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현대미술을 조명한다, EBS <오리엔탈의 빛>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는 미술 다큐멘터리

등록 2005.01.26 22:05수정 2005.01.2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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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샤갈 전 >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낮 시간엔 관람이 힘들 정도였다. 서점가를 보면 미술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미술은 잘 알지 못하지만 막연히 좋고, 보고 싶기도 하고 알면 알수록 그 재미에 빠져드는 장르 중 하나이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수요를 만족시켜주기 위한 사회적 장치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도슨트(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들이 설명하는 방식도 있지만, 그 서비스가 많지가 않고(시간을 맞추기가 힘들다), 미술서적들도 다양하지 않다. 대중매체 텔레비전에서는 미술프로그램은 1년을 통틀어 몇 편 되지 않는다.

이런 실정에서 EBS가 내놓은 <오리엔탈의 빛 20부작>(매주 화, 밤 10시 10분)은 미술프로그램을 텔레비전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많은 이들의 목마름을 달래줄 것 같다. 이 프로그램은 세계무대에서 주목 받는 아시아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담은 것으로 1년간의 제작기간을 거친 것이다.

생생한 목소리 - 서도호, 쉬빙, 야요이 쿠사마 …

‘세계가 주목하고 인정한 아시아의 거장’의 첫 순서는 서도호(12월 14일 방영). 그는 제 49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관 및 한국관의 대표작가다. 원래 평면작업을 하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입체작업을 시작했고, 설치작가로 명성을 얻고 있다.

자신의 작품 앞에 선 서도호
자신의 작품 앞에 선 서도호EBS
그에게 주요 소재는 집이다. 현실의 집을 천(옷감)과 철골조직으로 입체작업을 해서 재현하고 있다. 언제나 이동할 수 있고, 어디든지 세울 수 있는 집인 셈이다. 서도호가 지닌 동양적 섬세함과 독특한 아이디어는 지금까지 설치작품들에서 보지 못했던 우아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서도호 <집>
서도호 <집>EBS
이미 방영된 6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두 번째 편 중국출신 쉬빙 편이다. 마치 한편의 서사시가 물 흐르듯 흘러가는 다큐멘터리였다. 특히 그는 문자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이므로 영상이면서도 인문적인 향취를 잃지 않은 구성이 돋보였다.


쉬빙은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뉴욕 브루클린에서 살며 작업하는 설치작가다. 만리장성을 탁본하여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쉬빙은 문자를 대상으로 많은 작업을 했다.

< The Net, 2004>
< The Net, 2004>EBS
그의 작품을 보면, < The Net, 2004 >는 소로우의 <윌든> 가운데 제 9장 '호수' 편을 알루미늄 알파벳을 갖고서 입체공간에 펼친 것이다. '호수'편을 모두 펼친 것이다. 이쯤 되면 문자는 읽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형태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마치 호수처럼 출렁이는 물결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작가의 얘기다. 읽어서 아는 '호수'와 느껴서 바라보는 '호수' 두 가지가 함께 만난다.


< A Book from The Sky >
< A Book from The Sky >EBS
<천상의 책 ( A Book From The Sky ) > 에서는 자신이 발명한 2천개의 중국식 문자를 새겨 넣은 책으로 작업한 대규모 종이 설치 작업이다. 그가 발명한 독자적인 한자가 만드는 장엄함은 천상의 책, 지상에는 없는 책, 바로 그것이다.

<오리엔탈의 빛>은 지금까지 ‘패니즈 바비걸 야요이 쿠사마’, ‘황색공룡- 비엔날레’, ‘자유주의 에술인들의 성지- 중국 예술인촌’ ‘냉소적 반항아- 팡리준’ ‘사이버 여신 마리코 모리’ 등이 방송되어 아시아의 젊은 거장들의 작업과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20 부작의 힘을 이어 나가려면

최근 들어 장기 기획 다큐멘터리가 여럿 선보였다. KBS 스페셜 <도자기>가 6부작으로 제작되었고, EBS에서는 13부작 다큐멘터리 <이슬람 문화기행> 방송에 이어 이번에 20부작 <오리엔탈의 빛>을 방송했다. 심도 있게 접근하기 위한 장기기획이지만 하나의 주제로 긴 호흡을 이어가는 작업이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장기기획 프로그램은 어느 새 길을 잃다보면, 썼던 자료화면 또 쓰고, 했던 이야기 또 하면서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매회 마다 엇비슷한 구성으로 화면만 바뀌었지 비슷비슷한 말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편당 새로운 구성과 주제에 맞게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일도 중요하다.

<오리엔탈의 빛>의 경우는 작은 장치들에 대해서 욕심이 난다. 화면이 ‘예술적’이고 작업 자체가 ‘예술적’이기 때문이다. 화면은 아름답고도 다이내믹한데, 음악은 그 화면의 힘을 받쳐주지 못하는 점이 다른 여느 프로그램 보다 더 강하게 다가온다. 자막이나 제목의 글씨들도 기획의 품격에 맞게 업그레이드 하면 더 살아날 것이다. <오리엔탈의 빛>은 앞으로 14편이 남았다. 지금 보다 더 멋진 다큐멘터리를 펼쳐줄 것이라 기대된다.

EBS는 지난 가을 세계적인 규모의 다큐멘터리를 편성해서 시청자들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다큐멘터리 축제를 통해 수준 높은 작품을 본 시청자들의 눈은 이제 전 보다 몇 배 높아졌을 것이다. 문화에 대한 욕구, 지식에 대한 욕구가 높아지고 있다. 평생교육을 주장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방송사들은 좋은 프로그램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주면 좋겠다.

드라마에 밀려, 오락프로그램에 밀려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던 다큐멘터리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자본이 풍부한 SBS와 MBC도 나서지 못한 장기기획 프로그램을 편성한 EBS의 노력은 매우 높게 평가할 만하다.

덧붙이는 글 | 텔레비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서울시민이다. <2004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는?'으로 가작을 수상했다.

덧붙이는 글 텔레비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서울시민이다. <2004 좋은 방송을 위한 시민의 비평상>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시선이 집중되는 이유는?'으로 가작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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