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1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핵보유 선언’을 한 것으로 보도되어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북한 핵개발 문제로 전쟁위기설을 수시로 겪었던 터이기에 국내 대부분 분석은 또 다른 ‘북한의 벼랑끝 외교(brinkmanship)’ 혹은 ‘대외협상용’이라는 싸구려 상투어에 의존한 채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이해를 시켜주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핵무기 보유를 부인해 왔다. 적어도 언술적으로 부인해오던 북한핵무기 보유를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공식 선언 형식이기 때문에 미국이 주도하는 NPT(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핵확산금지조약)체제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일이다. 잘못하면 NPT체제의 붕괴로도 연결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인 것이다.
따라서 국제 군사외교의 역학관계가 크게 변화하게 되는 대단히 중요한 일인 것이다. 미국중심의 패권적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인 현상유지(status quo)정책이 크게 변화를 요구받게 되는 것으로 미국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전쟁위기설을 불러일으키던 북핵문제가 이제 공식적으로 확실하게 북-미간의 충돌국면으로 접어들게 되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특히 그동안 강경 일변도로 북한을 몰아세우던 보수적 부시행정부에게 북한이 공식적으로 핵무기보유 선언을 함으로써, 비유하자면 사자의 코털을 뽑은 형국이기 때문에 북-미간 무력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상한 국제적 상황
이런 중대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제적 상황은 더 조용한 역설적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예전에는 없다고 극구 부인해도 믿지 않고 ‘이미 만들었다’ ‘시인했다’고 하며 강하게 몰아세우던 부시행정부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며 상황을 무시하고 있고, 핵무기 보유를 숨겨야 할 북한은 우린 이미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러한 역설적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앞으로 이 일은 어떻게 발전되어 갈 것인가? 한반도 평화에는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까? 이런 의문에 정확하게 답을 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언론에 넘쳐나는 ‘벼랑끝 외교’나 ‘협상용’이라는 상투적인 분석으로 되지 않는다. 보다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국민이 목도하는 역설적 현상은 부시행정부 강경외교정책이 크게 실패하면서 나타나는 기현상인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그간 강성위주의 대북정책을 펼쳐왔다. 강성도 보통 강성이 아니고 최고의 강성정책을 보여주었다. 대화는 해도 협상은 하지 않는다거나 무력선제공격을 공공연히 밝히는 등 초고강도의 압박을 해왔던 것이다.
최근 들어서 언술상으로 북한에 대해서 다소 낮춘 감이 있지만 그것은 남측의 노무현 정부를 고려하고 또 대이라크 전쟁과정에서의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에 대한 세계비판 여론을 감안한 다소간의 외형적인 유연성이었을 뿐 내용상으로는 크게 바뀐 것은 없다. 이것은 북한의 대외성명에서도 그대로 지적되고 있는 사항으로 북한의 입장에서는 부시의 대북체제전복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고 인식되면서 극단적인 도발적 대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딜레마에 봉착한 부시행정부
문제는 이렇게 강성 일변도로 또 최후의 수단까지를 늘 활용해왔기 때문에 부시행정부의 입장에서는 북한의 도발적 대응에 대해 더 이상 외교적 강제 수단이 없다는 파탄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전쟁’ 이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는 막다른 국면으로 몰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지금 상황이 북한과 전쟁을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담스럽고 어려운 상황이다. 200여년이라는 짧은 역사에서 200여회의 전쟁을 치른 미국이기에 전쟁의지가 없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세계를 압도할 수 있는 군비도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 부시행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미 일방적으로 치른 이라크 전쟁이 내부적으로 철수가 이야기될 정도로 빼도 박도 못하게 발목이 잡혀있는 형국이고, 북한과 똑같은 상황인 이란에 대해 북한과 똑같은 외교군사적 압박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은 윈-윈(win-win) 전략이라 하여 지구상 두 곳의 전쟁에서 동시에 승리를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해왔다. 사실 미국은 전력상 그러한 호언을 할 정도로 충분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 곳에서 동시적인 군사적 승리는 아직 논의된 바도 없고 검증된 바도 없다.
특히 지역 강대국으로 평가받는 이란과 한국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북한은 모두 재래식 병장기로 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군사력을 가진 쉽지 않은 전쟁터로 평가받고 있는 지역들이다. 따라서 이라크에 이은 동시전이 펼쳐질 경우 전쟁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부담스러운 지역인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상황도 부시행정부에는 우호적이지 않은 것이 또 하나의 부담이 되는 상황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 김선일씨 피살사건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국에 대해 비굴하게 협조한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부시행정부에 협조해왔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전쟁만은 회피되어야 하며 이와 관련하여서는 얼굴 붉힐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노무현 정부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부시대통령이 원한다면 할 수는 있겠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을 하기에는 대단히 벅찬 정치적 부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그동안 노무현 정부의 비굴하게 비쳤던 대미외교의 인내심은 위기국면에서 좋은 결과를 도출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기에 부시행정부의 테이블에는 전쟁을 포함한 모든 옵션이 많이 놓여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마음 편하게 취할 수 없게 되어 있는 딜레마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비유하자면 늘 매로 다스리던 집안에서는 꼭 귀한 손님이 왔을 때 매 맞던 애가 버릇없이 대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늘 강경하게 매 맞던 아이는 더 이상 매 맞는 것을 겁내지 않고 손님이 있어 회초리를 들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에게 도발적으로 대드는 것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늘 초강경으로 위협받아 왔고 또 부시행정부의 전쟁 결의는 확실하다고 믿기에 불가피한 전쟁이라면 미국이 부담스럽고 북한이 유리한 상황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공세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부시행정부는 지금 정치외교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강성외교정책이 파탄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또 엄청난 힘을 가진 강자로서 약자에게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이며 물러설 수도 없다. 그럴 경우 미국의 보수 강경파가 용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끝날 수가 있다. 그래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며 이런 딜레마 상황을 애써 외면하는 이상한 현상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이익
북한은 이번의 사태로 외교적으로 여러 가지 성과를 남기는 형국이 되었다. 미국의 강한 군사외교적 압박에 대응하며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고, 그대로 지속될 경우 핵보유국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실리를 챙길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실리가 여의치 않을 경우 또 다시 핵포기 협상과정을 밟아갈 수도 있다.
이번의 성명서 전문에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원칙적 립장과 조선반도를 비핵화하려는 최종목표에는 변함이 없다”고 결론적으로 밝히는 점도 핵보유국이 되려는 욕심보다는 부시행정부의 대북압박정책을 완화시키려는 의도가 더 강하게 읽히는 대목이다. 부시행정부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후퇴해도 북한측으로서는 남는 것이 많은 장사인 것이다.
향후 전망
과거 어느 정치학 교수가 언론에서 북한의 대미협상을 분석하며 제갈공명과 같은 면이 읽힌다는 평가를 한 적이 있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 부시행정부가 계속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론을 펼쳐왔기 때문에 기왕에 얻어맞을 것 같으면 자신들이 유리한 시기와 상황에서 얻어맞을 것을 각오한 것 같다. 그런 북한의 자포자기식 도발적 도전에 대해 오히려 공격적이었던 부시행정부가 애써 무시하는 역설적 상황은 크게 세 갈래의 전망을 낳게 한다.
첫째는 현재와 같이 북한의 선언을 무시하는 것이다. 사실 핵폭발 실험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는 비록 보유가 확인되더라도 정치군사적으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실전에서 과연 제대로 터질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과 같이 GPS시스템 등을 통해 정밀타격이 가능한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터질 수 있는 핵폭탄이라고 해도 유효한 운송시스템이 없이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무시할 수도 있다. 북한이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해도 발사대 등에 대한 공격에 대단히 취약하기 때문에 군사적 사용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는 것이다.
둘째는 무력시위를 통해 북한의 자발적 폐기를 강제하도록 압박하는 가능성이다. 이번 사태는 기본적으로 미국을 화나게 하는 조치이기 때문에 미국의 대응이 없을 수 없다. 그 대응은 군사적 대응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앞서 분석한 바와 같이 전쟁 자체는 미국도 부담스런 상황이기 때문에 군사적 시위 후 미국이 체면치레(face-saving)를 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질 소지도 있다.
셋째는 전쟁 가능성으로 발전할 확률도 높다. 부시행정부가 지금 전개하고 있는 대이란 압박을 일시 중단 혹은 이완하면서 북한에 대한 압박에 집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분석한 바와 같이 이러한 선택 역시 여러 가지 부담이 있기에 크게 매력적이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이다.
미국은 지금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 외교의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서구사회 다독거리기를 하며 유화적 국제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이란이나 혹은 대북한 정책에서 유화적 제스처를 취할 입장은 전혀 아니다. 그럴 경우 NPT 체제가 붕괴되면서 미국 중심의 국제군사외교질서에 일대 변화를 받게 되어 미국사회의 지도층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동시에 3곳에서의 전쟁도 역시 부담스럽고 모험적인 일이 되는 딜레마인 것이다. 강공 일변도의 부시행정부가 초래한 정치외교적 딜레마인 것이다.
현재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가장 바람직한 길은 북한을 설득하여 다시 NPT체제로 복귀하는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다. 이것은 94년도의 제네바 합의와 비슷한 개념으로 미국과 북한 및 한국 모두에게 실리를 챙겨주는 일이다.
이 경우 북한은 비핵화의 길을 걸으며 핵주권의 일부를 양보하는 형국이 될 것이며, 부시행정부는 전통적인 북한 붕괴 시나리오를 접고 북한체제를 인정해주는 명분상의 양보를 해야 할 것이다. 협상테이블은 이미 6자회담이라는 틀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북-미간 내용상 합의만 되면 6자회담에서 합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상 못한 진창에 빠진 상태에서 부시행정부가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는지는 초미의 중대한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이해 당사자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쟁점과 비판'(http://www.apress.or.kr) 사이트와
필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joins.com/azoro)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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