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의 상실감과 위기의식이 낳은 한 '자유 지성'의 노추

[분석] 한승조 교수의 일본 극우보수 월간지 <正論> 기고문

등록 2005.03.04 10:35수정 2005.03.0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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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월1일 제86회 3·1절 기념사에서 "과거의 진실을 규명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하고 그리고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하고, 연후에 화해해야 한다"면서 "그것이 전 세계가 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보편적인 방식이다"고 사죄와 배상을 주장해 일본 조야(朝野)를 '경악'케 했다.

이와 관련 일부에서 '한·일 청구권 재협상 가능성까지 열어놓은 것 아니냐'는 성급한 관측까지 제기되자 청와대는 서둘러 "과거사 청산의 보편적인 방식을 재론한 것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리고 이어 "노 대통령은 이번 연설은 과거 청산의 보편적 방식을 일본의 지성에 호소한 것에 의의가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북한이 주장하는 것은 무조건 남한이 추종해서는 안되는 '악(惡)의 근원'?

실제로 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의 지성에 다시 한번 호소한다"면서 "진실한 자기반성의 토대 위에서 한·일간의 감정적 앙금을 걷어내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 앞장서 주어야 한다"고 일본의 지성인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한·일 과거사 문제와 관련, 비교적 한국에 우호적인 <아사히신문>마저도 비판적인 논조로 노 대통령 연설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을 보면, 노 대통령의 '호소'에 대한 일본 지성인들의 반응은 냉담한 듯하다. 우파 신문인 <요미우리신문>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노 대통령의 사죄·배상 요구에 대해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며 불쾌감마저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도 그럴 것이 '자유주의 지성인'을 자처하는 한승조(고려대 정외과) 명예교수가 일본의 극우적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월간 <正論>에 기고한 글은 자국 대통령의 '호소'를 무색케 할 만큼 자기비하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한 교수는 우선 기고문에서 이른바 '친일반민족행위'를 둘러싼 네 가지 견해와 입장을 정리하면서 "친일파문제에 대해서는 첫째, 친일협력행위를 반민족행위로서 엄하게 단죄하려는 공산주의자의 입장"과 "둘째, 기본적인 견해는 같으나 친일행위나 처벌대상자의 범위를 다소 좁혀 완화하려는 입장"이 있다고 전제하고 "이 두 가지 입장은 친일파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좌파의 견해이다"고 단정했다.


한 교수가 말한 세 번째와 네 번째 입장은 친일행위의 '불가피성'과 '불필요성'을 근거로 단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한 교수는 엄하게 하든 완화해 하든 친일협력행위에 대한 단죄는 좌파의 견해이고, 친일협력의 불가피성과 시간의 경과를 들어 단죄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우파의 견해라는 이분법의 논리를 내세운다.

그래서 이분법의 논리로 충만한 한 교수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고 가장 탄압한 것도 공산주의자였다"고 전제하고 "그야말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종전후 일제청산과 친일파 숙청에 시종일관, 적극성을 보인 것이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라면서 "그 노선을 추종하는 것이 한국의 '386세대'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의 저변에는 친일청산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노선을 추종하는 것이라는 흑백논리가 깔려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것은 그것의 가치판단을 떠나서 남한이 추종하거나 추수(追隨)해서는 안되는 '악(惡)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한나라당 '지도'해 정권탈환 위한 '구국' 열정으로 충만한 위기의식의 발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교수의 논리는 "노무현 정권이 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을 성립시킨 이유는 차기 대선후보로 예상되는 박근혜 한나라당 총재의 정치적인 발판을 붕괴시키는 것과 보수세력을 모두 친일파로 추궁해 정치적으로 무능화시켜 좌파세력 장기집권을 노린 것"이라는 파당적 궤변으로 자연스레 귀결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을 끄는 것은 복잡한 사물의 이치를 단순한 이분법과 흑백논리로 간단히 재단해 버리는 이런 대목이다.

"친일파를 단죄해 민족정기가 선 사회는 북한이며 그렇지 못하고 혼탁해 발전하지 못한 사회가 한국이라고 공산주의자나 좌파는 일상적으로 주장해왔다. 하지만 그렇다면 북한이 결과적으로 한국보다도 크게 성장, 발전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결과가 정반대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엉터리의 기본전제를 토대로 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정기가 선 사회가 반드시 경제적으로 성장·발전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물론, 민족정기를 미국에 팔아먹은 월남은 패망했으며 버틴 월맹은 승리를 거둔 베트남처럼 그런 경우가 없지는 않다.

또 설령 '그런 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경제적으로 덜 성장·발전하더라도 민족정기를 품고 살겠다고 합의하면 그게 '법'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친일파 단죄와 경제성장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데도 한 교수는 "결과가 정반대이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엉터리의 기본전제를 토대로 하고 있는가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얼토당토 않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친일행위자를 무조건으로 모두 반민족행위자라고 하는 좌파의 논리는 당시의 역사적, 시대적, 국제정치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역사인식이며 이와 같은 무리한 주장은 그들 특유의 정치적인 사심(邪心)에서 나온 것이며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한 교수의 논리적 비약은 무기력과 도탄에 빠진 한나라당을 하루빨리 '지도'해 정권을 탈환하려는 '구국'의 열정으로 충만한 '자유시민연대 대표'의 위기의식의 발로인 셈이다.

한승조 교수와 심재철 의원의 '판박이 논리', 과거청산∝경제성장?

그리고 이와 같은 한 교수의 논리적 비약은 원로 사학자인 강만길 상지대 총장(광복 6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 공동위원장)의 발언을 비판한 심재철 한나라당 의원의 '과거청산은 경제성장과 비례한다'는 식의 인식과 '판박이'처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다음은 심 의원이 지난 2월 18일 한나라당 주요당직자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강만길 공동위원장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일본군이 정권을 잡아 과거 청산이 안됐다라고 했는데 뒤집어 말하자면 독립군 활동을 했던 사람이 정권을 잡아서 과거 청산을 잘했다는 북한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 반문하고 싶다.

또 강만길 공동위원장 말씀 중에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서 역사적인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지금 정통성 수립을 위해서 경제 건설에 급급했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뒤집어서 보자면 정통성도 바로 되고 자주 노선을 외쳤다는 북한은 경제 건설에 급급하지 않아서 오늘날 국민의 삶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런 점들이 무조건 부정한다고 역사는 아니다."


얼핏 보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또한 앞에서처럼 차원이 다른 문제를 등치·대비시킨 데서 발생한 얼토당토 않는 궤변이다. 거기에 '함정'이 있다. '일본군이 정권을 잡아 과거 청산이 안됐다'는 것과 '북한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뭐든지 뒤집어볼 수는 있겠지만 뒤집어본다고 다 모두 다 논리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한 교수의 '선악설'(자유주의는 선, 공산주의는 악)은 오히려 민족 내부를 재단한 이분법과 흑백논리에서 민족 외부와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재단으로까지 그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 교수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열강과의 관계를 잘 이해하면 한국이 당시의 러시아에 점거·병탄(倂呑)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고 전제하고 "역사적 사실을 보면 한반도가 러시아에 의해 점거되지 않고 일본에 병합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면서 "오히려 근대화가 촉진되어, 잃은 것에 못지 않게 얻은 것이 많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된 1910년 한일합방 당시와, 한반도 북쪽에 소련이 진주해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1945년 해방 당시는 비교할 차원의 다른 문제이다. 또 역사에서 가정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파 우위론'과 '좌파 열등론' 입각해 민족성까지 해부한 한 교수의 '선악설'

그런데도 한 교수는 "공산주의나 좌경사상은 현실부정과 증오, 원한에 기인한 사상이며, 그 역사왜곡이 사람의 마음을 비뚤게 해 질을 저하시킨다"면서 "지금 좌익사상이 한국인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저질화시키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어 한 교수는 "훌륭한 사람은 좋든 나쁘든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오직 오늘 해야 할 일, 그리고 장래를 생각해 준비하는 데에 전력투구한다"면서 "역으로 제대로 되지 못한 사람은 지난 일에 미련이나 후회가 있기 때문에 과거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시간과 정열을 낭비한다"고 인간의 심성까지 재단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교수의 '선악설'은 '우파 우위론'과 '좌파 열등론'에 입각해 우리의 민족성까지 해부하는 단계에까지 이른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 우열론'(아리안족 우위론, 유태인 열등론)을 연상케 하고 일본 군국주의의 '대동아공영론'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교수는 거리낌없이 '박정희 청산'이건 '친일청산'이건, 그 상대가 '국내'건 '외국'(일본)이건을 막론하고 과거사 집착은 '제대로 되지 못한 사람'이고 '자립된 자주국가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과거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기) 때문에 오늘의 숙제를 방치하거나 소홀히 하게 되며, 한국은 아직도 자립된 자주국가가 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현재 추진하려고 하는 과거사 진상규명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집념에서 나온 좌파세력의 전략적인 산물이다."

이처럼 한 교수의 일제 식민지배 긍정은 군사독재에 대한 긍정으로 옮겨가고, 이는 다시 반공·반북의 냉전논리와 연결된다. 그리고 한 교수가 스스로 밝히듯이 친일행위와 군사독재에 대한 긍정적 태도의 밑바탕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가 깔려있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의 친일청산 노선을 '추종'하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증오이기도 하다.

즉, 한 교수의 식민지배 긍정 및 친일파 옹호는 반공·반북으로 귀결되고, 이는 다시 자신들이 적대하는 세력을 용공좌파로 규정하는 식으로 환류된다. 결국 한 교수의 일본 극우 월간지 기고로 불거진 이번 파문은 한나라당을 '지도'하려는 대한민국 보수우익의 이론적 기반이 얼마나 천박하고 허술한지를 잘 보여준다.

'자유주의 지성'을 자처하는 우리나라 보수우익의 수준이 이 정도이다. 진보가 주도하는 변화와 혁신의 물결 속에서 논리도 명분도 상실한 채 허우적거리는 한 자유주의자의 노추(老醜)를 보는 듯해서 오히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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