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아끼자구요?

어른을 위한 동화 <모모>

등록 2005.02.18 09:33수정 2005.02.18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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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땀 흘려 일해서 먹고 살고자 했다. 하지만 여가와 휴식을 갖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었다. 삶이 틀에 갇히고 강제되는 것 대신 삶이 존중되는 모습을 추구하고 싶었다.…병처럼 미친 듯이 서두르고 속도를 내는 것에서 벗어나 평온한 속도로 나아가고 싶었다." <조화로운 삶>(헬렌 니어링, 스코트 니어링 씀, 보리)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한미희 옮김, 비룡소)를 읽으면서 니어링 부부의 윗글을 생각해 보았다. 삶을 기계적이고, 정형화된 사회적 시간의 틀 속에 맞추기 보다는 삶의 여유와 관조에 필요한 여백을 만들어 내면서 생활을 좀 더 가치 있고 풍요롭게 가꿀 수 있는 길을 니어링 부부는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어른을 위한 동화책 <모모>에서 모모와 어린 아이들, 그리고 회색신사가 사라진 도시에서 새롭게 시간을 찾은 사람들의 삶이 니어링 부부의 생활과 같지 않았을까.


사실 현대생활의 삭막함은 현대인들이 시간을 지나치게 세분화하여 사용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하루 단위에서 한 나절 단위로도 우리 생활을 필요한 만큼 충분히 구분 지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으로, 분으로, 초로 나누어서 그 각각의 분절된 시간 단위에 우리들 삶을 끼워 맞추다보니 삶은 어느새 파편화되고 고립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듯 삶의 여백을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더더욱 시간에 쫓기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시간단위를 세분화함으로써 좀 더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삶의 방식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효율이고 조직인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현대사회의 기계적 메커니즘에 대한 적응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거대한 사회적 톱니바퀴 내에서 엄밀하게 규정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 속성상 한 치의 착오도 용납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그는 세세하게 계획되고 통제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현대인의 생존방식이다.

생존의 문제를 떠나서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엄격하게 시간을 관리하는 '회색신사'의 계획하에 미래를 설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내 집 장만부터 시작해서 아이들 교육이라든가, 혹은 좀 더 좋은 차, 고급스런 옷과 먹을거리 등을 위해 우리는 삶의 여유와 관조를 값비싼 기회비용으로 치르고 있다. 그런데 책에서도 이야기되듯이 현실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이 모든 것들은 오늘의 시간을 저금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단지 더 많은 권력과 명예, 재화를 소유하고 축적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을 저금하는 사이에 우리들 삶은 더더욱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와지고'(98쪽)있는 것이다.

"시간을 어떻게 아끼셔야 하는지는 잘 아시잖습니까! 예컨대 일을 더 빨리 하시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세요.…나이 드신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가장 좋은 것은 어머니를, 좋지만 값이 싼 양로원에 보내는 겁니다.…다리아 양을 꼭 만나야 한다면 두 주에 한번만 찾아가세요. 15분간의 저녁명상은 집어치우세요. 무엇보다 노래를 하고, 책을 읽고, 소위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91쪽)

회색신사의 이 말에서 드러나듯이 우리는 더 많은 노동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풍요로운 시간을 회색신사에게 저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활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을 관리해주는 회색신사는 언제 어디서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거리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시간을 관리하는 회색신사를 만날 수 있다.


물론 회색신사는 우리들 내부에서도 우리의 일상을 감시한다. 하여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회색신사의 주문을 상기시킨다. 지금은 서류 정리, 오후에는 모임, 저녁에는 영어 레슨을 받고, 퇴근 후에는 전화 상담,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컴퓨터를 켜고 자료를 정리하고, 아이들 학원비를 걱정해야하고 또 내일 일을 미리 고민하고 등등.

이 모든 일에는 회색신사가 정해준 목표가 있는데 '더 많은 재화를 위해, 더 높은 지위를 위해 더 빨리 일하시오.'가 그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 모토가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거의 맹목적이라고 할 정도로 바람직하게 생각되고 가치 있게 받아들여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급이나 승진, 더 많은 부의 축적, 눈부신 성공, 사회적 명예, 권력의 획득을 위해 우리들 생활 설계사인 회색신사가 설계해준 대로 살아가고 있다. 회색 신사의 계획표는 아주 복잡하고 치밀하게 짜인 것 같지만 극히 단순하게 말할 수도 있다. '현실의 시간을 저축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미래에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에서도 언급되다시피 우리가 더 많은 시간을 저축할수록, 그리고 시간을 아껴 쓰면 아껴 쓸수록 우리들 삶은 더욱더 빈약하게 된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들 가슴속에 있다'(98쪽)는 말과 같이 현재의 순간들이 우리들의 의지에 따라 선택되고 우리들의 열망에 따라 채워진다면, 그리하여 가슴에서 솟구치는 감격과 열정과 기쁨과 즐거움으로 현재의 순간이 가득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장되고 부풀려진 욕망과 이를 위한 맹목적 생활을 극복할 수 있을 때, 조급함과 조바심으로 현실 생활을 바라보기를 그칠 수 있을 때, 나의 욕구를 자제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성공만을 위한 사회의 틀 속에 갇혀있길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는 회색신사로부터 독립해서 우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회색신사와 싸우는 용기와 방법도 배울 수 있다. 회색신사와 싸우는 방법이란 남들보다 더 빨리 승진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몰아세우는 조급함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것일 수도 있고 개인의 삶을 지속적으로 야만적 틀에 묶어 놓으려는 사회적 힘, 곧 회색신사에 대항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 싸움이 동화책에서와 같이 낭만적일 수도,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으며 때론 모모와 같이 혹독한 고독과 외로움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 싸움은 가치 있고 한 번 해볼 만한 싸움임엔 틀림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싸움에 나서기 전에 전의부터 가다듬고 정신적으로 확고한 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자.

모모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비룡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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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기자'라는 낱말에 오래전부터 유혹을 느꼈었지요. 그렇지만 그 자질과 능력면에서 기자의 일을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자신에 대한 의구심으로 많은 시간을 망설였답니다. 그러나 그런 고민끝에 내린 결정은 일단은 사회적 목소리를 들으면서 거기에 대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생각도 이야기 하는 게 그나마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필요치 않을까, 하는 판단이었습니다. 그저 글이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고 책임감있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는 글쓰기 분야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일상의 흔적을 남기고자 자주 써온 일기를 생각할 때 그저 간단한 수필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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