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의 아들에게 과거사를 가르치다

저 평화로운 고니 가족에게 누가 총을 쏠 수 있을까?

등록 2005.02.14 08:48수정 2005.02.15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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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빠 없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 연민


최근 급성 맹장염으로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은 아들녀석 곁에서 사흘 밤을 함께 자며 간병을 한 것은 내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우리 주변의 흔한 일들 중의 하나인 그것에 대해 굳이 '색다른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여러 가지 특별한 느낌들을 가질 수 있었고 또 재미있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흘 동안 아들녀석의 병상 곁에서 정말 여러 가지 특별한 느낌들을 얻었다. 응급실 손주의 병상 앞에서 안절부절못하시며 눈물을 지으시던 어머니의 모습, 수술실 문 앞에서 말없이 묵주를 손에 쥐고 기도하던 아내의 모습, 수술 받은 동생에게 만화책을 챙겨 가져다주던 딸아이의 모습도 내 뇌리에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수술 받은 날 밤, 소변을 보기 위해 잠든 아빠를 깨우던 아들녀석의 목소리도 감미로운 기억으로 남았다. "아빠"하고 부르는 그 한마디에 나는 퍼뜩 잠이 깨었다.

"응. 왜?"
"오줌 마려워요."
"오, 그래"

이 짧은 몇 마디 대화가, 아들녀석의 그 목소리가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고, 내 가슴에 묘한 감미로움을 안겨준다. 아빠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고, 아빠에게 링거 주머니들이 매달린 이동 기구를 맡기고 가만가만 화장실로 가고 오던 아들녀석의 모습도 왠지 그리워지는 영상이다.


녀석은 그처럼 아무 문제없이 간단히 아빠를 깨우고 아빠의 부축을 받았다. 그것은 아들녀석의 특권이었다. 나는 아들녀석의 그런 특권에 적절히 부합하면서, 또 아들녀석의 병상에 달린 낮고 좁은 침상에 구부리고 누워 불편한 잠을 자면서 흐뭇하기조차 한 아비로서의 묘한 '정'을 가슴 가득 느낄 수 있었다.

지난번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이틀째 밤에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된 아들녀석이 아빠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혼자 살그머니 몸을 일으키고 또 홀로 조심조심 화장실을 다녀오는 모습을 느끼면서 또 다른 흐뭇한 마음을 가슴 가득 안을 수 있었다.


첫날 밤 한 번은 아들녀석의 누운 몸의 자세를 바꾸어 주면서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한결아, 이럴 때 아빠 없는 아이들은 어떡헌다니?"
"왜요? 아빠 없는 아이들을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래. 아빠는 지금 자꾸만 아빠 없는 아이들 생각이 난단다."
"왜요?"
"아빠 없는 아이들은 이럴 때 얼마나 아빠 생각이 날까 싶고…. 아빠가 없는 아이들에게 괜히 미안해지는 마음이고…. 너, 연민이라는 단어 알지?"
"예, 알아요."
"지금도 아빠에게는 연민이라는 게 있어. 아빠 없는 아이들에 대한…."
"………!"
"세상의 모든 아빠들은 자기 아이들을 아빠 없는 아이들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또 매사에 조심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럼 아빠는 지금 정흠이 생각도 하시겠네요?"

정흠이는 재작년에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내 당질의 맏이아들이었다.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그 아이는 아빠 사후에 엄마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되어 미사 복사도 하며 씩씩하게 자라고 있지만, 때로는 시무룩한 채로 깊은 상념에 젖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종종 성당에서 그 아이의 시무룩한 모습을 보면 '저 애가 지금 혹 아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괜히 가슴을 만지고 한숨을 쉬고 했다.

"그럼, 너도 지금 정흠이 생각을 한 거냐?"
"네. 아빠 때문에…."
"아빠 얘기 때문에 정흠이 생각까지 다하고, 우리 아들 정말 착하고 기특하네."

그러며 나는 다시 한번 다 큰 중학생 아들녀석의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고 나니 또 한 순간 아빠 없는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가슴아픈 연민이 좀더 커져 오르는 것 같았다.


2. 사흘 밤을 병상의 아들과 함께 한 이유들

사흘째 날 아침에 아들녀석은 죽을 먹었다. 내리 이틀을 굶고 사흘째 날 아침에 비로소 음식을 먹는 아들녀석의 모습을 보는 것도 정말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내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사흘째부터는 녀석이 스스로 좀더 자유로이 움직일 수가 있게 되어서, 나는 사흘째 밤에는 집에서 잘까 생각했다. 녀석에게 저녁을 먹인 다음에는 태안으로 달려와서 상조회(喪助會) 모임에 참석하고 저녁을 먹으니 몹시 노곤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다시 서산의료원으로 갔다. 입원 기간이 길지도 않고 또 나흘째 날에는 퇴원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사흘 밤을 끝까지 아들녀석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첫째 날 밤에 기존의 남자어른 입원환자들에게서 맛좋은 닭고기도 얻어먹었는데, 그 빚도 갚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지금까지 먹어본 닭고기 중에서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치킨을 먹으면서 아들녀석에게 어찌나 미안했던지…. 사흘째 점심부터는 밥을 먹기 시작한 아들녀석에게 그 맛좋은 닭고기도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밤 9시경 치킨 집에 전화로 1마리와 반 마리를 주문하고 배달 받아 입원실 환자들과 나누어먹었는데, 유난히 맛있게 먹는 아들녀석의 모습을 나는 흐뭇한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목에서 내 행동을 비난하거나 염려하는 독자들도 있을 듯….)

그러나 내가 사흘 밤을 입원실에서 함께 자며 아들녀석의 병상을 지켜준 것에는 다른 특별한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올해 중3이 되는, 어느 정도 철이 들어가는 아들녀석과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 특별한 기회를 잘 활용하려는 까닭이었다.

나는 아들녀석이 수술을 받은 날 저녁 잠시 집에 와서 이불 등 몇 가지 물품들을 챙겨갈 때 <한겨레 21>과 <말>지를 가져갔다. 그 주간지와 월간잡지를 꼭 읽을 생각이었고 틈틈이 읽게 될 줄로 알았다. 하지만 입원실 사정은 독서를 허락하지 않았다.

입원실에서는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거의 쉬지 않고 텔레비전이 판을 쳤다. 그리고 텔레비전의 리모콘은 선참 입원환자가 거의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내 아들녀석에게는 매우 특별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 텔레비전은 아들녀석의 병상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아들녀석은 도리 없이 거의 계속적으로 뉴스 프로를 보아야했다. 아들녀석은 집에서는 뉴스를 별로 보지 않았다. 수십 개 채널들의 프로를 잘도 기억해서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미국 프로 농구와 레슬링, 코미디 프로 따위를 찾아서 즐겨보던 녀석이었다.

그러던 녀석이 입원실 병상에서는 도리 없이 뉴스 프로를 많이 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뉴스로 소개되는 국가적 사회적 사안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때는 뉴스마다 '과거사 진상 규명' 관련 사항들이 소개되곤 했다. 중학생 아들녀석으로서는 처음 접하는 사안이고 이야기들이었다. 녀석은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나는 뜻밖의 매우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기회를 잘 활용하고 싶었다. 과거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내게 질문을 하는 어린 아들녀석이 대견하고 기특하고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바야흐로 매우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병상의 중학생 아들녀석에게 과거사를 가르치는 소중한 시간을 얻게 된 것이었다.

나는 유신 시절의 '동백림간첩단 사건'과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 그리고 1987년의 '칼기 폭파사건'에 대해서도 내가 기억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아들녀석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특히 '칼기 폭파사건'에 대해서는 그 해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 내게 있었던 특별한 경험 한가지도 아들녀석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의 구체적인 얘기를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차후 독자 여러분께 자세히 들려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초 중학생 시절부터 내 나름의 확실한 주관으로 박정희를 혐오하기 시작했던 나를 오늘의 중학생 아들녀석은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눈빛이었다. 아빠의 말을 열중해서 들으며 어떤 충격 속에서 모종의 공포심을 갖기도 하고, 뭔가 상심에 젖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얘기를 더 많이 듣고자 했다. 그리하여 과거사에 대한 우리 부자의 대화는 입원실에서 간헐적으로 여러 번 이어졌다. 어쩌면 괴이하고 가슴아픈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그 음울한 이야기를 순박한 어린 아들에게 들려주면서도 나는 아비로서의 바른 몫을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3. 고니 가족을 보며 나눈 대화들

과거사 진상조사에 관한 이야기는 4일 퇴원 길에서도 이어졌다. 태안읍 도내리의 가로림만 끄트머리 한 자락의 바닷물에 떠 있는 고니 가족을 보면서도….

바닷물 위의 고니 가족을 보며 또 한차례 과거사 진상 규명에 관한 대화를 나눈 끝에 나는 아들녀석에게 물었다. 그리고 이어진 우리 부자의 대화를 정리하여 소개하자면 이렇다.

"한결아, 저 고니들을 보면서 우선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뭐라고 생각하니?"
"글쎄요…. 가족, 평화…그런 것일 것 같은데요?"
"그래. 아빠는 저 고니 가족의 모습은 평화 자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빠는 저 고니 가족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한단다."
"………?"

"만약 어떤 밀렵꾼이 나타나서 저 고니 가족에게 총질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유, 왜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세요? 그리고 아무리 밀렵꾼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밀렵꾼의 총질이라든가 독극물 행위는 절대로 가상만은 아니야. 얼마든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일이야."
"그래도…."
"그리고 그 밀렵꾼은 동물들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밀렵꾼도 존재할 수 있는 법이거든."
"………?"

"아빠가 얘기한 대로, 과거사라는 그 음울한 의혹 사건들이 정부나 수사당국에서 발표한 것과는 달리 진실은 가려져 있는, 다시 말해 어떤 거대한 음모나 조작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을 행위한 사람들은 일종의 밀렵꾼이 아니겠니?"
"………!"

"밀렵꾼이란 인정도 눈물도 없는 족속이란다. 오로지 자신의 현실 이익과 영달만이 최고의 가치이고 목표이지. 그리고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밀렵꾼들은 자신의 모습을 버젓이 드러내고 행세를 하면서도 그 밀렵 행위들을 철저히 감추는 기술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 더러운 기술과 능력은 절대로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렇겠지요. 또 그래야 하구요."
"그래! 바로 그것을 위해서도 과거사 진상 규명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철저해야 하는 거야!"

아들녀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대화를 좀더 계속했다.

"저 평화로운 고니 가족에게 밀렵꾼이 나타나 총질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니?"
"왜 또 그런 끔찍한 얘기를…."
"비극은 한바탕으로 끝나지 않아. 살아남은 고니 가족에게도 후유증은 참혹하게 계속되거든. 우리의 음울한 과거사 속에는 한 맺힌 가정들이 존재한단다. 수많은 가정들이 그만 불시에 뜻하지 않은 결손 가정이 되어서 긴 세월을 참담한 슬픔 속에서 살아야 했지. 물론 그 슬픔과 아픔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고…."
"그런데 아빠. 저 평화로운 고니 가족에게 몰래 총질을 하는 밀렵꾼과 같은, 아빠가 말한 그 '인간 백정'들이 지금도 존재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인간 백정이 오늘날에도 존재할 수 있느냐 없느냐 보다도, 다시는 그들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또 갖가지 방지 여건과 장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니? 그리고 진실과 정의는 결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고, 진실과 정의의 가치를 스스로 세워 나가려는 노력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니?"
"그것을 위해서도 과거사 진상조사가 꼭 필요하다는 말을 하시려는 거죠?"
"그래. 우리 아들 참 똑똑하네. 정말 아빠의 아들답네."

나는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아들녀석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내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글쟁이일망정 하나 있는 아들을 잘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냉큼 들어서 절로 흥이 났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했다.

"아빠는 네 덕분에 오늘 특별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소설 소재를 하나 얻은 것 같다. 저 평화로운 고니 가족에게 몰래 총질을 하거나 독극물 행위를 하는 밀렵꾼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의 음울한 과거사 문제들을 빗대어 정교하게 다루는 소설을 하나 쓰고 싶거든. 괜찮은 소설을 하나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들녀석이 자못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또 한번 아들녀석의 등을 두드려주었다(아들녀석은 키가 180cm이니 내가 등을 두드려줄 수밖에…).

특별한 대화를 마치고 차가 있는 곳으로 걷는 우리 부자의 머리 위로 한낮 맑은 입춘 하늘의 햇살이 더욱 포근하고 따스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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