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명창의 힘 없는 몸부림

[인터뷰]낙안읍성 소리꾼 이재영씨

등록 2005.03.07 00:05수정 2005.03.07 10:0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낙안읍성내 후미진 곳에 국악명창 무성 이재영(45)씨가 살고 있다. 조통달 선생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국립창극단에서 활약한 촉망받는 소리꾼이요, 한때 남원시립창극단에서 이도령 역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가 지금은 있는 듯 없는 듯 낙안읍성 구석진 곳에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a 따뜻해진 날씨덕에 마당에 자리를 펴고 고수와 함께 군목 질하던 그가 갑자기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면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따뜻해진 날씨덕에 마당에 자리를 펴고 고수와 함께 군목 질하던 그가 갑자기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면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 서정일

모처럼 따뜻해진 날씨덕에 마당에 돗자리를 펴고 10여년을 함께한 고수 김승구(51)씨의 장단에 맞춰 목청을 돋우지만, 어쩐지 그 소리에 쓸쓸함이 배여 있다. 힘주어 펼친 부채도 질끈맨 갓도 이씨가 내지르는 한탄 섞인 가락을 달래주지는 못한다.

"어릴 적 아버님의 쑥대머리 가락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상청 하청 이리저리 목청을 돋우더니 쑥대머리를 부르기 시작한다. 낙안읍성이 떠나가라 토해내는 그의 가락에 사연을 모르는 관광객들은 그저 우리가락의 울림에 귀가 솔깃하여 하나 둘 몰려든다.

a 아버님을 그리워함인지 이재영씨는 쑥대머리 가락으로 연습을 시작한다. 펼쳐진 부챗살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가락에서 우리음악에 대한 사랑과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흠뻑 묻어 나온다

아버님을 그리워함인지 이재영씨는 쑥대머리 가락으로 연습을 시작한다. 펼쳐진 부챗살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가락에서 우리음악에 대한 사랑과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흠뻑 묻어 나온다 ⓒ 서정일

천부적인 소리꾼의 기질을 타고난 그에게 전국노래자랑은 큰 계기가 된다. 84년 쑥대머리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창극과 인연을 맺어 활동하게 되는데, 아쉽게도 득음이 되지 않아 자주 목이 쉬어 도중하차할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고 93년 고향인 고흥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그길로 무작정 산에 움막을 치고 지내길 3년, 피를 토하며 소리를 지르던 어느 겨울, 남원창극단에서 이도령 역을 맡을 사람으로 그를 주목하게 된다.

그 후 봄이면 춘향제에 가을이면 흥부제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무대에 섰지만, 소리에 대한 배고픔으로 그는 늘 외로웠고 채워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찾아 한참을 방황했다. 그러다가 또다시 훌훌 털고 소리의 고장 벌교를 찾게 된다.


a 고수인 김승구씨, 연습이든 무대에 나서든 서로 복장을 매만져주는 10년지기 소중한 우리가락 지인이다. 이재영씨의 흐트러진 머리를 김승구씨가 다듬어주고 있다

고수인 김승구씨, 연습이든 무대에 나서든 서로 복장을 매만져주는 10년지기 소중한 우리가락 지인이다. 이재영씨의 흐트러진 머리를 김승구씨가 다듬어주고 있다 ⓒ 서정일

그가 벌교 땅에 내려와 후학을 위해 괴나리봇짐을 풀었던 곳은 다름 아닌 '벌교국악원'. 우리 가락의 소중함을 모르고, 우리 가락을 맛보기로 선보이는 것조차 인색한 학교 교육이 안타까워 발 벗고 나선 것. 그리고 자신은 춘향전·흥부전·심청전·수궁가·적벽가를 완창하는 오바탕을 준비하기 위해 낙안읍성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우리 가락, 우리 것을 소중하게 생각지 않는 듯 합니다"라고 말하는 소리꾼 이재영씨는 문화의 고장인 남도에서 그것도 옛 것을 소중히 한다는 낙안읍성조차 가락에 관한 애정이 크지 않다고 안타까워한다.


"오태석씨 아시죠?"

그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야금병창의 달인 '오태석'씨를 떠올린다. 낙안이 배출한 걸출한 예술인인데 생가도 방치한 채 그를 기리는 비나 안내문조차 없다는 것이다.

a 갓을 벗어 던지고 부채를 펼치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춘향가를 부르기 시작하는 이재영씨

갓을 벗어 던지고 부채를 펼치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고수의 북소리에 맞춰 춘향가를 부르기 시작하는 이재영씨 ⓒ 서정일

그러더니 갑자기 갓을 벗어 던지고 마당에 철퍼덕 앉아 또다시 소리를 해댄다. 한참을 그렇게 또 우리 가락을 쏟아 내더니 잠시 멈추고 기자에게 의미 있는 말을 던진다.

"고수 한 명이 명창 두 명을 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리고 다시금 입을 연 그에게서 나온 말은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 낙안읍성이 고수라면 명창 수백 명 정도는 길러야 옳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한 명도 제대로 기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덧붙이는 글 | 관심갖고 함께 만들어가자 낙안읍성
낙안읍성 홈페이지:www.nagan.or.kr

덧붙이는 글 관심갖고 함께 만들어가자 낙안읍성
낙안읍성 홈페이지:www.nagan.or.kr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4. 4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5. 5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