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비서관의 퇴진과 '군기반장' 이호철의 복귀

[정치 톺아보기 81] 노무현 집권 3년차 변화의 코드① - 독립

등록 2005.02.28 16:37수정 2005.03.03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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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줄곧 청와대에서 근무해온 김형욱(42) 청와대 사회조정3비서관이 지난 2월 28일 7년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반면 '청와대 386' 참모들의 맏형으로 '군기반장' 격인 이호철(47) 전 민정1비서관은 지난해 4월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사퇴한지 약 10개월만에 청와대 혁신관리실의 제도개선비서관으로 복귀했다.

공교롭게도 김대중 정부 말기에 시민사회비서관이었던 김씨는 이 정부에서 제도개선비서관으로 업무를 시작했고, 참여정부 출범 당시 민정1비서관으로 업무를 시작한 이씨는 청와대를 나갔다가 제도개선비서관으로 복귀했다.

'일개' 비서관의 인사이지만 그 '함의'는 작지 않다. 노무현 정부 출범 3년차를 맞이해 이와 같은 인사구도에서 엿보이는 변화의 코드는 국민의 정부로부터의 '독립'이다.

떠나는 DJ 비서관, 돌아온 노무현 핵심참모

a 2월 28일 7년만에 청와대를 떠난 김형욱 전 비서관.

2월 28일 7년만에 청와대를 떠난 김형욱 전 비서관. ⓒ 오마이뉴스 김당

김형욱 비서관은 지난 2003년 2월 참여정부 출범 당시 40개 비서관 중에서 김대중 정부 청와대 현직 비서관 중에서 잔류한 단 2명 중 한명이다. 그 당시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청와대 참모진을 구성하면서 윤석중 해외언론비서관은 같은 자리에 잔류시켰고, 김형욱 시민사회비서관은 제도개선비서관으로 옮겨 잔류시켰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과 국민의 정부를 상징하는 비서관들이다. 윤 비서관은 김 대통령이 강조한 국민의 정부의 해외 국정홍보 업무만을 도맡아서 했으며, 김 비서관은 김 대통령 비서 출신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과 시민사회의 가교역할을 해왔다.

김대중 대통령에서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로 이어진 민주당 정부의 출범에 따라 당시 청와대 내에서는 특히 민주당 출신 비서관·행정관들을 중심으로 청와대 잔류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권이 여당에서 야당으로 교체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폭 물갈이할 경우 당장 실무면에서 청와대 업무에 차질이 초래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될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당선자 캠프에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구호에 입각해 김대중 정부 청와대 비서관 전원을 교체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다만 해외언론비서관의 경우 윤 비서관을 대신할 후임자가 마땅치 않다는 판단에 따라, 김형욱 비서관의 경우 그의 출신·경력이 참여정부 인사코드와 부합된다는 점이 고려되어 재임용됐다.

사의 표명 한 달 넘게 후임자를 정하지 못한 해외언론비서관


김 비서관은 고려대 정경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노동운동을 하다가 지난 95년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비서로 정치권에 들어왔으며,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서 일하게 됐다. 국정상황실 행정관으로 청와대 근무를 시작한 김 비서관은 2002년 시민사회비서관으로 승진했으며,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는 제도개선, 참여기획, 사회조정3비서관(보건·복지 및 노동 담당)을 지내며 노동계 및 시민단체와의 가교 역할을 맡아왔다.

김 비서관은 2월 28일자로 7년만에 청와대를 떠나지만, 당분간은 서울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의 고령화미래사회위원회에 출근해 전문위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청와대는 떠났지만 청와대에서 그가 담당했던 복지와 노동 분야 서비스의 수요·공급을 네트워킹하는 작업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매뉴얼을 만들어 인수인계를 마무리할 때까지 당분간 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윤석중 전 해외언론비서관의 경우 이미 지난 연말에 사의를 표명하고 1월말부터 후임자를 찾고 있지만 아직 후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는 지난 1월 참여정부 출범 당시 청와대 비서관급 이상 공직자 중 유일하게 같은 자리에 잔류했던 윤씨의 사의표명을 계기로 해외언론비서관을 공모했다. 당시 청와대는 "이번 비서관 공모는 청와대에서 처음 실시하는 것으로, 유능한 인재를 적극 발굴하고 보다 투명하고 공정한 인사 혁신의 한 방안으로 추진하게 됐다"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공개모집에 응한 21명의 후보자 가운데 적임자를 구하지 못해 윤 비서관의 후임자를 공모절차에 따라 결정하려던 '야심찬' 계획은 한 달만에 무산되었다. 물론 그 때문에 해외언론비서관은 지금 한달 넘게 후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청와대'의 '애프터 서비스' 유효기간 만료

a 지난해 4월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사퇴한지 약 10개월만에 청와대 혁신관리실의 제도개선비서관으로 복귀한 이호철 비서관.

지난해 4월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사퇴한지 약 10개월만에 청와대 혁신관리실의 제도개선비서관으로 복귀한 이호철 비서관.

후임자를 구했건 구하지 못했건, 두 연임 비서관의 사직은 노무현 정부 집권 3년차를 맞이해 김대중 대통령비서실과의 가교 역할을 했던 '사람과 일'(서비스)에 대한 '인수인계'의 종료를 의미한다. 즉, 이는 김대중 청와대의 '애프터 서비스'의 유효기간이 만료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노무현 청와대의 '홀로 서기'를 의미한다. 그 홀로 서기의 중심에 이호철 비서관의 복귀가 자리잡고 있다.

이호철 비서관은 '청와대 386' 세대의 맏형이자 이른바 '부산파'를 대표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참모이다.

청와대는 이호철씨를 제도개선비서관으로 인선한 배경과 관련해 "이 자리는 원래 현장의 구체적인 목소리나 요구사항을 정책으로 종합해 제도개선으로 연결하는 국민참여수석실 산하의 핵심업무직이었다"면서 "따라서 노 대통령이 이 업무를 역점적으로 중점 추진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런 배경설명은 정직한 표현은 아니다. 물론 청와대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자리가 없겠지만, '그렇게 중요한' 자리라면 처음부터 핵심 참모들이 맡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중요한' 자리라면 그렇게 상당기간 공석인 채로 민원제안비서관이 겸직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자리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중요한 사람이 그 자리에 갔기에 중요해졌다'는 표현이 더 정직해 보인다.

노무현 정부는 2년 전에 출범했지만 오늘 집권 3년차를 맞이해 지난 2년 전부터 시작된 정권 인수인계를 마치고 비로소 노무현 대통령비서실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것은 전 정부가 보증한 '애프터 서비스'의 종료이자 새 정부의 명실상부한 책임정치의 시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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