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예방을 위한 어머니의 독서

모르고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등록 2005.03.09 00:36수정 2007.06.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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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어머니가 읽으실 책들

어머니가 읽으실 책들 ⓒ 성락


"제발 치매는 걸리지 말아야 할 텐데…."


자주 만나는 친구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린 후, 그 가족들이 겪는 애로를 전해들은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이 말을 되뇌셨다. 혹시 닥칠지도 모를 치매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자식들이 겪을 고통에 대한 걱정이 얼굴 표정에 그대로 반영된다.

"에이, 쓸데없는 말씀을 다 하셔. 괜한 걱정이 많으면 그게 더 위험한 거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서둘러 화제를 돌리지만, 나 역시 '혹시나'하는 마음 한구석의 우려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혈압 약을 대놓고 살아야 하는 어머니, 요즘 들어 금방 전 일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실 때면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하기도 한다. 어머니의 지나온 삶을 잘 아는 나로서는 사실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어머니는 도회지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하셨다. 그러나 성질 급하고 잔정 없는 아버지를 만나 함께 하신 50년 세월은 험하고 고달팠다. 더구나 가까이 이웃도 없는 외딴 산골에서의 '징역살이'는 늘 밖으로만 도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로 채워진 세월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을 둘이나 앞세우셨다. 아니, 하나는 앞세운 것보다도 더 아픈 행방불명이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온전치 못한 자식의 생사도 모르는 채 30년이나 버텨 오신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 입장에서 볼 때 자상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비정한 남편, 고된 밭일로라도 아픔을 잊을라치면 소위 '사흘들이'로 가해지던 폭력, 남은 자식들만 아니었다면 스스로 수 백 번은 세상을 버렸을 질긴 삶을 이어오셨다.


그 원통함과 억울함이 뭉쳐져 화를 생산하고, 그 바람에 신경성 위장염과 식도염까지 달고 사시는 어머니에게 치매를 스스로 물리칠만한 힘이 과연 남아 있을까?

a 어머니의 독서 삼매경

어머니의 독서 삼매경 ⓒ 성락

어머니는 아프고 고단한 세월을 노래로 버텨오셨다. 혼자 밭일이나 빨래를 하실 때에는 늘 빼어난 음성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 속에서 삶을 헤쳐 가는 지혜를 얻고 작은 마음의 평정이라도 찾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머니의 노래가 사라졌다.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또 여쭙는 것도 쑥스러울 듯 싶어 그냥 궁금증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치매를 걱정하시는 어머니를 본 후부터 사라져버린 노래의 의미가 마음에 걸린다. 어떤 징조가 아닐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도 든다. 적어도 어머니에게 있어서 노래가 차지했던 비중이야말로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사이 나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고 분석하는 버릇이 생겼다.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신 것은 느껴진다. 며칠 전 하셨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일도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꼭 그것이 치매의 사전증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젊은 사람들에게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난 초겨울, 어머니는 불쑥 이런 말을 하셨다. 아버지와 나, 동생과의 간단치 않은 불화와 그 와중에서 두 배, 세 배의 마음고생을 겪는 어머니가 툭 던진 그 한마디에 적잖이 놀랐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지. 그냥 차를 타고 어디로 하염없이 가 봤으면 좋겠다."

여행이라도 한 번 보내드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딱히 동행할 수 있는 친구 분이 가까이 있지도 않고, 마음 안 맞는 아버지와의 여행은 오히려 스트레스만 가중될 것 같아 그렇게 넘기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이웃해 있는 빈 기도원의 물건을 정리하게 되었다. 참고로 그 기도원은 문을 닫았고 건물을 일시적으로 우리가 사용하고 있었다.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물건들도 버리고 갔는데, 어머니는 보자기에 가득 싸여져 있는 책들을 한 아름씩 집으로 가지고 왔다. 그 날부터 어머니의 독서가 시작된 것이다.

그 때가 초겨울이었으니 벌써 세 달 여 독서에 빠져 계시는 것이다. 세끼 식사를 챙기시고 빨래를 하는 시간 외에는 오직 책을 읽는 데에 몰두하신다. 그렇게 한 번 가져온 책을 모두 읽으면 다시 기도원에 갖다 놓고 다른 책들을 골라 오곤 하신다. 아마 열댓 권은 족히 독파하셨을 듯싶다.

기도원에 있던 책인지라 주로 종교에 관련된 책들이 많으나 개의치 않으시는 눈치다. 읽을만 하다고 하신다. 가져다 놓으신 책들을 살펴보니 <앵무새 죽이기> <영원한 제국> <무서운 아이들> <미완의 사랑> <생의 이면> <길은 직선이다> 등 소설 또는 수필집이 대부분이다.

a 다양한 성격의 책들

다양한 성격의 책들 ⓒ 성락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거실에서 독서에 빠져 계시는 어머니를 골방에서 살며시 바라보았다. 참 평화로운 얼굴이시다. 더할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진다. 눈치 채지 못하게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평생 벗 삼았던 노래 대신 독서라는 새 친구를 사귀신 어머니의 선택은 일단 성공한 듯싶다.

그리고 오늘 아주 기쁜 사실을 알게 됐다. 인터넷으로 치매 예방법을 검색하다 보니 독서가 매우 적절한 예방법으로 여러 곳에 소개돼 있다. '(책 읽기로)새로운 정보를 항상 접하고,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뇌 운동에 도움이 된다',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뇌 회전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등이다.

어머니가 치매예방법으로서 독서를 시작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의식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책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책 읽기'를 시작하셨고, 결과적으로 치매예방법을 스스로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 사실도 모르고 계신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다행한 일인가.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 입도 뻥긋 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부담 없이 지속되는 어머니의 치매 예방법이 훨씬 큰 효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무한한 삶의 지혜를 지니고 계신 어머니가 오늘 무척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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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지키며 각종 단체에서 닥치는대로 일하는 지역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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