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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사리 농악의 대가 김종대옹의 북채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 ⓒ 서정일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농악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낙안면 평사리의 김종대(79)옹. 일곱살 나이에 무등을 타고 상고를 돌리며 마을아이들에게 꽹과리를 가르치기까지 했던 농악신동. 그러나 지금 그의 신들린 듯한 꽹과리 소리는 들을 길이 없다.
낙안에서 선암사로 가는 길목, 큰 길과 조금 떨어져 있는, 한 때 70여가구가 있었지만 30여호 밖에 남지 않은 겉보기엔 일반 농촌과 다름없는 한 마을이 있다.
그저 무심코 스쳐지날 수도 있는 이곳이 바로 대표적 농악마을 평사리다. 이곳 농악은 전시(戰時)에 고개를 넘어 낙안 읍성으로 진출해 군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해서 군악(軍樂)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마을 주민들은 지난 1980년 KBS방송국 주최 국악전 농악 부문에서 최우수상, 1980년 소년 체전 국악 농악 부문에서 최우수, 1981년 남도 문화제 농악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더구나 상쇠 김종대옹은 개인 최우수 연기상을 수차에 걸쳐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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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수상한 상장과 상패를 하나 하나 설명해 주는 김종대옹 ⓒ 서정일
지난 2일 평사리 205번지 김옹의 집을 찾는 발걸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고개 너머에 사시는데 지금은 연로해서…."
한 마을 주민이 얘기해 준 김옹에 대한 근황 때문이었다. 그 얘기는 정확했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백발인 김옹의 모습은 힘찬 농악을 소화해 내기엔 조금 벅차 보였다.
"김씨에게 가서 물어봐" 하면서 자세히 약도까지 그려준다. 전수를 해줘야겠다 싶어 틈틈히 가르쳐 준 낙안읍성앞에 사는 김홍철씨를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어깨에 신명을 달고 살아간다는 상쇠꾼에게선 좀처럼 듣기 힘든 거절이다. 신명까지 잃어버린 것일까? 매우 아쉬운 거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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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옹은 요즘 소에게 정성을 쏟고 있다. ⓒ 서정일
소에게 여물을 먹여야겠다고 일어서는 김옹.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기자의 귀엔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옛다, 잘먹고 쑥쑥 자라거라."
농악의 맛이 살아있는 내지름이었다. 짧지만 가락이 있는 소리에 취해 한참을 서 있었더니 이윽고 집 뒷쪽의 헛간같은 곳으로 안내한다.
이러저리 뒤지더니 결국 먼지가 쌓인 북 하나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북채가 있어야 소리를 내는 법인데 달랑 북 하나만을 내려놓고 앉는다. "둥두둥" 몇 번의 꺾임이 있는 소리를 손으로 들려준다. 그러더니 또 이내 멈추면서 탄식을 한다. 깊은 사연이 있음을 짐작케 하는 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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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옹은 마을회관으로 초연히 발걸음을 옮긴다. ⓒ 서정일
마을회관으로 가자며 앞장서는 김옹. 평사리 마을회관엔 주민 여럿이 모여있었다. 벽엔 농악하던 모습들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다. 농악마을이라는 자부심은 대단했지만 그건 옛말이라고 얘기한다. '배우는 이도 없지만 제대로 평가를 해 주지 않았다'는 얘기.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각종 악기들이 창고에 뒤엉켜서 나뒹굴고 있다.
누가 김옹의 북채를 사라지게 만들었을까? 누가 북을 앞에 두고도 그저 맨손으로 허공을 휘젓게 만들었을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옛 것을 지키고 가꾸지 않는 민족은 미래 또한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뿌리요 출발지인 마을입구 회관에 '평사리 농악전수회관'이라도 짓는 것이 꿈이라는 마을주민들의 의견을 순천시와 전라남도는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함께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다큐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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