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비밀번호는 일기장의 잠금열쇠?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47)

등록 2005.02.12 17:27수정 2005.02.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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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동료와 식사 중에 있었던 일이다.


문자메시지 보내다가 잠들 정도로 휴대폰이라고 하면 죽고 못 사는 딸아이 때문에 걱정이라는 선배가 도대체 뭔 문자메시지를 그렇게 보내는지 궁금하다기에 별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

"좀 치사하긴 하지만 그렇게 궁금하면 딸 몰래 살짝 휴대폰 메시지 확인 좀 해보지 그래요."

그러자 이 선배, 어림없다는 듯.

"문자메시지 확인? 비밀번호로 꽁꽁 잠가 놓았는데 어떻게 확인해보나?"

비밀번호라? 그러고 보니 내 휴대폰에도 잠금 기능이라고, 휴대폰 전체를 잠그지 않더라도 문자메시지나 스케줄, 이메일 등등을 볼 때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고는 볼 수 없게끔 만드는 기능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귀찮기만 해서 그냥 지나쳐버렸던 기억이 얼핏 났다.


꼭꼭 잠겨진 자녀의 휴대폰 문자메시지

그다지 비밀스러운 메시지 자체가 없다보니 나 스스로 별 필요없는 기능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요즘 신세대들은 유용하게 쓰고 있으니 정말 세대차이가 나긴 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딸과의 세대 차이를 느끼는 선배를 위로하기 위한 립 서비스를 해야 했다.


"하긴 그 나이 때 여학생들은 말똥 굴러다니는 것도 친구들끼리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내 일기장 누가 볼까봐 꼭꼭 숨겨놓고, 심지어는 열쇠로 잠가놓기도 했잖아요? 아마도 요즘 청소년들에겐 아마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이메일과 같은 게 예전의 우리네 일기와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기 때문에 누가 보는 것을 싫어하는 거 아닐까요?"

식사가 끝나고 휴대폰 잠금 기능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났다.

그런데 이번 설, 휴대폰을 새로 바꾼 지 얼마 안 된 조카애가 집에 와있던 중 수시로 휴대폰을 바라보며 폰카메라로 자기 얼굴을 찍길래 갑자기 참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휴대폰 새로 바꿨나보구나. 어디 구경 좀 해보자 카메라가 몇 화소냐" 하며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받아들고 카메라 기능을 시험해보려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비밀번호 모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요즘 신세대들은 휴대폰에 잠금 기능을 사용한다더니 조카 또한 요즘 신세대인지라 어김없이 잠금 기능을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잠금 기능을 사용하면 자신 몰래 타인이 사용하기 쉬운 많은 기능들, 예를 들면 자신도 모르게 이체되기 쉬운 폰뱅킹이나, 문자메시지 전송, 인터넷 접속을 통한 데이터 전송 등의 기능을 할 수 없도록 예방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신세대들의 휴대폰 잠금 기능의 경우 꼭 이런 경제적인 면보다는 사생활 보호 측면이 더 강한 편이다.

한마디로 조카 휴대폰의 잠금 기능과 지난번 흘려들었던 동료 딸 휴대폰의 메시지 잠금 기능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휴대폰 잠금 기능을 사용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또다른 세대차가 나뉘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문자메시지와 일기장

휴대폰 이야기는 이쯤해서 끝나지만 휴대폰 잠금 기능이라고 하는 아주 사소한 기능 하나를 유용하게 사용할 줄 아는 신세대의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신세대들은 일부러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디지털 세상에 무서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휴대폰 잠금 기능을 설정하는 행동의 이면에는 예전 일기장 속에 자신만의 비밀스런 사연을 기록하며 비밀들을 고이고이 간직하던 성장기 청소년들의 자연스러운 심리 발달 상태와 비슷한 면이 있긴 하지만, 예전의 일기장 세대와는 분명 다른 면이 있다.

일기장 세대의 경우 개인의 생각과 느낌만을 보호받기 위해 몰래 숨겨놓았다고 본다면 신세대의 문자메시지나 이메일의 잠금 기능은 사소한 수다에 이르기 까지 개인과 관련된 일체의 모든 것을 아예 들여다보지 말라는 식의 당돌한 선전포고 같은 느낌이 든다. 자신의 사생활 보호의 범위와 보호 의지가 보다 넓고 적극적이다. 그만큼 청소년의 의식 자체가 가족이나 공동체보다는 사생활을 중시 여기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더 강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향은 비단 신세대의 전형적인 특성이라기보다는 디지털 사회의 특성이라는 편이 더 맞을지 모른다. 디지털을 구성하는 요소인 비트에서 0과 1이란 존재가 숫자 자체의 의미 외에 참이거나 거짓, 위 아니면 아래, 안 아니면 바깥, 흑 아니면 백 등을 의미한다면 비트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모든 사물은 0과 1만의 비트로 잘게 단순화 되어 재구성된다는 뜻일 게다.

결국 디지털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에서 공유해야 할 대상과 가치라는 커다란 덩어리가 점점 급속히 파편화되어가고 개인화되어 간다는 의미가 아닐까?

디지털에 가장 빨리 적응해가는 신세대의 성향상 이런 개인주의적 태도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철저한 비밀보호성향은 내 개인정보가 수시로 유출되어 악용될지 모르는 디지털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모가 안 보이는 곳에 몰래 숨기려 하던 일기장 세대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암호를 걸고 보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듯한 신세대의 이런 성향이 별 이유 없이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나 스스로 머리 속으로는 디지털을 이해하려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휴대폰 잠금 기능보다 더한 것은 세대간 단절의 벽

문득 자녀 몰래 일기장을 훔쳐보면서 당시 자녀들의 고민이나 생각을 파악하려 했던 부모님세대가 생각난다. 당시만 해도 일기장 훔쳐보는 행위가 무척 싫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어떨 때는 부모님에게 직접 말하기 어려운 고민을 표시하기 위해 일부로 눈에 잘 띄는 곳에 일기장을 놓기도 했던 시절들….

그러나 지금 신세대의 휴대폰 문자메시지에는 어느 누구의 접근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한마디로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높다란 벽이 쳐져 있다.

물론 누구라도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하지만 정말 부모나 가족들이 보면 큰일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비밀번호로 꼭꼭 잠가놓은 휴대폰을 보면 이상하게도 신세대와 부모세대의 대화 단절을 목격하는 것 같아 마음이 갑갑하다. 아마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나 스스로가 아직 디지털 사회를 머리로만 이해할 뿐 선뜻 익숙해지지 못한 아날로그 세대이기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디지털 세상에도 지속되어야 할 가족간의 대화를 위해

그러나 내 갑갑한 마음과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사회의 개인화 성향은 점점 심해질 것이다. 더욱 더 세월이 흐르면 몸은 한 집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이지만 가족 구성원 개개인은 모두 자신만의 비밀번호가 설정된 휴대폰과 PC, PDA 등을 가지고 다니며 자신만의 세계에 열중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가족 구성원들의 사생활 영역이 점점 커질수록 가족이 공유하는 부분이 점차 줄어드는 가족의 현실, 현실대로라면 아마 지금같이 가족들이 함께 모여 오랜만에 대화를 나누는 설날 같은 명절 또한 점점 사라져 버리거나 이름 뿐의 행사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점점 파편화되는 사회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가족 고유의 가치와 유대감을 과연 지켜나갈 수 있을까?

휴대폰 비밀번호로 인해 생각해본 디지털 세상의 세대간 단절,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가족간의 대화는 늘 살아있어야 한다는 바람, 바로 2005년 설날연휴를 보내면서 가진 자그만 소망 중의 하나이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 47번째 이야기입니다.

덧붙이는 글 아날로그형 인간의 디지털분투기 47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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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을 그만두고 10년간 운영하던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파주에서 어르신을 위한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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