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무기 보유 선언 이후 부시 행정부가 의외로 조용해졌다. 그동안의 강경 일변도의 군사·외교적 행보와 대조적으로 온건하여 오락가락하는 행보처럼 보일 정도인 것이다.
무엇이 부시 행정부의 강경 기조를 주춤거리게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사실 지금의 국제 질서는 국제 사회에서 견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강대국 미국의 힘이 커져 있고 또 그에 따라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가 세계를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오만한 제국’, ‘부시는 전쟁중’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는 의심만으로도 전쟁을 했는데, 북한의 경우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공식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대응을 하여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평화를 지향하는 노무현 정부의 외교 때문일까? 조금은 일리가 있겠으나 전혀 아닌 것이다. 말 못할 사연이 있기 때문에 주춤거리고 있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지금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했던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다.
지난 번 글을 통해 부시 행정부의 강성외교가 머뭇거리는 상황은 그간의 북한 핵에너지 개발/억제 국면에서 핵무장 충돌 국면으로의 변화와 그러한 상황에 대한 준비 미비로 발생하는 현상임을 분석했다. 그리고 이 쟁점은 북한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우라늄 자원의 개발억제 및 (북한정권 붕괴시) 확보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밝혔다. 전략물자 개발억제 및 확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석유자원과 관련된 이라크 침공과도 내면적으로 비슷한 속성이 숨어있는 것이다.
미국의 지도층, 특히 보수적인 지도층은 적성국인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든 혹은 대규모의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든 모두 허용할 수가 없는 것이 기본 기조이기 때문에 부시 대통령은 이러한 압박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결코 조용히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인 것이다. 미국측 입장에서는 국익이 손상당한 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부시 대통령이 책임을 져야 하는 압박을 받는 상황인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고민과 선택
부시 행정부가 책임을 벗어나는 길은 변화된 상황을 원상회복 시키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미국의 지도력을 높이 세우는 일이다. 이것은 강성외교를 지향해온 부시 행정부 입장에서는 사실상 북한을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북한은 군사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처럼 손쉬운 상대가 아니기에 부시 행정부의 고민을 깊게 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승승장구하던 미국에 최초로 또 가장 최악의 불명예스런 패퇴 기록을 남긴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1·4후퇴로 알려져 있는 대후퇴의 시초가 되는 장진호전투는 미국인들에게 제1차 및 2차 대전의 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맥아더장군을 해임하게 만든 최악의 실패한 전투였다. 미국이 남북전쟁 이후로 최악의 패퇴를 당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결코 만만하게 느껴지는 곳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상처가 너무 깊기에 미국의 군부지도자들이나 지도층은 수시로 이러한 불명예를 만회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 뼈아픈 추억이 있는 곳이기에 북한과의 무력 충돌은 결국 북한의 괴멸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지만 미국 역시 깊은 상처를 안게 될 것이 예상되기에 부시 행정부의 고민과 선택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의미에서 북한과 이라크가 다른 점인 것이다.
트루먼의 고민에 빠진 부시 대통령
한국전쟁 당시 피아간 사력을 다한 엄청난 무력충돌 끝에도 승부를 보지 못하게 되어 결국 전쟁의 승리만을 염원하던 맥아더 사령관은 한반도에 4개의 핵폭탄을 투하하고 중국의 만주 일원에 22개의 핵폭탄을 투하하여 전쟁을 승리로 종결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뒷감당이 부담스러웠던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맥아더가 해임되고 핵전쟁 계획은 무산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대규모의 핵전쟁은 북한의 몰락을 불러오겠지만 정치인 부시에게도 치명적인 손해를 가져올 수 있기에 모험적이고 불확실한 선택인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가졌던 고민을 이제 부시 대통령이 하게 된 것이다.
북미간 무력충돌이 벌어지면 재래식 전쟁으론 북미간 교착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대단히 높고 그렇게 될 경우 핵전쟁 국면으로 상승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의 지하요새를 파괴할 수 있는 많은 첨단 무기를 다량 소유하고 있지만, 북한 역시 전쟁을 대비하여 전국토의 요새화, 전인민의 무장화 등 오랜 기간 대비해 왔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단일민족으로 준종교적 단결력을 보여주는 북한의 결속력 역시 전쟁의 승리를 예측하기 힘들게 만드는 상황이며, 대부분 산악 지형으로 장기간의 게릴라전이 가능한 지형적 환경도 단기간의 손쉬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흔히들 장진호의 패퇴와 관련하여 중공군의 압도적인 수적 우세와 살인적인 추위를 이유로 들곤 하지만, 그것이 당시 상황을 모두 설명해주지는 않는 것이다. 이미 2차 대전 당시 만주지역의 100만이 넘는 일본 관동군을 염두에 두고 전투를 한 경험이 있는 맥아더였기에 몇 십만의 병력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미국 북부지역의 맹추위 역시 결코 북한 지역의 추위보다 약한 것이 아니기에 경험하지 못했거나 대비하지 못할 추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2차 대전의 영웅으로 또 태평양의 시저로 통하던 맥아더가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와 거의 일방적인 제공권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가장 처참한 패퇴를 경험한 곳이기에 지금의 군부 지도자 그 누구도 함부로 승리를 장담하며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확실한 군사적 승리를 확보하지 못하면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의 선택은 쉽지 않은 것이다.
미국은 이미 1962년도의 쿠바 사태를 통해 핵무장 충돌상황의 경험이 있지만 그 당시는 소련 후루시초프의 양보로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북한과의 무력 충돌이 벌어지면 전대미문의 핵전쟁으로 간다는 것은 불문가지이기 때문에 부시 행정부도 결코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닌 것이다.
흔히들 미국은 지금 북한에 비해 월등한 화력과 첨단전쟁 장비 및 기술의 압도적인 우위에 있기에 손쉬운 승리를 예측하는 경우가 많지만 화력과 첨단무기의 압도적 우세는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도 그러했었다. 맥아더의 경우 화력의 우세로 전선이북은 필요시 폭격으로 황무지(wasteland)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을 정도이기 때문에 전쟁의 패배는 생각할 수가 없었고 크리스마스 이전까지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표현한 ‘전혀 다른 전쟁’을 겪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처참한 패퇴를 기록했기에 지금의 화력이나 군장비의 압도적 우세만으로 함부로 승리를 예상하기 힘든 것이다. 더구나 이제는 북한이 초보적 형태이지만 핵무장되어 있는 상태이기에 전쟁의 확실한 승리가 더욱 어렵게 예측되는 것이다. 한국전쟁 참전 당사국인 중국 역시 공산정권 창립 1주년의 상태가 아니고 미사일과 핵무장이 잘 되어 있는 국가로 성장한 상태이기에 주변 상황 역시 좀 더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저질러진 이라크와의 전쟁은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고,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살상 무기는 발견되지도 않아 전쟁의 정당성마져 크게 흔들려져 있기 때문에 승리를 확실하게 보장하지 못하는 추가적인 전쟁은 대단히 부담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목줄을 확실하게 죄는 것을 확인한 이란에서 북한을 흉내내어 추가적인 핵무장 선언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 역시 부시행정부에 정치적 부담이 되고 있다. 이란에 대한 압박 역시 너무나 노골적으로 진행되었기에 수습하기 쉬운 상황이 아니고 또 이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이해 관계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의 압박을 쉽게 풀 상황도 아니다.
이것이 현재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또 그대로 있거나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난처한 부시 행정부의 실상인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자면 또 다시 불확실한 제2의 한국전쟁이 예상되고 뒤로 물러서면 무능력, 비효율, 일관성 없는 외교에 대한 비판자들의 공세가 걱정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핵전쟁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고슴도치처럼 무장하고 있는 북한과 죽자 살자 식으로 제2의 한국전쟁을 벌리기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담스러운 것이다. 특히 그동안의 부시 행정부가 쉬운 상대를 대상으로 전자오락처럼 쉬운 게임만을 하다가 이제 본격적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와 상황을 만나게 되니까 선택이 더욱 힘들고 어려운 것이다.
물론 미국의 군부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제2차대전의 영웅 맥아더를 능가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스스로 자신감을 펼치는 인물이 있을 것이기에 모험주의적 선택을 주장하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와 이해득실을 먼저 고려하기에 부담스러운 모험적인 결정은 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쉽지 않은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은 장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부시 행정부의 조용한 외교의 이면인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는 맥아더의 도전적 요청에 의해 트루먼이 핵전쟁의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지만 지금의 부시 행정부는 자신들의 강성외교의 자충수로 고민하고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미국이 아닌 부시 행정부 자체가 이렇게 실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한국정부에게는 오히려 외교적 기회가 제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기 속에 맞게 되는 기회인 셈이다. 사실 이제까지 북핵문제와 관련된 6자회담에서는 외형적 명분과 실재적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관련 당사자간 합의를 보기 어려웠으나, 이제는 관련 핵심 당국자인 북한과 한국 및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는 것이 모두에게 이롭다는 것이 공유되는 상황이기에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셈이다. 참여정부가 자주적으로 중재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북한을 설득하여 비핵화의 길을 걷게 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의 고민을 해소해 주고 동시에 부시 행정부를 설득하여 북한의 생존 우려를 해결해 주도록 중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한국정부는 한반도의 전쟁국면을 벗어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
6자회담이든 혹은 아니든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 없이 현재의 어려운 상황 타개가 주된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한번 전쟁 드라이브가 걸리면 제동이 되지 않는 나라이다. 따라서 전쟁 드라이브가 걸리기 전에 사태가 수습되어야 한다. 즉 평화적인 외교적 수습이 가능한 공간은 전쟁 드라이브가 걸리기 직전까지의 시간인 것이다.
부시 행정부의 고민을 오래 방치하면 뜻하지 않은 왜곡된 선택을 할 수도 있기에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면밀히 잘 분석하여 외교적 활로를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기회를 놓치면 평화를 지향해온 참여정부 역시 대단히 어려운 처지에 빠질 수도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핵전쟁을 고민했던 트루먼의 상황에 빠진 부시 행정부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현재 한국정부의 상황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기자는 <노오(No)라고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한국>(1992) <대북한 핵억제정책과 합리적 선택>(1995) 등의 책과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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