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상공에 나타난 미국의 B-29 폭격기 편대
3월 10일은 제2차 세계대전사에 가장 잔혹한 사건으로 기록될 '도쿄 대공습'의 60주기다. 미군이 투하한 소이탄에 희생된 사망자 수는 이날 하루 무려 10만여명에 달한다. 당시 12살이던 일본인 사오토메 가츠모토씨는 그날 밤 도쿄 하늘을 뒤덮던 B-29 폭격기 편대의 굉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공습이 시작된 것은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의 공습과는 전혀 달랐어요. 폭격기 편대가 하도 낮게 날아 폭격기 밑에 반사되는 화염을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폭격기들이 투하한 폭탄은 소이탄이었어요. 사방천지에서 불꽃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불을 끄려고 했지만 불길이 워낙 거센데다 강한 북풍까지 불어와 화염이 더욱 거세게 번졌어요. 여기저기서 몸에 불이 붙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몸을 비틀고 있었습니다."
꼭 60년 전인 1945년 3월 10일, 미국은 그동안 지켜온 대 민간인 교전수칙을 저버리고 기어이 선을 넘고 말았다. 곤히 잠이 든 도쿄의 하늘에 334대의 B-29 폭격기를 보내 50만개의 소이탄을 투하한 것이다.
공습의 목표는 연약한 목재건물로 가득하고 수십만의 민간인들로 북적이는 대도시에 가능한 최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는 것이었다. 이날 공습을 지휘한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약 10만으로 추산되는 도쿄시민이 "불에 타 죽거나 뜨거운 강물에 데어 죽고 혹은 엄청난 열기에 산화해 죽어갔다". '도쿄 대공습'은 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최대규모의 대량학살이었고 그 참상의 정도가 1945년 2월 13일에 있은 독일 드레스덴 공습을 훨씬 능가했다.
그날 B-29 폭격기를 몰고 공습에 참여한 체스터 마샬은 그 파괴의 현장을 날았다. 그는 호주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약 1500미터 상공을 저공비행 했는데 인육이 타는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공습 이후 며칠간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속이 울렁거렸는지 몰라요. 저희 동료들은 '이게 무슨 냄새냐'며 서로 물었는데 약간 달콤한 냄새가 났지요. 그때 누군가 말했어요. '저게 바로 사람 살이 타는 냄새임에 틀림 없어'."
심지어 도쿄의 강물조차 이 지옥의 불꽃 속에서 피난처가 되지 못했다. 소이탄에는 젤리처럼 처리된 석유가 들어있었고 이는 20년 뒤 베트남전에서 사용된 네이팜탄의 원형이었다. 이 석유 젤리가 사방에 들러붙었고 심지어 강물조차 태워버렸다. "운하가 부글부글 끓었고 쇠도 녹아 내렸다. 건물과 사람들이 한꺼번에 화염에 휩싸였다." 존 다우너는 그의 책 <무자비한 전쟁>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살기 위해 강물과 운하로 뛰어든 사람들은 엄청난 열기 속에서 끓는 물에 삶아져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 날 당시 19살의 학생이었던 스즈키 이쿠코는 생존자를 찾아나섰다. "시내에 사시던 선생님 집을 찾아갔지만 폐허와 불에 탄 정원수 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동서남북조차 분간할 수 없었고,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나중에 선생님의 시신이 오모테산도에 모아 놓은 시체더미에서 발견됐다는 말을 들었지요." 오늘 날 오모테산도는 도쿄의 가장 번화가 중 한 곳이다.
이날 소이탄 공습으로 도쿄시내는 반경 약 15Km가 완전히 연소돼버렸고 약 1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이날의 대량파괴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개월에 걸쳐 반복된 공습작전의 서막이었고, 결국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탄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폭격기의 행렬이 끝이 날 즈음에는 이미 일본의 70개 도시가 폐허로 변했고 수백만 명의 민간인들이 생명을 잃은 뒤였다. 르메이 장군은 "만약 미국이 전쟁에서 패했다면 우린 십중팔구 전범으로 처벌 받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일부는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일본 역시 이런 보복을 받아도 될 만한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중국의 상해와 중경에 가한 무자비한 폭격, 남경의 대학살 이외에 아시아 전역에서 저지른 잔학행위가 바로 그것이라는 것.
호주의 전 외교관이자 아키타 대학의 부총장인 그레고리 클라크는 "당시 상황의 맥락을 떠나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린애였던 나는 일본이 공습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연합군이 일본 열도에 상륙해 지상전을 벌일 경우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을 두려워한 탓에 보복과 공포의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었다. 일본 후방에서는 이미 수백만의 민간인이 국토방위를 위해 조직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