.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평생을 슬프게 살았던 사람들이 제 가슴속에는 내재해 있었습니다. 슬픔이 때로는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그 힘을 믿었기에 저는 글을 썼고 그 글 속에서 그들은 매번 울었습니다. 화려했던 시절은 이미 제게 잊혀졌고 저는 지금 슬픔으로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30년 전 그때 저는 영동역(永同驛)에 있었습니다. 영동역에서 저는 마산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마산에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제게는 잊혀지지 않는 친구가 있습니다. 장석문입니다. 키가 저보다 한 뼘은 더 컸기에 어머니는 녀석을 '꺽다리'라고 불렀습니다.

녀석은 신마산(新馬山)에서 살았습니다. 정확하게는 마산시 창포동입니다. 저는 녀석과 하루 종일 같이 지냈습니다. 일요일에는 바다를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녀석은 낚시를 좋아했습니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우리는 술도 곧잘 마셨습니다. 도다리를 낚으면 그것을 안주 삼아 소주를 물처럼 들이키기도 했습니다.

그 날은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학교에서 단체 영화관람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저와 녀석은 극장을 향해 걸었습니다. 시민극장(市民劇場)이었습니다. 얼마를 걸었을까요, 저는 회산다리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회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노점상들이 다리 위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저는 가슴을 졸이며 그곳을 지났습니다. 어머니가 그곳에 있다면.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어머니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a 17살의 소년이 벌써 48살의 장년이 되었습니다. 오늘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17살의 소년이 벌써 48살의 장년이 되었습니다. 오늘 사무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박희우




저는 가슴을 쓸어 내렸습니다. 움츠렸던 어깨를 그제야 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인삼을 팔곤 했었습니다. 그런 어머니 때문에 저는 그 다리를 지나다니지 않았습니다. 한참이나 떨어진 철길을 택해서 집을 향하곤 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인삼 행상을 하는 어머니가 싫어 저는 어머니의 존재를 숨기곤 했었습니다.

그 날 저는 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 때문에 어머니는 장사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 믿음은 곧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어머니는 그린 듯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땅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산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어머니는 환하게 웃고 바쁘게 움직입니다. 신문지에 바위옷(인삼을 좀더 오래 보존하기 위해 사용하는 풀 종류의 한 가지)을 깔고 그 위에 인삼을 얹더니 보기 좋게 포장을 합니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손님에게 그것을 내밀고 손님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그곳을 떠납니다.

저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저를 스쳐지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학생마저 저를 스쳐 지나갈 때 어머니는 제게 손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이 가, 어이 가거라!"

그러나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어머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대신 눈물에 가득 찬 모습만이 제게는 보일 뿐입니다.

그때 '꺽다리'가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돌아서고 어머니는 제게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녀석을 향해 뛰었습니다. 왠지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저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녀석이 말했습니다.

"비가 많이 온다. 자, 빗물을 닦아라!"

녀석이 제게 손수건을 주었습니다. 저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녀석이 말했습니다.

"희우야, 우리 영화보지 말까? 소주나 한 잔 할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날 저는 취하도록 마셨고 녀석은 집까지 저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녀석은 제가 사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도 녀석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녀석이 골목길을 벗어날 때쯤 저는 기어이 토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녀석에게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친구야!"

그때 제 나이 슬픈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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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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