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마에 타케오...고등학교 3학년으로 전화국에서 시간제로 일하고 있었던 그녀는 깨진 유리에 크게 다쳐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안드로 니키
한 때 군사 중심지였던 히로시마는 현재 백 만명의 인구를 자랑하고 나무들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밝은 분위기의 도시로 탈바꿈 했다. 박물관, 기념공원, 평화거리, 그리고 움푹 파인 유명한 원폭 돔 등 히로시마는 이제 그 상처를 드러내놓고 치료하고 있다.
작가 이안 부루마는 히로시마를 '일본 희생자들'의 중심지, '종교적 분위기를 지닌' 순례지라 부른 바 있다. "순교자는 있지만 신은 없다. 기도가 있고 인간의 몰락에 대한 신화도 있다." 히로시마 안내 책자에 나오는 말이다. "히로시마는 단순히 일본의 한 도시가 아니라, 세계 평화의 메카로 전세계에 인식되고 있다."
아시아인들에게 히로시마가 갖는 의미는 마치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현장)'가 중동의 아랍인들에게 갖는 의미와 비슷해서 '선택적 고통'의 상징이다.
일본인들은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는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이를 핑계로 교육, 역사책, 대중문화에서 일본이 다른 국가에 끼친 고통을 호도하고 있다.
1996년 히로시마 '평화의 돔'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때 미국과 중국은 이에 반대했다. 미국은 그 지명에 있어 "역사적 관점이 부족하다"고 반대했고, 중국은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돔을 잘못된 목적으로 사용할까" 우려된다고 했다.
히로시마는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우리는 희생자인 척 할 의도가 없습니다." 히로시마 평화박물관 관장 하타구치 미노루의 말이다. "그렇게 보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저지른 일을 이곳에서도 보여주고자 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피폭자들은 그런 비난이 남의 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야마오카는 말한다. "하와이, 한국, 중국, 오키나와, 미국에도 다녀왔고 일본이 저지른 짓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저는 일본과 미국 등 모든 나라의 정부를 비난합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히로시마로 와서 전쟁의 진짜 모습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 때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교육 받았지요. 폭탄이 떨어지는 그날까지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매일 그런 말을 들었지요. 나라를 위해 죽어라! 그게 교육이 갖는 무서운 힘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전쟁에 대해 좀 더 말해줄 것을 부탁하지요. 사람들이 잊을까 두렵습니다."
'리틀 보이'라고 명명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한 '에놀라 게이'호의 조종사였던 폴 티베츠는 올해 3월 또다시 후회가 없느냐는 질문을 들어야 했다. "천만에요, 달리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면 물론 다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5월 그의 동료인 전 국방장관(1960~68) 로버트 맥나마라는 일종의 사과를 했다. 그는 당시 미 공군의 전략 통제관으로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전에 단행된 64개 일본 도시에 대한 소이탄 공습계획을 입안한 바 있다.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임박한 종말'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를 가리켜 "너무나 이상해서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선전 포고에는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데 원폭으로 대량학살을 하기로 결정하는 마당에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20분 정도 상의하고는 끝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그러했다. … 지금처럼 원자폭탄의 사용가능성이 두려웠던 적이 없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원폭 사용을 주장했던 사람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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