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을 안고 있는 순백의 고원 속으로

솜이불 밟고 떠나는 겨울산행(3)

등록 2005.02.07 01:34수정 2005.02.08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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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제비 동산에서 이어지는 설국의 고원

사제비 동산에서 이어지는 설국의 고원 ⓒ 김강임

자연이 심술을 부리면 부릴수록 최고에 달하는 운치, 하느님이 마음대로 백설기를 뿌려 놓고 수묵화를 그려내는 요술, 눈 덮인 겨울산은 생각만 해도 환상이다.

입춘을 사흘 앞두고 제주의 섬을 꽁꽁 얼린 눈보라는 또 다시 산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눈만 내리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하며 어디든지 떠나야만 직성이 풀리니 참 환장할 노릇이다.

a 한라산 어리목광장

한라산 어리목광장 ⓒ 김강임

제주도에 가면 어느 곳에서나 볼 있는 곳이 한라산이다. 길속에 한라산이 있고 바다 속에 한라산이 있는, 그래서 한라산은 계절마다 그 이야기가 다르다. 봄을 알려주는 꽃 이야기에서부터 계곡의 물소리, 만산홍엽, 그리고 설국의 전설은 4계절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특히 눈 덮인 겨울의 한라산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1100도로(99번도로) 해발 500m. 이곳에서부터 한라산의 막이 열린다. 능선과 골짜기로 이어진 것이 산이라고 하지만, 겨울산은 능선도 골짜기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을 모두 순백으로 수놓고 마치 전설처럼 고요한 겨울 산. 요동을 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다.


자동차는 어리목 수원지에서부터 벌써 길이 막혀 있었다. 1100도로는 이른 아침부터 산 마니아들이 몰고 자동차로 장사진을 이뤘다.

"체인을 쳐도 올라갈 수 없습니다."

교통을 통제하는 아저씨들을 이렇게 미워해 본 적이 없다. 제주시 터미널에서부터 어리목 입구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는 벌써 만원이다. 행여, 셔틀버스가 그냥 지나갈까봐 발을 동동 굴리고 손을 흔들어댄다.

“ 스톱! 스톱!”

학창시절 버스 통학을 할 때의 일이 생각났다.

“까악-까악-”


어리목 광장에는 살이 통통하게 찐 까마귀 떼가 겨울나무 끝을 왕래하며 한라산의 아침을 깬다. 산등성이에는 구름을 뚫고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a 눈꽃이 피어있는 등산로

눈꽃이 피어있는 등산로 ⓒ 김강임

계단으로 이어진 한라산어리목코스 등산로는 겨우내 쌓인 눈으로 계단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비탈길이 가파르게 느껴져 숨이 헉헉거렸다.


어리목 광장에서 2,4 km까지는 가파른 산행이 계속됐다. 겨울나무 숲을 뚫고 이어지는 산행. 하느님은 겨울나무가 추울까봐 솜털 같은 밍크 오버를 입혔나 보다. 두툼하게 잉크 오버를 입은 겨울나무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탈길을 올라가노라면 험난한 인생길을 걷는 것처럼 고행이다. 헉헉대며 숨이 차오를 때면, 뒤를 돌아다보기도 하고, 그리고 표지판을 바라다보지만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비탈길은 답답함을 주기도 한다.

a 백록담을 안고 있는 순백의 고원속으로

백록담을 안고 있는 순백의 고원속으로 ⓒ 김강임

한라산의 눈꽃은 비록 향기는 없지만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그 향기 다르게 느껴진다.

“ 아! 신비, 장관, 누가 이 산을 신의 정원이라 했던가?”

a 눈앞에 펼쳐진 백록담은 신기루의 이야기

눈앞에 펼쳐진 백록담은 신기루의 이야기 ⓒ 김강임

2.4km의 겨울나무 숲을 뚫고 사제비 동산에 오르면 겨울나무는 온데 간 데 없고 능선과 능선으로 이어진 동산이 펼쳐진다. 마치 제비가 죽어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사제비 동산. 이 동산에 서면 에덴동산에 온 기분이다. 발자국을 옮기며 눈앞에 펼쳐진 비경에 감탄을 하는 순간 구름이 능선 자락을 휘감고 있다.

a 아! 신비와 장관

아! 신비와 장관 ⓒ 김강임

어떻게 이렇게 많은 눈이 내렸을까? 골짜기에도 능선에도, 그리고 오름에도. 새 하얗게 덮여 있는 백설의 장관은 말로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정상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줄을 잇는다. 능선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백록담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지만, 그 백록담은 신기루의 이야기처럼 잡히지 않는다. 능선을 돌고 돌아 아무리 걷고 걸어도 백록담은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 마치 신기루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a 설원 가득한 오름들

설원 가득한 오름들 ⓒ 김강임

완만한 고원으로 펼쳐진 사제비 동산에서 이어지는 만세동산은 진달래와 꽝꽝나무, 관목군락을 이루는 동산인데도 형체를 알 수가 없다.

만세동산은 만수동산이라고도 부르며, 동산의 표고는 1606m로 남서면에 바위들이 박혀있으나, 표지판만이 현시점을 알려 줄 뿐 고요속에 묻혀있다. 망체오름, 어슬렁오름, 삼형제오름들을 바라보는 여유와 스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여유를 같이 나눈다.

정상은 바로 저긴데 왜 그렇게 그 길로 통하는 길은 험난한지 모르겠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은 또 다른 사람들이 밟고 있을 뿐, 오름과 오름을 끼고 하늘과 맞닿은 운해가 또 하나의 장관을 이룬다.

a 마치 오백나한처럼

마치 오백나한처럼 ⓒ 김강임

겨울나무 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설경이 마치 오백나한 같다. 한라산의 오백장군의 전설처럼, 겨울 속에 묻어 있는 한라산의 전설.

a 약수대신 고드름으로...

약수대신 고드름으로... ⓒ 김강임

길쭉이 내리를 펴고 있는 고드름이 산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약수가 되어준다. 꽁꽁 얼어 버린 사라악에서 목을 축일 수 없으니, 고드름을 하나 따서 입이 물어보면 약수처럼 달콤하다.

사제비 동산에서 윗세오름까지는 2.3km. 완만하게 이어진 동산이지만 등산로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등산화에 돌을 묶어 놓은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백록담은 끝내 전설 속에 숨겨져 있었다. 어리목 광장에서 윗세오름까지는 정상을 갈 수 없음에도 정상을 꿈꾸는 미련함을 또 범하고 있었던 게다.

a 윗세오름 통제소

윗세오름 통제소 ⓒ 김강임

윗세오름 광장에서 보이는 세상은 하늘, 그리고 설국으로 이어진 고원뿐. 정상을 가슴에 안고도 정상의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없는 사제비 동산과 만세동산 그리고 능선으로 이어진 오름들.

어리목 광장에서 40분이면 갈 수 있는 백록담 정상은 등산코스가 개방되지 않아 갈 수가 없었다. 환경 보존이라는 이름이 주는 의미 앞에서 그저 바라만 보아도 가슴 벅찬 백록담의 모습! 그 모습은 천년을 가슴에 안고도 정상을 바라볼 수 없는 설국의 고원들처럼 늘 변함이 없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한라산 어리목 코스로 통하는 셔틀버스는 2월 20일까지 제주시 터미널에서 어리목 입구까지 30분마다 운행된다.

덧붙이는 글 한라산 어리목 코스로 통하는 셔틀버스는 2월 20일까지 제주시 터미널에서 어리목 입구까지 30분마다 운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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