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홍건은 아직 한글을 모릅니다

[홍건아, 학교 가자1] 공동육아에서 일반 초등학교에 진학하는 우리 아이

등록 2005.02.28 15:26수정 2005.02.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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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오늘 형아들한테 '똥이 필요해' 다 읽어줄 수 있겠어?"
"몰라."

윤홍건은 아직 한글을 다 깨치지 못했다. 그리고 낼 모레면 초등학교 1학년이 된다. 오늘은 방과 후 학교의 3학년 형아들이 졸업하는 날, 졸업 선물로 윤홍건이 형아들하고 약속한 것이 '짧은 책 한권 읽어 주기'였던 것이다.

98년 일주일 내내 비가 퍼붓던 그 여름에 윤홍건의 엄마, 아빠가 된 나와 남편은 선수 학습의 '극성스러움'에 치를 떨며 21세기 초입의 대한민국과는 다른 세상에서 지난 7년을 살았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니며 아이는 즐겁고 건강하게 잘 컸고, 우리 가족은 보육에 관한 한 별다른 고민 없이 지금껏 살아왔다. 공동 육아의 또 다른 '극성스러움'에 지쳐 지난 여름 '남들처럼' 공립학교에 보내자고 결정할 때까지 우리의 세계는 별탈 없이 그렇게 지속 될 것 같았다.

a '무지개 빠방'. 윤홍건이 엄마 병원에서 그리고 이름지어 엄마에게 선물하다

'무지개 빠방'. 윤홍건이 엄마 병원에서 그리고 이름지어 엄마에게 선물하다 ⓒ 이인향

동네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기로 결정하자 가장 급한 것이 한글. 나는 참 나쁜 엄마였는지 그때까지 아이가 책을 읽어 달라면 "그거 많이 읽어 봤자 골치만 아프다"하곤 내 필요한 책읽기에 바빴다. 아이방엔 그 흔한 '가나다' 그림표도 한번 붙여준 적이 없었다.

어린이집에서의 경험으로 친구들, 가족들 이름 아는 것이 윤홍건이 알고 있는 유일한 한글이었다.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날 퇴근 후에 부랴부랴 색마분지를 사서 한글 카드를 만들었다. 딴에는 이제 시작하는 글자 공부를 게임처럼 재미있게 해 보자는 엄마로서의 배려를 담은 작품이었는데 아이는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몸을 비비 꼬았다.

"너 '큰학교' 가고 싶댔지? 저기 '큰학교' 가려면 책 다 읽을 수 있어야 된데."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그럼 '작은학교' 가면 이거 안해도 돼?"
"(머뭇머뭇) 글쎄. 거기선 처음에 글자부터 가르쳐 주니까 안해도 된다는데..."
"엄마, 그럼 나 '작은학교' 갈래."
"(허걱)……."


윤홍건이 말하는 '큰학교'는 동네의 초등학교, '작은학교'는 대안학교이다. 윤홍건의 공동육아 친구들은 다양한 세상을 향해 출발한다. 그냥 이제는 21세기 우리 사회의 다수가 선택한 교육 대열로 합류한 아이, 대안학교로 간 아이, 공립학교 중 열린교육을 지향한다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남한산성 골짜기로 이사를 간 아이, 윤홍건처럼 어정쩡하게 오전엔 공립학교에서 경쟁을 지향하는 교육을 받고 오후엔 (공동육아처럼 부모가 운영하는 방식의) 방과후 학교에서 더불어 사는 삶을 교육 받게 되는 아이.

이 모든 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선택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4년 남짓 몸담았던 공동육아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얻은 공동육아의, 그리고 삶의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당사자인 아이의 의사 결정이 없는 상태에서 섣부르게 소수의 길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다. 맞벌이인 현실에서 공동육아도 겨우 버텨온 주제에 대안학교가 요구하는 부모의 희생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대안학교는 '윤홍건이 선택하고 감당할 수 있을 때'로 미뤘다.

그리고 윤홍건은 아직도 한글을 온전히 깨치지 못했다. 아직도 책을 펼치고 10분이면 몸을 비비 꼰다. 잘 모르는 글자는 무작정 '얼'이라고 한다. 혼자서 책 한 권도 다 읽지 못하는 아이를 보면 주위에선 '간 큰 엄마'라고 어쩌려고 그렇게 태평이냐고 핀잔들이다. 영어?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라.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게 정상 아닌가! 내 오빠는 제 이름도 못 쓰는 일자무식으로 초등학생이 되었고, 나는 그나마 오빠가 있어서 내 이름 석자 쓰고 자랑스럽게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컸다. 지금까지 지켜본 바로는 윤홍건은 그냥 보통 아이이고, 제7차 교육과정에 의한 초등학교 1학년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면, 잘 읽고 잘 쓰고 그밖의 다른 것들도 멀쩡히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전제가 있다. 학교에서 초등학교 1학년 교육과정대로 교육을 시켜 준다는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초등, 중등학교를 의무교육 시켜주는 좋은 나라라 대안학교에 보내면 벌금 물리더라. 검정고시를 쳐야 학력인증 받고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도 있더라.

이러저러한 나름의 사정으로 사교육비 줄인다는 국가정책에 따른 교육방침만 믿고 한글도 채 못 끝낸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우리 가족을 불안에 떨게 하는 흉흉한 소문들이 정말로 극성스러운 '일부 부모'들이 만들어낸 근거 없는 괴담인지, 아니면 오롯이 사실이어서 우리가 국가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인지는 이제부터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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