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에 맞는 자연 밥상 반찬이 들녘 곳곳에 넘쳐 있으니

장영란의 '자연달력 제철밥상'(들녘.2004)를 읽고서

등록 2005.02.17 00:00수정 2005.02.1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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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 벽에 농협 달력이 걸려 있었다. 커다란 종이에 날짜가 크게 써진 그 달력에 그 날 한 일, 본 것, 들은 것을 적었다. 해가 바뀌어 새 달이 돌아오면, 묵은 달력을 꺼내놓고 지난 해 이맘 때 무슨 일을 했는지 복습을 했다. 몇 년 달력을 한자리에 펼쳐 보면 해마다 보이는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남에게서 답을 구하다 어느새 스스로 찾아가고 있다."

이는 장영란의 ‘자연달력 제철밥상’(들녘.2004)에 나오는 머리글 한 토막이다. 농협 달력이야 농사를 짓는 집이라면 모든 시골 방구석에도 붙어 있건만, 장영란이 걸어 놓은 농협 달력은 달랐다. 여느 시골 집 농협 달력처럼 그녀는 그것을 걸어 놓고 한 장 한 장 떼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듣고 본 것들을 거기에다 꼼꼼히 쓰고 고쳐서 이듬해까지도 배우고 익혔던 그야말로 농사 달력이었던 것이다.


책의 겉그림입니다.
책의 겉그림입니다.리브로
1996년,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도시를 떠나 무주 산골에 터를 잡고 농사를 배웠다. 허나 뭐든지 첫 발걸음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법, 농사를 짓기로 마음먹은 장영란도 그때부터 몇 년간은 꼭 죽을 맛이었다. 도무지 볍씨는 어떻게 해야 하며, 꼬치 모종은 또 어떻게 해야 하고, 장이라든지 고추장 담그는 법도 손에 익은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이 논 저 논 기웃거리기도 많이 했고, 이 집 저 집 밭뙈기에도 수 없이 둘러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기를 한 두 해 하면서 서서히 농사짓는 게 어떤 것인지, 자연 속에서 먹을거리들을 어떻게 얻는 것인지 알게 됐고, 나중에는 논 네 다랑이 오백 평에, 집 뒤 산밭들을 얻어서 손수 농사를 짓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농사를 골고루 하되, 어느 하나를 많이 하지는 않는다. 봄에 씨 뿌릴 때야 다 거두고 싶지만, 중간에 제대로 안 되면 자연에 못할 짓을 하는 거니까. 그래서 여름 장마를 거쳐 가을걷이까지 책임지고 할 수 있는 만큼, 그만큼 씨를 뿌리려 한다."(18쪽)

그녀는 보통 농사꾼들처럼 욕심을 품고 살지는 않는다. 농사를 지어 돈방석에 앉고 싶은 욕심이 없다. 더욱이 깊은 산골이요, 5월 초까지도 서릿발이 내리는 해발 4백 미터가 넘는 고랭지에서 무슨 돈벼락 농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품은 바람은 다만 그것이다. 자연 속에서 얻는 것들로 제 식구들 밥상 하나 족하게 차려 먹는 것뿐이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는 그런 밥상….


그래서 그녀는 이 책에서 농사짓는 법을 하나에서 열까지 알려주기보다는 그저 자연이 이끌고 가르쳐 주는 대로 농사짓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사계절 자연 들녘 속에서 얻는 자연 제철 밥상과 그 반찬들을 알려주고 있다.

"농사일이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논밭은 비어 있다. 논과 밭을 둘러보며 밭 정리하고 나물 캐다 보면, 올해 여기다 무얼 심을까 계획이 떠오른다. 저녁밥 먹으며 식구마다 자기 농사계획을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무슨 곡식이 알맞고, 산 뙈기밭에 합다랑이를 할까, 말까? 콩밭은 배수로를 다시 파야겠지…."(41쪽)

"봄에 많이 하는 나물은 쑥이다. 논일 밭일하다 냉이, 달래를 캐고, 머위를 꺾는다. 작대기 하나 들고 산을 돌아다니며 다래순 훑고, 취, 고사리를 꺾다가 두릅 밭을 발견하면 나만 아는 듯 은밀하다. … 봄에는 나무 어린순과 잎도 맛난다. 홑잎, 두릅, 가죽나무순, 뽕나무순, 다래순. 그러다가 초여름이 되면 뽕잎, 산을 다니다 송순을 만나니, 다음엔 어떤 잎을 만날까 고라니처럼 염소처럼 기다린다."(64쪽)


장영란 씨는 톱니바퀴 기계처럼 쫙쫙 짜 맞춰진 농사일을 하는 게 아니다. 자연이 알려주고 이끄는 그 흐름을 따라 손이 가고 발이 가는, 그저 순리에 따라 농사를 지을 뿐이다. 더 많이 거두어보고자 논밭에 화학비료를 뿌리거나 농약을 치는, 억지도 부리지 않는다. 기계에 힘을 빌려 손쉽게 일을 끝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콤바인을 대 벼 탈곡을 하는 게 아니라, 힘들더라도 홀태에 온 식구들이 달라붙어 한 몸이 돼 일을 한다.

그렇듯 욕심 부리지 않고 자연이 이끄는 대로 봄부터 겨울까지, 일년 열 두 달을 허허롭게 살아가니 그 자연스런 멋을 어디에 빗댈 수 있겠는가. 더욱이 입춘부터 대한까지, 제철에 맞는 자연 밥상 반찬이 집 둘레 들녘 곳곳에 넘쳐 있으니 그 자연스런 맛을 무엇에 빗댈 수 있겠는가.

"집 안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면 농사지어 넣어 둔 것을 하나하나 꺼내 맛난 걸 만들어 먹는다. 때로는 손 많이 가는 음식도 해 먹는다. 팥 삶아 걸러 앙금 내고 그걸 졸여 소를 만들고, 찹쌀을 불려 고두밥을 해 떡메로 쳐서 하나하나 빚어 먹고. 만두, 인절미, 묵, 깨강정……. 한겨울 든든히 먹고 힘내자고, 이렇게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몸 움직이고, 식구들 즐겁고."(236쪽)

농사꾼 장영란의 자연달력 제철밥상

장영란 지음, 김정현 그림,
들녘,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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