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04회

등록 2005.01.24 08:07수정 2005.01.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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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물음에 구효기는 원망스런 눈길로 구양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구양휘는 고개를 끄떡이며 슬그머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을 어기고 구양휘는 말한 것이다.

“아니 순서대로 물어 봅시다. 섭장천이란 노인은 초혼령이 내 것이라 했소. 내 것이 맞소?”


“담 공자 것이 맞소.”

“그 이유를 알려주겠소?”

구효기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에 이런 표정이 떠 오른 적은 극히 드물다. 더구나 또 다시 탄식이다.

“휴우…, 노부는 담 공자에게 아무런 대답을 드릴 수 없소. 다만 때가 되면 담 공자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이오.”

“때? 그 때가 언제요?”


담천의는 구효기를 바라보았다. 만박거사란 이 인물은 분명히 자신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었다. 그가 단지 신복이라서가 아니라 분명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구효기는 애써 그의 질문을 피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 때였다. 구효기는 대답을 하려다가 소리가 나는 입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담천의와 대화를 하면서도 이미 그의 관심은 그곳에 가 있었던 것 같았다.


“형님들, 뭐 더 이상 볼게 있소. 우리도 쫒아 가 봐야 하지 않겠소?”

여산삼괴의 셋째인 법환귀사(法幻歸士) 막여관(莫予寬)의 목소리였다. 그들 역시 사라져 버린 오룡번에 대한 아쉬움에 투덜거리다 일어 난 모양이었다. 말과 함께 무엇이 급한지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막여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안루를 나서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강명이란 사내가 투박한 목소리로 나직이 소리쳤다.

“잠깐 막 여관! 아니 운중악(橒仲岳)!”

운중악은 천변무영객의 이름이다. 어찌 여산삼괴의 셋째인 막여관을 그렇게 부른 것일까? 의문을 느낄 사이도 없이 막여관은 자신을 부르자 한순간 주춤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문을 향해 폭사되어 나아갔다. 그 행동은 강명의 말대로 그가 막여관이 아니고 천변무영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동이었고, 천변무영객이 왜 무영이라 불리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쾌속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잠시 주춤한 것은 실수였다. 그의 쾌속함보다 더욱 빠른 한줄기 도광(刀光)이 작렬했다.
쇄---액---!

그것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이었다. 계산대에 앉자 있던 점소이 하나가 소매 속에서 한자 길이의 단도(短刀)를 꺼낸 것과 동시에 문을 통과하려는 천변무영객을 향해 섬전(閃電)과 같은 도광(刀光)을 허공에 뿌린 것이다.

“…!”

신음소리는 없었다. 하지만 허공에 그려지는 한줄기 핏줄기는 사라진 도광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분명 일도를 맞은 것으로 보였지만 이미 천변무영객의 신형은 그의 외호대로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도대체 왜 노부의 동생을 공격하는 게냐!”

여산삼괴의 첫째인 기환풍(奇幻風) 막여균(莫予均)이 막여관에게 공격을 가했던 점소이에게 신형을 날리는 순간 그는 갑자기 두 다리가 뻣뻣해 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귀를 파고 드는 강명의 무서운 목소리.

“살고 싶으면 가만있는 게 좋다. 한심스럽게 동생과 운중악이 뒤 바뀐 것도 모르는 멍청이라면 죽어도 마땅하지만….”

그의 말이 끝날 때에는 이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이미 십여명의 인물들이 장안루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표적을 찾은 것이다. 그 광경을 본 구효기의 입에서 탄식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운중악의 욕심이 큰 화를 불렀구나! 그리도 저지하려 했거늘….”

무슨 뜻일까? 이미 구효기는 막여관이 천변무영객 운중악임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이 탁자로 오는 도중 그는 법환귀사(法幻歸士) 막여관(莫予寬)에게 장자(莊子)의 부끄러운 고사(古事)를 들려주며 의미심장한 경고를 한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변무영객이 세 가지 무가지보라 했던 것 중에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그것이 뭐길래 저렇듯 쫒기는 것인지요?”

남궁산산의 질문에 구효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차라리 모르는 것이 좋다네. 어차피 마물이나 이 세상에서 없어질 마물이 아니니….”

그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탁자 위에 놓았던 삼각소기도 품속으로 갈무리했다. 이제는 일이 끝나 더 이상 점을 치지 않겠다는 의미다.

“자네들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나 미뤄야겠네. 이곳에 객방을 잡아 놓았으니 장안의 명승지라도 다니시며 구경들 하시게.”

말을 하는 구효기의 시선이 구양휘를 향했다. 구양휘는 무언가 찔리는 듯 자꾸 시선을 외면하려 했다.

“잔치상이 차려질 때까지 유람이나 하는게 좋다는 말씀이시구려.”

“잔치상을 차린 사람들은 정작 잔치상을 받지 못하는 법이지. 또한 남의 잔치에 끼어들어 무리한 욕심을 부리면 화를 불러오게 되네. 자네야 덩치답지 않게 눈치가 빠르니 이미 알 것이라 믿네.”

“어르신께서 먹여주고 재워주겠다는데 제가 어찌 거절하겠소.”

구양휘는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들의 태도에서 이미 두 사람은 허물없이 지낼 정도로 보였다.

“자네는 언제봐도 고약한 친구야…….”

말과 함께 구효기는 시선을 돌려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담공자는, 휴우…. 모사재인(謀事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요.”

무슨 뜻일까? 구효기는 담천의에게 무슨 말인가 하려다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렸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성사는 하늘에 달려있다’는 한마디만 던진 것이다. 허나 담천의가 무어라 하기 전에 이미 구효기는 급한 걸음으로 도영이란 흑의사내를 데리고 장안루를 나가고 있었다.

“기이한 일이야. 신복이 담형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팽악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남궁산산이 고개를 끄떡였다.

“팽오라버니도 그렇게 느꼈군요. 거사께서는 이 자리 모두에게 하대했어요. 헌데 유독 담 오라버니에게만 공대를 하고 있었거든요? 왜 그랬을까요?”

일행은 남궁산산의 지적에 모두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은 무심코 지나갔지만 생각해 보니 구효기의 태도에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처음 여기에 들어설 때 신복께서 구양형 일행이 오느냐고 묻는 거야. 그렇다고 했지. 그랬더니 음식을 시켜놓았으니 편히 먹으라는 거야. 분명 우리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이리 급하게 떠나신 거지?”

모용수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말에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남궁산산이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오룡번을 이용해 천변무영객을 잡으려 했던 거예요.”

“무슨 소리야?”

“아까 철혈대주는 분명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오룡번에 대한 소문을 퍼트렸다고 했어요. 소문을 퍼트린 자는 천변무영객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찾고 있는데 천변무영객을 찾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오룡번으로 천변무영객을 유인한 거예요.”

욕심은 욕심을 부른다. 특히 천변무영객이 아무리 신법과 무공이 뛰어난 인물이라 해도 도둑은 도둑이다. 천고의 기물 오룡번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천변무영객 같은 인물에게는 참지 못할 유혹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추리는 합리적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과 구효기의 말을 종합해 보면 사리에 맞았다.

“그것과 신복이 떠나신 거와 무슨 관계가 있어?”

“신복도 그것을 노리는 것으로 봐야죠. 아니면 그들의 손에 그 물건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거나, 헌데 천변무영객이 가지고 있다는 무가지보가 무엇이기에 그들이 오룡번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것을 찾는 걸까?”

남궁산산의 말은 일행 모두에게 공통된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풀 수 없는 의문이었다.

“헌데 천변무영객은 참으로 대단하오. 어떻게 남도 아닌 형제 속의 인물로 변장할 수 있소? 누구라도 형제들 틈에 끼어들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을 거요.”

“그러니 천변무영객이지. 천변무영객은 그렇다해도 그것을 알아 본 통천신복과 강명이란 사내가 더 신비하군.”

팽악의 감탄에 한술 더 뜨는 모용수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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