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륵비'입니다. 비문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551) 때 당대의 악성(樂聖)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탄주하면서 음악을 연마하던 곳이다..."권성권
그가 어지러운 가야국을 버리고 신라에 왔을 때, 신라 진흥왕은 먹을거리와 잠잘 곳을 그에게 베풀어주었습니다. 또 마음껏 연주할 수 있도록 충주 땅에 살 곳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진흥왕은 그에게 신라 사람 가운데 젊은이 세 사람, 법지(法知), 계고(階古), 만덕(萬德)을 보내 가야금을 전수 받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우륵이 그들과 함께 고운 가야금을 연주(彈奏)하니,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연주 소리를 들었고, 서서히 그곳 둘레에 부락이 생기면서 사람들은 그곳 이름을 '탄금대'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탄금대는 우륵과 함께 태어난 곳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듯 싶습니다. 우륵이 없었다면 탄금대라는 이름난 곳도 가히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 김훈도 <현의 노래>에서 그 모습들을 더욱 살아있게 그려내려고 무척이나 애썼던 것 같습니다.
"악기는 인간의 몸의 연장(延長)이었으며 꿈의 도구였다. 악기는 스스로 자족한 세계 안에서 꿈꾸는 듯 했으나, 악기는 몸이 지닌 결핍의 보완물로서 불우해보였다.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조선조로 넘어오면서 이 탄금대는 가야금을 연주하는 장소가 아니라 치열한 싸움터로 변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당시 도순변사 신립(申砬) 장군이 8000명을 이끌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을 맞서 치열하게 싸운 전적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왜군들은 총포를 쏘아대며 우리 군을 위협하며 쳐들어 왔습니다. 그 적들을 맞이해 우리 군은 화살과 몸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신립 장군과 군사 8000명은 끝내 패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탄금대 언덕 아래에 있는 '열두대'라는 절벽이 묵묵히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당시 신립 장군은 적을 향해 수많은 화살을 쐈던 까닭에 손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장군은 무디어진 손에 감각을 되찾기 위해 그때마다 절벽 아래에 있는 강물에 물을 담갔는데, 그렇게 내려갔다 올라 온 게 무려 열 두 번이나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