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신명에게 빌고 싶은 마음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74) 겨울 이야기 (6)

등록 2005.01.28 20:17수정 2005.01.2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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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겨울철에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다는 강원도 산골마을인데도, 내가 사는 횡성 안흥지방은 올 겨울 들어 아직 눈다운 눈이 내리지 않았다. 여태까지 내린 눈을 다 합해도 5cm도 안 될 것 같다. 이 마을에서 평생을 사신 분들의 이야기로도 올해같이 눈이 내리지 않은 겨울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우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평창이나 진부는 그런대로 눈이 쌓였는데 같은 강원도라도 산 하나 사이를 두고 기온과 날씨가 아주 다르다. 눈이 내리지 않아서 교통에는 불편함이 없지만 그래도 겨울에는 눈이 내려야 겨울답고 생활의 리듬에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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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뒤덮인 대관령의 산들 ⓒ 박도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은 가뭄을 타게 마련이다. 어제부터 뒷산에서 내려오는 수도관의 물이 메말라 버렸다. 같은 샘물을 먹는 앞집 노씨도 이런 가뭄은 당신 평생 처음이라고 한다. 물이 갑자기 나오지 않자 집안이 말이 아니다. 청소 세면의 불편은 물론이거니와 끼니도 제대로 해 먹지 못하고 있다.

이 참에 상수도 혜택이나 받을 수 있을까, 면사무소로 군청 민원실로 가서 알아봤더니, 우리가 사는 곳은 지대가 높아서 가압장을 따로 설치해야 하는데, 그 예산이 자그마치 5천만원 이상 들기에 서너 집으로는 설치가 어렵다고 했다.

“쌀독에서 인심난다”고 이웃간에도 넉넉할 때는 인심이 좋으나 대체로 곤란할 때는 남을 탓하면서 인심이 고약해지기 십상이다. 어린시절 고향에서 보면 꼭 가뭄이 든 해 모내기철은 물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그동안 한 샘물을 세 집이 나눠 쓰며 잘 지내왔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 옆집 작은 노씨 댁에 새로 이씨네가 이사오면서 물 문제가 좀 복잡하게 얽혔다. 그래서 혹이나 이번 가뭄에 물 문제로 이웃간에 서로 마음이 상할까 하여 간밤에는 앞집 옆집 분을 우리 집으로 모셨다.

그런 후 이런 어려운 때일수록 서로를 배려하면서 물 때문에 서로 마음 상하지 말자고 호소했는데, 내 얘기가 잘 먹혀서 조용히 이 가뭄을 잘 이겨낼지 두고 봐야겠다. 지금이라도 당장 눈이 펑펑 쏟아져 메말라 버린 샘에 물이 가득 고이면 만사 해결이다. 그때까지 모두 잘 참고 견뎌야 할 것 같다.

과학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이 자연을 마구 학대한 탓인지 지구촌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점차 심해지고, 끔찍한 자연재앙도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동남아 일대에서 수십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이는 하늘이 자연에 겸손치 못하고 오만하거나 감사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내린 벌이요, 앞으로 하늘이 더 큰 벌을 내리기 전에 미리 들려주는 경고음이 아닐까 싶다.

지난날 우리 조상들은 가을 추수가 끝나면 ‘고사’라 하여 집집마다 햅쌀로 빚은 시루떡을 해서 장독대나 외양간, 우물에다가 시루채로 두고 소지(燒紙: 신령 앞에서 비는 뜻으로 종이를 불살라 공중으로 올리는 일)를 올리면서 지극 정성으로 신령님께 빌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주문을 외면서 빌던 그 모습을 나는 옆에서 지켜보면서, 학교에서 배운 바 이는 미신으로, 우리가 버려야 할 인습이라고 여겨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요즘 도시나 농촌 모두 고사지내는 풍습을 찾기 힘들다.

이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할머니의 주문을 곰곰이 되새겨 보면, 한 해 농사를 잘 짓게 해줘 감사하고, 간장 된장을 잘 먹게 해줘 식구들이 건강해서 감사하고, 한 해 동안 우물물을 잘 먹게 해줘서 감사하다고, 신령님에게 정성스럽게 비는 내용들이었다. 이는 곧 자연에 대해 감사 의례요, 앞으로도 자연을 공경하겠다는 일종의 맹세였다.

그런데 과학문명에 중독 되기 시작한 사람들이 교만해져서 자연을 사랑하고 공경하기 보다는,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 여기저기 마구 파헤치고 불 지르고 깨트려 부쉈다.

차창 밖으로 본 아름다운 금수강산 백두대간도 군데군데 파헤쳐지거나 불 탄 자국으로 점차 볼썽사나워지고 있다. 이러다가 무슨 자연의 재앙을 받을지 두렵다. 옛날 할머니처럼 천지신명에게 소지 올리면서 온 나라 백성들의 무병과 안녕, 그리고 교만해진 마음을 사죄하고 싶다.

곧 눈이 펑펑 쏟아져서 겨울 가뭄도, 올 봄 가뭄도 해소시켜 주고, 메마른 사람들의 마음도 푸근하게 해줬으면 싶다. 마침 오늘이 아버님 제삿날이다. 예사 때보다 더 오래 엎드려서 한편으로는 천지신명에게 나와 이웃들의 오만과 교만을 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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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싸인 강원 진부의 산촌마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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