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37회(6부 : 겨울철새를 꿈꾸며 )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3.08 20:50수정 2005.03.09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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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기 화백 제공
한철이 녀석은 대학 2학년 10월쯤에 진경이 노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한바탕 노진과 싸운 후 미영이라는 음악학과 여학생을 새로 사귀었다. 그런데 미영도 노진을 알게 되면서 그에게로 마음이 향했다.

나나 한철에 비해 노진은 약간 뚱뚱한 편이었는데도 의대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여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요, 1등 신랑감이었다.


대학 3학년 11월에 미영과 한바탕 싸우고 난 녀석은 술을 잔뜩 먹고 미영을 노진에게 데려다 주겠다며 오토바이에 강제로 태워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러다가 그만 택시하고 부딪히는 바람에 미영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녀석은 머리를 크게 다쳤다.

서울 큰 병원 중환자실을 전전하면서 한때는 약간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끝내 일어나지를 못하고 대학 4년 6월 초 녀석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젊디젊은 약관의 나이에 녀석은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녀석이 가는 날도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나와 노진 그리고 진경이 녀석의 유골을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해수욕 하러 갔던 대천 앞 바다에 뿌렸다.

"녀석, 그렇게 개죽음을 할 거면 김일성 죽어라! 또는 전두환, 노태우는 자폭하라! 뭐 그러고 죽었으면 좀 좋아. 그러면 통일투사나 민주열사가 되었을 거 아니냐구.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난다고 그래, 여자 하나 때문에 죽어. 바보같이…."

노진이 술을 먹긴 먹었는지 그답지 않게 한동안 넋두리를 했다. 내가 노진을 보채어 유람선을 한 번 타보자고 했다. 노진이 시골사람처럼 무슨 유람선이냐며 펄쩍 뛰었다.


"그래, 시골 사람들이 서울 오면 1번 코스가 63빌딩 구경하는 것과 유람선 타는 것이라며. 야야, 우리도 오늘은 시골사람이 한 번 돼보는 거야. 사실 따지고 보면 너나 나나 시골뜨기 아니었냐. 촌놈 말이야 임마!"

나의 강력한 요청으로 노진은 유람선 위에 올랐다. 이윽고 뱃고동 소리를 내며 유람선은 잠실 쪽으로 나아갔다. 빗속에서 보는 서울의 야경도 볼 만하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울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예전의 보문산 전망대에서 대전시내를 내려볼 때와 유사했다.


우리는 잠실 선착장에 도착하여 술 한 잔씩을 더 들이켰다. 그리고는 비를 쫄딱 맞은 채로 노래방에 가서 목이 터지라고 소리를 높이며 노래를 불렀다. 그래도 가슴 한가운데 응어리져 있는 그 무엇은 풀릴 줄을 몰랐다. 오히려 가슴이 더 답답해와 제대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일어나 보니 집이었다.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였다. 욕실에 들어가 일단 샤워부터 한 나는 정신이 번쩍 나게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병째 들이켰다. 그러자 좀 술이 깨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을 추스린 나는 다시 내 방으로 가서 마술 상자와도 같은 초희의 유품을 흔들어 깨웠다. 다시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천수만에서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철새 떼의 웅비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대학 2학년 말. 우리는 겨울 방학을 맞아 학술답사를 떠났다. 천수만이 보이는 어촌이었는데 우리는 분과별로 나누어 전해 내려오는 민요와 설화 그리고 사투리를 채집, 채록했다. 초희와 나는 바람 쐬러 바닷가에 나갔다가 그만 그곳 경치에 홀딱 반해 추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천수만을 구경하였다.

겨울철새들의 비상(飛翔)이 장관이었다. 날아올랐다가는 이내 추락하고 마치 한편의 군무(群舞)를 보는 것 같았다. 동해 일출도 대단한 구경거리지만, 해가 지는 광경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저녁놀을 배경으로 한꺼번에 이륙하고 착륙하는 새떼들을 보면서 우리는 눈과 귀와 그리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천수만에서

1
새들의 나라,
철새들의 바다,
이곳은 새들이 주인이다

새들은
지도와 시계를 본능처럼 움직여
정확히 때를 읽는다
아니, 때를 만든다고 할까?
그들을 보면 계절과 날씨까지도 알 수 있다

새들은
태양처럼 일어설 때와 달빛처럼 내려앉을 때를 안다
구름처럼 모일 때와 흩어질 때를 알고
밀물과 썰물이 그러하듯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알며
바람처럼 소리 내어 울 때와 숨죽이고 있을 때도 알지

지나치리만큼 자연을 신앙하는 그들
그러나 하루 종일 바다와 자맥질, 그렇게 씨름하면서도
정작 바닷물에 몸을 맡기지는 않는다
목욕 차 내려온 선녀들처럼
물이 좋아 물 속을 노닐면서도
물에 젖지 않는 까닭은
하늘을 호흡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2

한 마리 새는 작다
그러나 새떼는 결코 작지 않다
한 번 날개 치며 비상하는 그들 앞에 서 보라
떨기나무 아래에 선 모세처럼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인간이 눈부시다고 자랑하는 문명은
자연을 욕보여 얻어 낸 전리품 같은 것
지금도 서로 더 갖겠다고 다투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보고
화가 치민 자연이 벌떡 일어서기 전에
이제는 물길을 돌려야 한다

사실 알고 보면 인간도 철새
그럼에도 너무 오랫동안 텃새처럼 군림하다
마침내 닭이 되어 버린
웃지 못할 뫼비우스의 띠!

이제는 아무리 날개짓을 해도
하늘을 달릴 수 없다
겨우 지붕이나 벗어날까?
세상과의 신선 놀음에 물맛을 잃어버린 연어처럼
갈길 몰라 헤매는….

저 새들을 따라가면 혹시 에덴에 닿을 수 있을까?
두 팔을 벌려 몸을 힘껏 던져 보지만
이방인의 낯선 몸동작에
오히려 바다만 까무러치듯 일어설 뿐

겨울 철새를 꿈꾸며

1
아이의 자연 공부를 도와 주다
철새의 얼굴을 보게 되다
철새 - 철을 따라 이리 저리 살 곳을 바꾸는 새. 기후조, 반더포겔, 후조(候鳥) <=> 텃새
여름 철새와 겨울 철새로 大別

아빠,
여름 철새가 좋아? 겨울 철새가 좋아?
글쎄….
갑작스런 심문에 소크라테스 되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겨울 철새
왜냐고 묻기도 전에 아이의 입술은 벌써
바람개비다

기러기는 서리 맞고 내려와 추위를 온몸으로 짊어지다가 마침내 어둠이 썰물져 가면 정오(正午)의 이슬처럼 낮아져 미련 없이 또 다른 겨울을 향해 나래를 펴지만

제비는 꽃바람을 타고 와 마치 자기가 새봄의 여왕인 양 진탕 노래하다가 한기(寒氣)가 어리면 물차게 몸을 날리잖아. 다른 봄을 찾아. 밤손님처럼

순간, 여미어지는 나의 옷매무새
과연 딸애에게 비친 나의 얼굴은
기러기일까? 제비일까? 혹 참새는 아닐런지

천국은 어린 아이들 차지라는 성구(聖句)가 새삼 뜨끔하다.

2

인생은 어차피 철새인데
그럼에도, 텃새처럼 영생(永生)할 듯이 텃세를 놓는 어리석음
새들도 본향(本鄕)과 종점(終點)을 알건만
진실로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또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남의 집에 알을 낳는 뻐꾸기
말없이 젖을 주는 개개비
온종일 땀흘리는 꿀벌들
밤이 늙도록 이슬에 젖는 박쥐들
빛도 이름도 없이 그림자를 道로 아는 사람들
쓸개와 간을 오르내리며 영광을 가로채는 족속들

얼핏 보기에 세상은 어둠으로 짓눌린 만화경속
똑바로 걸어 가면 바보 천치이고
샛길로 날아 가면 영웅이요 장군이다.

아빠,
이런 동네에서 보람이 꽃필 수 있을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점점 추해진다는 것 아닐까?
차라리…

3

아, 사랑스런
그런 것은 아니다.
옛날의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열 명이 없어 불세례를 맞았다지만
오늘의 서울에 그래도 여전히 해가 솟고 달이 뜨고 별빛이 흐르는 것은
그 어딘가에 그늘처럼 숨쉬는 지상(地上)의 천사(天使)가
적어도 열사람 이상은 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
자고로 백합(白鶴)보다 까마귀의 울음이 활개를 치는 법
몇 마리의 미꾸리가 겁나서 강물을 닫을 수는 없잖니
설사 여름 철새로 하늘이 온통 뒤덮인대도
그것을 핑계삼아 푸르른 꿈을 구길 수 있을까

아빠, 나도 이제부터
겨울 철새로 살 거야
아빠처럼….

바다의 인생

1

태양이 아침을 열면
하늘이 구름을 밀치고 소리 없이 내려와 알몸으로 눕는다
행여 추울까 불을 지피고
마파람의 흔들 그네와 노래로 부족한 잠을 채운다
이윽고 코고는 소리가 쪽빛으로 번지면 비로소
바다는 우뚝 일어선다

바다,
쓰다 못 쓸 것을 주어도 말이 없다
오히려 고마운 생각에 왼손이 모르게 땀을 흘린다
맛난 것을 먹겠다고 땅위를 치떠보는 일도 없다
지금 있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배부를 수 있으므로
주려도 결코 고프지 않다
화수분의 전설과 오병이어의 비밀을 옷입고 있기 때문

하지만 마음만은 늘 가난하다
일한 만큼 대가를 못 받아서
남이 날 알아주지 않으므로
늙고 병들어
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에덴을 되찾기 위해
어디나 있고도 없는 우리의 천국 확장을 위해
입술로 듣는 줄을 타고 오르며 물살의 죽지를 파닥이는 것일 뿐

2

바다,
돌이 튀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
태산이 주저앉는 홍수에도 넘칠 수 없는 호수
주제와 분수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인 安分知足의 化身
가슴이 서리를 맞아도 땅을 치지 않으며
소금이 두 조각이 난대도 목젖을 내밀지 않는다 결단코

목석의 지어미라서
아벨의 형을 자식으로 둔 죄 때문에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꿈꾸는 은사(隱士)처럼 살고 싶어서
도원(桃源)을 베개 삼고 사는 저선(謫仙)이 부러워서
아니, 아니다
그저 어제도 걸어 왔고 오늘도 걷고 있고 아마 내일도 걸을
내 길, 참 길이라는 믿음에서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강요하는 법은 없다
좋아서 따라오면 그 뿐 다른 길로 접어들어도 그 뿐
다만 기도로 그 영혼을 눈물 속에 담는다

3

바다,
나이테를 보시(布施)한 까닭에
정확한 나이도 모른다 생일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나 늙지도, 낡지도 않았다 여전히 서른 한살
병(病)도 없다 따라서 기생하는 의원도 없을 밖에

누구는 산삼 깍두기에 웅담차(熊膽茶)를 먹어 가며 장수한다지만
하늘이 열린 날부터 이제껏 쓰레기국만을 마시고도
이렇게 건장한 걸
불로초(不老草)는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일, 자아를 부수는 일
자기는 마르더라도 하늘을 살찌우는 일이다

아가미 하나로 먹고 싸는 단세포 고등동물이
추호라도 움켜지려 했다면
벌써 터졌을 것이다
배탈 난 화산이 구토하듯이

4

바다,
그러나 매양 부드러운 빛깔만은 아니다
주전자의 물이 100°c를 넘어 분수처럼 뻗치면 회초리를 들 줄도 안다
육지의 죄악 씻으러 멀리 원정을 떠나기도 하고
아주 가끔은 광란에 젖은 듯 주정도 하지

하늘이 외박하는 날이면 태풍이 용케 알고 달려와
엉덩이를 훔치려 든다 피의 줄기 맛본 상어떼처럼
그 날은 머리를 온통 풀어 제치고 처용을 저주하며 춤을 춘다
옷고름과 치마끈 풀어진 게 대수랴

"둥당덩 둥당덩 덩기둥당에 둥당덩
둥당에디아 둥당에디아 덩기둥당에 둥당덩"

허나 그 뿐,
벼랑에서 곤두박질한 폭포수가 더욱 순결한 이름으로 곧추서듯이
하늘은 어김없이 강림(降臨)하고 바다는 동정녀로 소생(蘇生)하고….

~바~다~는~民~草~이~고~씨~알~은~祖~國~이~며~겨~레~는~하~늘~이~고~하~나~님~은~바~랄~인~겨~

문득 떠오르는 아버지 말씀!

5

바다,
저녁이 되면 낮달처럼 허무를 벗는다
아무리 벗기고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
도리어, 긁을 수록 비대해져 가는 부스럼
인생은 원래가 무상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어리석은 것일까

제발 썩지 말라고 그렇게 많은 소금 아낌없이 퍼 주었건만
자꾸만 썩어 들어가는 땅
이제는 바다까지 숨막힐 지경이다 헉 헉
바다는 운다 입을 틀어 막고 심장으로
너무 울어 온몸이 온통 눈물이다
아, 이 눈물로 세상을 맑고 밝게만 할 수 있다면
다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많은 사람들이
잘났다는 착각에 갇혀 있고
자신은 모두 다 알고 있다는 사실 하나 밖에 모른다
그러한 박쥐의 자손들 때문에 밤이 깊어도 눈을 닫을 수가 없다
모두가 넋 놓고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가는 이 시간
누군가는 열린 눈으로 현실을 보듬어야 되지 않을까 大地의 불침번되어

밤새 보채는 아이, 눈물로 달래는 엄마
가늘어지는 다리에 점점 가위 눌려 신음하는 노인들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의 어두움을 털어내는 젊은이
세계 평화 위해 밤을 밝히는 연구실의 불빛에 젖어
도무지 눈을 붙일 수가 없다

오늘도 바다는 하늘을 닮으려는 몸부림에
이마가 항상 푸르다
혹, 세상이 점점 추워져 멍울진 것은 아닐까
눈이 아프게 시퍼러 오히려 안쓰런 海의 살결
파도만이 가끔씩 포말되어 땀을 닦는다


천수만을 다녀와 그곳을 배경으로 쓴 시편들이다.

덧붙이는 글 |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38회에서 계속됩니다.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38회에서 계속됩니다. 

리울(아호: '유리와 거울'의 준말) 김형태 기자는 신춘문예 출신으로 시와 소설을 쓰는 문인이자, 제자들이 만들어 준 인터넷 카페 <리울 샘 모꼬지> http://cafe.daum.net/riulkht 운영자이다. 글을 써서 생기는 수익금을 '해내장학회' 후원금으로 쓰고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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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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