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9회

등록 2005.02.15 08:53수정 2005.02.1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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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의인의 말은 정중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는 분노와 실망, 그리고 안타까움이 배어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기묘한 느낌을 들게 했다. 그러자 마부석 뒤에 있는 조그만 마차 문이 열렸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탄식소리가 흘러 나왔다.

“휴--우---! 자네는 형율당(刑律堂)에 몸담고 있는 섬도(閃刀) 심홍엽(沈紅葉)이로군. 몸이 불편하여 이 마차를 나서지 못함을 이해하게.”


분명 기운 없기는 했지만 금적수사 지광계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섬도 심홍엽이라 불린 흑의인의 눈에서 마치 조금 전의 도광과도 같은 불꽃이 쏘아 나왔다.

“수하된 도리로 수사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해도 어찌 탓을 하겠소? 하지만 한가지만 여쭈어 보겠소.”
“무엇을 말인가?”
“수사께서는 정녕 철혈보의 형제를 배반한 것이오?”

아직까지도 그러한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말투였다.

“으--음..”

마차 안에서 지광계의 신음과도 같은 탄식이 이어졌다. 철혈보는 믿음과 신뢰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그들에게 있어 상하관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이오, 흠모였다.


“이제 와서 내가 자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자네들을 위하여 한마디만 하겠네. 자네들은 조용하게 이 자리를 떠나 주게. 자칫 자네들이 이곳에서 다칠까 걱정이네.”

이미 대답은 명확했다. 지광계는 철혈보를 떠난 것이다. 이제는 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심홍엽은 나직하게 말을 밷았다.


“배신자...!”

그 말과 함께 섬도 심홍엽의 전신에서뿐만 아니라 나머지 인물들에게서도 섬칫할 정도의 살기가 물씬 배어 나왔다. 그 뿐이랴! 갑작스럽게 한 인물의 손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치솟는 화탄과 함께 두 마리의 새가 날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드득----!

날아오른 새는 날카로운 발톱과 부리를 가졌으며 깃은 청색의 윤기가 흐르는 매였다. 해동청(海東靑) 또는 보라응(甫羅鷹)이라 불리는 이것은 조선이나 요동지방에 서식하는 사냥용 매다. 크기는 보통의 매보다 작고 흰 것은 송골(松), 청색인 것을 해동청이라 하는데, 길들이기 쉽고 영리했다. 이미 원군(元軍)이 이를 길들여 연락하는데 사용하기도 했던 바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빛살 같은 속도로 비표(飛鏢) 같기도 하고 수리검 같기도 한 물체가 날아 오른 해동청을 향해 폭사되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 어느새 해동청의 날갯죽지를 파고 들었다.

푸드드득---!

두마리 중 한마리가 땅으로 곤두박질쳤지만 나머지 한마리는 훈련이 많이 되었는지 곧장 위로 솟구친 덕택에 이미 까만 점으로 화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섬도가 정작 놀랐던 것은 어느새 그들 주위로 나타나 있는 다섯 인물의 기도였다. 겨우 다섯명 정도였지만 섬도는 막연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이런 일은 사실 섬도에게 있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시진 정도인가?”

나타난 인물 중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한쪽 눈을 가리고 있는 도복(道服) 차림의 인물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화탄이 쏘아지고 해동청이 날아갔으니 가장 가까이 있는 철혈보의 인물들이 도착할 시각이 반시진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섬도는 또 다시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상대는 철혈보의 형제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이 길을 택해 온 것은 아마 장안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철혈보의 세력 중 자신들의 전력이 가장 약한 쪽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시진 정도면 충분하지.”

도복 차림의 사내 말을 그 옆에 있던 승복을 입은 사내가 말을 받았다. 그의 행색은 괴이했다. 헐렁한 가사(袈裟)를 걸치고 있으나 머리는 어깨를 덮을 정도로 길었다. 더구나 승이라면 언제나 손에 쥐여져 있어야 할 염주라던가 목탁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한바탕 하려면 이것부터 치워야겠군.”

말하는 투도 전혀 승려가 아니었다. 그는 앞에 있는 섬도가 보이지 않는 듯 앞으로 나서더니 쓰러져 길을 막고 있던 나무둥치를 향해 권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퍽-- 퍼--- 퍽---!

기이한 일이었다. 권을 쓰는 그의 전신에서는 안개가 감싸듯 서기(瑞氣)가 어리고 그의 주먹은 느린 듯 보였지만 정확한 타격음을 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의 권이 타격을 하고 그 옆으로 나아갈 때 먼저 맞았던 나무 등걸이 콩알만한 조각으로 부서져 내린다는 점이었다.

“으음..... 반야신공에 탄자권이군. 그대는 소림의 제자인가?”

순식간에 주먹질 몇 번으로 아름들이 거목을 산산히 부셔 놓고 손을 터는 인물을 향해 신음처럼 말을 흘린 인물은 철혈보의 십여명 인물 중 가운데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자색 장포를 입었는데 목이 짧고 사각턱으로 인해 일견하기에도 단단하게 보였다. 더구나 그는 굵고 짧은 손가락과 굵은 힘줄이 눈에 뛸 정도로 불룩 솟아 있는 손을 가지고 있었다. 외가장력(外家掌力)을 연마한 사람들만이 그와 같은 손을 가질수 있었다. 다른 일을 하는 데는 적절하지 못한 손이지만 사람을 살상하기에는 적합한 손이었다.

“그러는 귀하는 철혈보의 서열 십삼위, 철개장(鐵鎧掌) 곡첩(曲捷)이시겠구려.”

철개장 곡첩은 여기에 있는 일행을 이끄는 수뇌였다. 하지만 그는 섬도 심홍엽과 마찬가지로 점차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 누가 있는지 몰라도 우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타난 자들 역시 하나 같이 무시할 자들이 아니다. 그는 우선 차분하게 나타난 다섯명의 인물들을 살펴 보았다. 행색은 승도속의 잡다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승려라 할 수도 도사라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런 자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정말 구파일방이 비밀리에 키운 인물들이 아닐까? 아니면 속가제자들인가?)

곡첩은 외모와는 달리 두뇌 회전이 빠른 인물이었다. 철혈보에서 서열이 매겨질 정도라면 무공만 뛰어나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판단력과 통솔력이 없다면 어느 조직에서든지 수뇌가 될 수 없다.

“노부는 자네가 소림의 제자인가를 물었네.”

“그렇다면 어쩔 것이고, 아니라면 또 어떠하오? 어차피 당신들은 죽소. 또한 반드시 반시진 내에 죽을 것이고, 달려 온 당신들의 동료들은 당신들의 시체만 보게 될 것이오.”

철개장 곡첩은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 이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면 그는 벌써 손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내심 참고 있었다. 아니 참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말을 받아 주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철혈보의 형제들을 기다려야 했다. 짧은 순간이나마 그는 그것이 그가 할 최선의 방책임을 깨달았다.

“죽는다는 것.... 그리 두렵지 않네. 형제들을 배신한다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지. 또한 죽더라도 상대가 누군지는 알아야 덜 원통할 게 아닌가?”

그의 뒤에 서 있는 철혈보의 인물들은 불만에 찬 표정을 떠올렸고, 철개장 곡첩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했지만 그들은 입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곡첩이 할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드시 이유는 있을 것이었다.

“역시 경험이란 무시할 것이 아니군. 하루 밤사이 열일곱명의 머리통을 짓뭉개 놓았다는 철개장 곡첩 같은 분이 이렇게 참는 것을 보니 감탄했소. 조금만 더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귀하의 의도대로 될 것 같구려.”

앞으로 나선 인물은 도복 차림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가 차림도 아닌 장포를 걸친 사십대 전후의 인물이었다. 아랫도리에는 붉은 꽃을 수놓은 검은 비단 바지를 걸치고 있었고 발에는 새로 만든 하얀 바닥의 관화(官靴)를 신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의 등뒤로 보이는 검자루였다. 그곳에는 검술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은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분명 매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화산파의 인물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화산의 제자인가?”

정말 곡첩의 참을성은 놀라웠다. 하지만 그 참을성은 상대가 기다려줄 때 효과가 있는 법이다.

“그것은 저승 간 후에 물어 보도록 하시오.”

말과 함께 그는 검을 뽑는가 싶더니 처음 모습을 보였던 섬도 심홍엽을 향해 쏘아갔다. 십여송이의 검화(劍花)가 피어 오르고, 놀라운 변화를 보이며 심홍엽의 미간을 향해 파고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화산파의 진산비기인 매화검법(梅花劍法)이 분명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가사를 입은 자가 천천히 철개장 곡첩을 향해 느릿하게 다가들고, 도복 차림의 인물이 철혈보의 인물들을 휩쓸어 갔다. 곡첩은 경악하고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이들은 분명 구파일방의 무학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동안 오룡번에 무심한 듯 보였던 구파일방이 나선 것인가? 이들은 구파일방이 비밀리에 키운 인물들이 아닐까? 겉으로 보기엔 분명 구파일방의 제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비밀리에 키운 속가제자라면 가능하다.

곡첩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는 무서운 충격으로 다가드는 상대의 권을 막아야 했다.

(3권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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