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친구들과 한버너밥 우정을 나누다

예니네 가족 텐트메고 유럽가기 7

등록 2005.02.02 22:55수정 2005.02.03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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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택시기사라고 별 수 있겠어?"

우여곡절 끝에 저녁 무렵 파리시의 외곽에 있는 볼로뉴캠핑장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도 책보다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본 지도가 훨씬 더 도움이 됐다. 차단기가 내려져 있는 입구에는 성수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내 앞의 차가 들어가고 차단기가 내려와 차를 막으면서 청년 하나가 다가오더니 우선 차를 옆으로 대라고 손짓을 하길래 그가 지정하는 곳에 차를 댔다. 먼저 수속을 밟은 다음 차를 가지고 들어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a 몽마르트 언덕에서..

몽마르트 언덕에서.. ⓒ 유원진

1층짜리 조그만 리셉션 건물은 여러 줄의 사람들 때문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예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자리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이 됐다. 긴 줄이 줄어드는 동안 직원과 손님이 나누는 대화를 열심히 귀기울여 들은 덕분에 내 차례가 오자 그녀가 묻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약이 안 되어 있다는 뜻으로 "노"라고 말했다.


그녀가 나를 놀란 듯이 쳐다보더니 다시 천천히 묻는데 신경을 바짝 써서 들으니 예약 여부를 물은 게 아니고 어떤 종류의 숙소에 묵을 거냐고 물은 것이었다. 거기에다가 "노"라고 했으니 그녀가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텐트를 가져왔고 예약이 안 되어 있다고 하자 대뜸 텐트가 큰 것이냐고 묻길래 주워 들은 대로 아주 작은 것이라고 했더니 대뜸 "오케이"를 하며 자리를 지정해 준다. 나중에야 여러 번 하면서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생소한 단어들 때문에 여러 번 다시 듣고서야 정확히 이해를 했다. 필자의 옆 줄에 있던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는 거의 의사 소통이 안되는 데도 훌륭히 체크인을 마치고 있었다.

며칠을 머무를 곳이라 조금 귀찮아도 신경을 써서 자리를 골랐다. 리셉션에서 지도까지 주면서 정해준 블록을 두어 바퀴 돌다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차와 나란히 텐트를 세웠다. 텐트가 작아서 잘 때는 짐을 차 안에 두어야 해서 차와 텐트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차를 세우고 보니 나중에 차와 텐트를 연결하여 빨래줄을 만들 때 아주 유용했다.

a 사이좋게 선 텐트와 차-볼로뉴 캠핑장에서

사이좋게 선 텐트와 차-볼로뉴 캠핑장에서 ⓒ 유원진

새로 산 텐트를 처음 사용하느라 잠시 헤매다가 대충 세우고 나니 저녁 때가 다 됐다. 아침 6시에 파리에 도착해 차량을 인수하고 짐을 찾아 캠핑장 오는 데 무려 12시간 이상 걸린 것이었다. 다행히 시간이 8시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 대낮 같이 밝았다. 여름에는 북극에 가까울수록 해가 길다더니 9시가 넘어서야 어둑어둑해지더니 해가 졌다.

하루 종일 파리를 헤매느라 지쳐 있는데다 밥을 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짐을 풀다 말고 화장실 가는 척, 캠핑장 내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입구에는 칠판 같은 것을 세워 놓고 오늘의 스페셜인 듯 요리 그림과 가격이 써 있었는데 어림짐작으로 계산해 봐도 일인당 2만원 남짓 되었던 것 같다. 유럽에선 음식값이 장난 아니라더니 비싸긴 비싸군. 아이스박스를 뒤지고 있는 아내의 뒤로 가 앉아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붙여 보았다.

“화장실 갔다 오다 보니 식당 있던데... 딱 한 끼만 사먹자, 응?”
“이제 여행 시작인데 벌써 그러면 어떻게 해?”
“언제 버너 키고 반찬 만드냐? 딱 한 번만 응?”
“돈이 얼마나 드는데?”


이 부분에서 잘해야 한다. 가서 앉은 다음에야 설마 나가자고 하겠는가.

“보니까 넷이 한 사만원이면 되겠던데.”


절반 이상을 잘랐다.

“미쳤어? 한 끼에 사만원이라니... 쉰소리 그만하고 빨리 여기다 물이나 부어. 금방 해.”

일언지하에 거절 당하고 투덜거리며 취사 도구를 준비하는데 기어코 한국에서 걱정했던 대로 버너가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캠핑하는 데 있어서 버너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특히 유럽까지 가서 하는 캠핑에 있어서랴. 출발 전에도 여러 여행기에서 버너를 잘못 사서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에 가스 버너가 두 개나 있는데도 남대문시장 전문 매장에 가서 새로 샀는데 이게 또 잘못 산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가스 버너가 두 종류가 있어서 '브루스타'라고 불리는, 일반 슈퍼에서 파는 빨간 뚜껑의 길다란 용기로 되어 있는 연료를 쓰는 버너가 있고 나사식으로 돌려서 탈착을 하는 파란색의 밑부분이 넓적한 용기를 쓰는 버너가 있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때 쓰는 브루스타는 버너 자체의 부피가 커서 여행용으로는 부적합할 뿐더러 유럽에서 맞는 연료를 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일부러 남대문에 나가서 그것도 그 중 제일 큰 가게에 들어가 유럽으로 캠핑 여행을 간다고 얘기하고 두 번씩이나(잘못 알아 들었을까 봐) 소위 유럽형 버너를 달라고 신신당부하며 샀는데 엉뚱한 버너를 준 것이다. 잘 모르면 물어 보고 정확한 것을 줄 것이지 소위 전문상가라는 곳이 그 모양이니 우리 나라도 참으로 난감한 나라라 아니할 수 없다.

a 무용지물이 된 남대문 버너

무용지물이 된 남대문 버너 ⓒ 유원진

사실 그 당시는 귀국하기만 하면 쫓아가서 욕이라도 해 주리라 맘 먹었다. 하지만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여행이란 지나가면 대부분의 고생도 추억이 되고 말아 그냥 넘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면 그야말로 여행 전체를 망칠 수도 있는 대형 사고가 될 수도 있다. 하여튼 캠핑장에 있는 소위 매점에는 우리 버너에 맞는 가스 연료가 없었다. 파란색까지는 맞는데 윗부분이 나사식이 아니라 그냥 버너에 붙은 케이스에 가스통을 넣고 케이스 뚜껑을 돌려 닫으면 펀칭이 되면서 가스가 공급되는 생전 처음 보는 형식이었다.

매점에 버너까지 가지고 가서 애꿎은 점원 아가씨에게 투덜거리다가 맥이 빠져 텐트로 돌아오면서 한국에 있는 그야말로 무식하고 무성의한 상점 주인인지 점원인지를 저주했다. 거기에 맞는 버너라도 팔면 억울한 대로 사서 쓰겠는데 유럽에서 버너는 전문상가에서만 판다니 날은 어두워지고 여기까지 오는데도 하루 종일 걸렸는데 어느 세월에 차를 끌고 나가 전문점을 찾아 다니겠는가.

텐트 주위에 허기진 모습으로 서성거리던 식구들은 터덜터덜 오는 내 모습을 보고 직감적으로 알았는지 거의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매점에서 빵을 사먹을 수도 있었지만 하루 종일 차를 타고 헤매다니면서 빵과 과자만 먹은 데다 캠핑장만 찾으면 쌀밥에다 김치찌개를 먹을 것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한 팀원들의 모습을 팀장으로서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실망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텐트 옆에 그냥 털썩 주저 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구세주가 나타난 것은.

지금 부모들이야 나부터라도 아이들이 그리하도록 허락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옛날에 우리들은 중학생만 되면 무전여행이니 캠핑이니 하여 방학 때만 되면 산으로 바다로 다니고 으레 텐트니 버너니 하는 것들을 챙겨 배낭 속에 싸놓고 방학이 되기만을 기다리곤 했다. 부모님들도 어디를 간다 하면 그저 조심하라는 말씀과 돈을 넉넉하게 못주어 미안해 하셨을 뿐 한번도 못가게 한 적은 없었다.

a 세느강 유람선-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에펠탑

세느강 유람선-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에펠탑 ⓒ 유원진

그 시절에는 비단 나뿐이 아니라 친구들 모두 집에서 허락을 아니해서 어디를 못가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자이기 때문이었겠지만 옛날 부모들이 지금의 부모들보다 애들은 놓아 길러야(?)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하여튼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단짝인 친구들과 방학 때면 전국의 산과 강 바다들을 돌아다녀서 성인이 된후에는 오히려 안 가본 데가 별로 없어 심드렁했다.

그 당시에는 텐트라야 하늘만 가리는 삼각형 군용 텐트였고 버너는 석유를 넣고 펌프질을 손가락이 아프도록 한 후에도 알콜로 따로 가열해야 불이 붙는 속칭 탱크 버너였다. 그래도 그나마 장만하려고 거의 한 학기를 한푼도 안쓰고 용돈을 모아야만 했다. 십년 이상을 쓰고도 멀쩡했는데 어디서 잃어 버렸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래도 그걸 사고나서 여름방학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흐뭇해 하던 기억은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려웠던 시절이라 그랬는지 당시에는 캠핑이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필요한 장비들을 다 챙겨 오지 못하는 캠핑족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어디 자리를 잡으면 으레 이것저것 빌리러 다니는 사람들이 흔했고 남녀 학생들이 서로 무엇을 빌린다는 핑계로 다른 텐트를 기웃거리다가 사귀게 되는 경우도 흔했다. 요즘은 한국에서 캠핑을 해본 지가 오래 되어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정이 많은 민족이 어디 가겠는가. 지금도 여전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개인주의로 대표되는 서양문화에 대한 선입견은 처음 가보는 파리의 캠핑장에서 버너를 빌리려는 생각은커녕 혹시 쳐다보는 것도 신경 쓰여 할까 봐 옆 가까이에 있는 텐트에 눈길도 안주고 있었다. 그런데 옆 텐트에서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키 큰 남자가 “썸 프러블럼?”하며 다가온 것이다.

a 네덜란드 친구들과 함께-베르사유 궁전에서

네덜란드 친구들과 함께-베르사유 궁전에서 ⓒ 유원진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연료가 다르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주저없이 자기네 버너를 가져오더니 쓰라고 빌려 주었다. 그 순간 우리 가족의 표정은 보기에도 웃길 정도로 바뀌었고 어둑어둑할 무렵에는 하얀 쌀밥과 참치를 넣은 김치찌개를 포식할 수 있었다.

식사 후 매점에 가서 맥주를 몇 병 사서 그를 불러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했는데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그렇게 친근감을 표시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네덜란드인들이었고 더군다나 월드컵의 영웅 히딩크 마을인 파사펠트(이름도 그들이 가르쳐 줘서 알았다)에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월드컵이 끝난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월드컵의 열정을 가장 감동적으로 보여준 나라이고 더더군다나 네덜란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를 형제 대하듯이 하는 나라였던 것이다. 지금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 그들 둘은 친형제는 아니나 형제같은 사이로 유럽을 배낭여행 중이라고 했다. 대학생들이라 아직은 돈이 없어 유럽 이외의 나라들은 가본 적이 없지만 유럽 이외의 나라를 간다면 가장 먼저 한국에 가서 월드컵 때 붉은 악마들이 가득 메웠던 시청 광장을 꼭 가보고 싶다며 웃었다.

밤이 꽤 깊도록 우리들은 월드컵과 여행 이야기들을 했다. 둘 다 미남형이었는데 아시아인하고는 처음 대화해 보는 것이라며 재미있어 했다. 유럽에 온김에 히딩크의 고향 파사펠트가 멀지 않으니 한번 가보겠다고는 했는데 결국 방문하지는 못했다. 4일 있는 동안 그들이 먼저 떠난 하루를 빼고 3일 동안 낮에는 서로 다른 일정이었지만 밤에는 맥주 한 병씩을 들고 텐트 앞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지냈고 그들의 여행담은 내게도 유익한 부분이 있었다.

이틀째인가에는 베르사이유 방문 일정이 같아 내가 태워 준다고 하자 몹시 고마워했는데 정작 큰 도움을 받은 것은 오히려 나였다. 그들이 아니였다면 엉뚱한 도로를 타고 헤맬 뻔했던 것이다. 하여튼 파리에서 그들과 한솥밥은 아니지만 '한버너'를 같이 쓰며 친해져서 그들이 떠날 때는 몹시 허전하여 나도 파리를 떠나고 싶을 지경이었다.

유럽의 도시들을 다니다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캠핑장에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아직도 유럽캠핑여행이 보편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은 비단 한국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니고 일본인이나 중국인들도 없었다. 어느 캠핑장을 가도 아시아인들을 만나기는 어려운데 우리는 첫 캠핑장에서 한국인들을 만났고 게다가 우리의 골칫거리인 버너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운이 좋았다.

a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점심식사

에펠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점심식사 ⓒ 유원진

이틀째 저녁에 역시 옆 텐트에서 버너를 빌려 밥을 하는데 한눈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혹시 한국에서 오셨어요?”하며 웃는다. 그렇다고 하자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들과 유럽자동차여행 중으로 파리에서 4일째 머무르고 있는데 한국인은 처음이라며 반가워했다.

그러더니 내일 파리를 떠나 귀국하는데 마지막 밤이 아쉬워 술 한잔 하기로 했다며 오시겠냐고 초청하는 것이었다. 술 이야기가 나오자 반갑기는 했지만 초면이고 나이도 너무 차이가 나 대답만 "예" 해놓고 갈 생각은 하지 아니했다. 우리가 저녁을 먹고 네덜란드 친구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한 명이 직접 나를 데리러 왔다. 어찌할까 엉거주춤인데 파란 눈이 웃으며 가보라는 듯이 고개짓을 하였다. 같이 가자고 하니까 피곤해서 오늘은 일찍 쉬고 싶다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다.

a 볼로뉴 캠핑장에서 만난 한국친구들

볼로뉴 캠핑장에서 만난 한국친구들 ⓒ 유원진

전등 아래서 일기를 쓰는 아이들을 남겨 놓고 아내와 나는 그들의 텐트로 갔다. 고기를 구워 놓고 어디서 구했는지 상추까지 눈에 들어오는데 그중에 제일 반가운 것이 소주였다. 떠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역만리에서 한글도 선명한 소주를 보니 마시기도 전에 향수에 취하는 것 같이 마음이 푸근했다. 네 명 중에 세 명은 대학생들로 계속 서유럽으로 갈 예정이고 직장을 다니는 한 명만이 내일 비행기로 귀국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떠나는 한 명이 못내 서운해 하여 누가 조금만 부추길 양이면 직장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합류라도 할 태세였다.

나는 그네들의 젋음이 많이 부러웠고 그 팀에 섞이게 해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다가 버너 얘기가 나와 내가 분개하는데 떠나는 친구가 선뜻 자기 버너를 주며 가지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귀국한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다시 살려면 돈이고 또 유럽에서 쓰던 것이라 기념으로 보관하고 싶을 터인데 하며 속으로야 덥석이지만 체면상 사양을 하고 있으니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이 되면 오히려 보람이라며 극구 안겨주는 것이었다.

a 볼로뉴에서 얻은 유럽 펀칭식 버너

볼로뉴에서 얻은 유럽 펀칭식 버너 ⓒ 유원진

이런저런 얘기와 젊은 분위기에 휩싸여 그날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취했다. 자기네들은 술도 많이 못해서 가져온 술이 거의 남았다며 다 마시고 가시라는 데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 만나 한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파리의 캠핑장에서 늦도록 이야기와 술에 취하고 있었다. 파리가 서울보다 별이 많은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한 것이 그날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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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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