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네 꼴이 어떻게 될라는지 괜히 걱정이네"

팔십 넘으신 노친에게서 보고 배우는 것

등록 2005.02.23 12:51수정 2005.02.2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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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실 컴퓨터 앞에서 작업을 하다가 베란다로 통하는 창문을 활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은 맑은데 바람이 이는 날이었다. 잠시 하늘의 하얀 구름덩이를 보고, 화단의 수목 사이를 포르릉 포르릉 날아다니는 참새들을 보다가 문득 시멘트로 덮인 마당을 보았다. 비닐 봉지와 광고지와 신문지 따위들이 바람에 밀려 굴러와서는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동네의 젊은 아줌마들 두명이 얘기를 나누며 지나갔다. 아무도 마당의 그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동네 슈퍼마켓에 갔던 옆집 아줌마가 돌아오는데 비닐 봉지들을 그냥 밟고 넘어갔다. 집에 왔다가 가는 동네 세탁소 아줌마도 신문지를 발로 차며 바삐 종종걸음을 쳤다.
외출하셨던 어머니가 돌아오시는 것이 보였다. 손에는 작은 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길과 연립주택 마당의 경계 턱을 넘어 마당으로 내려서신 어머니는 마당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손가방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마당의 쓰레기들을 줍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어머니가 현관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느끼고 나는 미리 문을 열어드렸다. 어머니의 한 손에는 손가방이, 다른 한 손에는 쓰레기들이 들려져 있었다. 어머니는 그 쓰레기들을 거실 구석의 쓰레기통에 넣으며 말했다.

"동네 젊은 여자들이 이런 걸 보고도 그냥 넘어 다닐 줄만 알았지, 생전 한번 치울 줄을 물러. 즈덜 집안만 깨끗허면 뭐 헌디야. 어느 세월에 소견들이 틀라나 물러."

"평소에 습관이 안 되어서 그렇겠지요, 뭐."
"그나저나 올 가을에 우리가 이사를 가면, 이 동네 꼴이 어떻게 될라는지, 괜히 걱정이네."


정말 어머니는 걱정스런 기색이었다.

<2>


동네 뒤편 공터에는 여러 개의 개집이 있다. 지금은 두마리의 개가 있다. 그 개들은 어미와 새끼이다. 어미 개는 누런 색이고, 새끼 개는 흰색이다. 어미와 새끼의 모양이 완전히 다른 것만으로도, 모두 잡종견들이다.

어머니는 그 개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신다. 남의 집 개들인데도 우리 집 개들인 것처럼 먹이고 보살피신다.

우선은 어머니의 동정심 탓이다. 그 개들의 주인집이 개들에게 너무 무심한 탓이기도 하다. 묶어 놓고 기르면서도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하루 종일 물도 주지 않는 날이 많다고 한다. 어머니가 한 손에는 밥그릇을, 한 손에는 물그릇을 들고 가서 각기 부어 주면 개들이 밥은 쳐다보지도 않고 물부터 환장을 하고 한도 끝도 없이 마시는 때가 많다고 했다.

어미 개가 새끼들을 낳았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밥을 갖다 주니 허겁지겁 맛있게 먹던 개가 밥 속에서 고등어 대가리를 하나 물어내더란다. 그걸 왜 그냥 먹지 않고 그릇 밖으로 물어내서 흙투갑을 시키나 하고 보았더니, 녀석이 그걸 물고 제 집 옆으로 돌아가더란다. 따라가 보았더니, 목줄 때문에 멀리는 가지 못하고 바로 제 집 뒤의 푸슬푸슬한 흙을 앞발로 파고는 그 속에다 고등어 대가리를 묻고 흙으로 덮더란다.

"똥개라두 보통 영리헌 개가 아니여. 개가 그러는 거는 내 생전 처음 봤다니께."

아침 식사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하시는 어머니는 그게 되게 신기하신 모양이었다. 신기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개들은 대개 그런 짓을 안 허는디요. 그거는 대개 야생의 여우나 너구리가 허는 짓인디…."
"그려? 그럼, 그 개는 참 유별난 개네. 개가 뭘 감춰 놓았다가 먹을 줄두 알구, 내 원 참…."
"혹시 굶주리는 때가 많다 보니 그 개헌티 그런 꾀가 생겨난 게 아닐까요?"
"그럴지두 물르겄네…."

그리고 어머니는 한가지 얘기를 더 들려 주었다.

"밥을 갖다주면 사람 기척을 듣구 개집 안의 강아지들이 죄 나오너. 다섯마린가 되어. 그런디 강아지들이 나오면 에미 개는 물러나서 지 새끼들부터 멕여. 그냥 멀거니 바라보기만 허다가 새끼들이 다 먹구 물러나면 그제야 지가 먹는다니께."
"배가 고플틴디두 용케 참구 새끼들부터 멕인다니, 그 개두 보통 영물이 아니네요."
"해간 그걸 보니께 그 에미 개가 아주 기특해 보여. 고등어 대가리 감춰 두는 거랑, 지 새끼들부터 멕이구 나서 저는 나중에 먹는 거며…. 그래서 내가 더 신경을 쓰게 된다니께."
"그런디 어머니가 그렇게 거둬 멕이는 거를 그 집이서 알라나요."
"그거야 뭐 알든지 말든지…."
"어쩌면 혹 어머니를 믿구서 그 집이서 그렇게 개들헌티 별루 신경 안 쓰며 기르는 건 아닐라나요?"
"당신두 참….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요."

이렇게 아내도 한마디 거들었다.

다섯마리 새끼 중에서 네마리는 어디인가로 팔려갔거나 선물로 주어졌는지 차례로 보이지 않게 되고 한마리만 남았다. 그 녀석은 강아지 시절에는 여기저기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른 아침 동네의 방범등들을 끄러 다닐 때는 쫓아다니며 성가시게 굴기도 했다.

어머니를 도와드릴 겸 가끔 개밥과 물그릇을 들고 따라가기도 했던 나를 그 어린 녀석도 용케 기억을 하는 탓이었다.

그러나 몸피가 좀 커지면서 그 녀석도 제 어미처럼 줄에 목이 매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모자 개는 서로 가까이 있기는 하지만 집도 각기 떨어져 있고, 목줄 탓에 서로 보기만 할 뿐 몸으로 만나지는 못하는 형편이다.

녀석들은 이른 아침에 내가 뒷동의 방범등을 끄려고 그쪽으로 걸음을 하면 멀찍이에서도 반갑게 아는 체를 한다. 나에게도 그러니, 어머니가 보이면 얼마나 반가워하고 킁킁거리는지….

한번은 어머니가 개들에게 밥을 주러 가셨다가 큼지막한 밥덩이를 하나 들고 들어왔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밥덩이였다.

"이런 게 어느 집에서 나왔는지 물러. 딴에는 개들 생각헤서 갖다준 모앵인디, 이렇게 딱딱허게 굳은 밥을 그냥 갖다 주면 개들이 어떻게 먹을 겨. 이게 명일(명절) 때 먹구 남은 밥인 모앵인디, 개들 생각허려면 제대루 소견을 써야지 원…."

그리고 어머니는 그 굳은 밥덩이를 냄비에 담은 다음 뒤 베란다에다가 내놓으셨다.

"내일일랑 저 굳은 밥을 우선 푹 삶구, 집에 있는 먹고 남은 우럭 젖국을 부어서 갖다 줘야겠어."

개 밥그릇에 들어 있는 딱딱하게 굳은 밥덩이에서 누군지 모를 '젊은 사람'의 딱딱하게 굳어 있는 '소견'을 확인한 셈이지만, 어머니는 다음날 개들에게 줄 밥을 확보해 놓으신 것이 흐뭇하시기도 한 기색이었다.

<3>

얼마 전에 온 가족이 먼길 나들이를 했을 때의 일이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휴게소에 들러 화장실을 보고 나와서 동작이 느린 아내를 잠시 기다리고 서 있을 때였다.

한 젊은 엄마가 대여섯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손을 잡고 가는데, 아이가 뭔가를 사달라고 조르는 모양이었다. 젊은 엄마는 아이에게 감자를 사주었다. 일회용 그릇에 수북히 담긴 감자를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런데 아이가 손을 잘못 놀려서 그만 감자 몇 개를 떨어뜨리게 되었다. 길바닥에 떨어진 감자들이 더러는 구르기도 하면서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아직 화장실에 있는 아내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모두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 젊은 엄마가 다음 순간 어떤 행동을 할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관심은 모종의 기대이기도 했다.

헌데 그 젊은 엄마는 길바닥에 떨어진 감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짜증 섞인 얼굴로 아이에게 뭐라고 꾸중만 하더니 이내 아이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휴게소 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니, 저래 놓고 그냥 들어가면 누구보고 워떻게 허라는 겨. 소견 딱지 읎는 별 여편네를 다 보겄네."

어머니는 혀를 찼다. 그러더니 얼른 주머니에서 휴지를 한장 꺼내었다. 그 휴지를 손에 펴들고 감자들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갔다. 딸아이가 냉큼 할머니를 따라갔다. 어머니는 손녀와 함께 그 감자들을 하나하나 주워서 휴지로 싸들고 왔다.

"어머니, 그 감자를 내가 그 젊은 엄마에게 갖다주고 올까요? 저 홀 안에 들어가면 그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디…."

"에이, 우리가 그렇게까지야 헐 필요는 읎지. 내가 대신 치웠으니께 됐어."

그리고 어머니는 그 감자들을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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