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37회

등록 2005.03.11 07:37수정 2005.03.11 09:10
0
원고료로 응원
강명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담천의의 신형이 빛살처럼 강명에게로 쏘아졌다. 부상을 당했지만 잠시간의 시간을 번 것은 그에게 무척이나 다행한 일이었다. 상대는 강했고, 그것을 깨달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다. 그는 이제부터 승부를 보려했다. 그리고 그 승부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먼저 선수를 치는 일이다.

스으--휘리릭---!


담천의의 검이 일직선으로 쏘아가며 회오리 같은 검기를 일으켰다. 아니 그의 검을 자세히 볼 수 있다면 일직선으로 쏘아 가는 것이 아니라 원을 그리며 쏘아간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빨라 마치 일직선으로 쏘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 뿐이었다. 만약 그의 검경 내로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모조리 튕겨 나갈 것이고, 그 검을 막고자 하는 것은 모두 부서져 나갈 터였다. 더구나 그 검기의 회오리는 점차 넓어지기 시작하여 반원 일장 정도를 모두 날려 버릴 것 같았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군. 팔초.”

강명은 무섭게 회오리쳐 오는 검기 앞에서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하지만 내심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몸이 긴장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담천의의 공격은 기쾌하고 다양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자칫 막거나 물러섰다가는 저 검경에 휘말려 난도질당할 터였다.

그럼에도 강명의 검은 거침이 없었다. 그의 검이 수평으로 부챗살처럼 가르자 불꽃이 피어 오르며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신형이 허공에 솟구쳐 오르며 짓쳐오는 담천의를 향해 내리쳐 갔다. 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을 뜨기 힘든 백광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욱!)


엄청난 압력이 밀려들었고, 머리 속이 새하얗게 타 버리는 것 같았다. 천근거암이라도 가루로 만들 수 있는 자신의 검경이 그림자와 같은 암검에 중간 중간 끊겨 나가자 그것은 더 이상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 대신에 검과 검이 비껴가면서 느껴지는 충격과 자신의 가슴을 향해 파고드는 검광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파--악---!


가슴에 일자(一字)의 검흔이 새겨지고 그의 신형이 두세 걸음 밀리자 또 다시 강명의 입에서 냉혹한 음성이 고막을 찔렀다. 끝장을 보려는 것 같았다.

“제구초!”

세 개의 붉은 검날. 세 개의 새하얀 검광. 세 개의 자색 검기가 그의 전신을 노리며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환영과도 같았다. 불꽃이 타오르며 사라지는 유성과도 같이 그것은 불쑥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담천의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자신의 어디가 베어지고 있는지 느낄 사이도 없었다. 고통은 처음 당할 때 그 효과가 큰 것이다. 이미 고통 속에 빠져들고 그것이 지속되면 이미 고통으로서의 가치는 상실되는 것이다.

그는 검을 쳐내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검로를 따라, 그가 깨달았던 검로를 따라 그리고 자신도 알지 못했던 검로를 따라 쳐내고 있었다. 그가 지금 치명적인 결과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천중무극검의 끊임없는 변화 덕택이었다. 십팔로(十八路)의 기본 검로에 각각 마다 더해지는 팔방(八方)의 변화는 인간이 검을 들고 쳐낼 수 있는 극한의 변화였다. 하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숨을 내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또 다시 헤집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사력을 다해서 튕겨냈다.

치이익----

새빨갛게 달구어진 쇠가 찬물에 담겨지는 소리와 함께 역한 쇠 내음이 맡아졌다. 수십, 수 백번의 검을 쳐내도 파고드는 그의 검날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담천의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미 패배할 것이라는 절망감이 그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막고 있었다.

“자… 마지막이다. 제십초!”

마치 빛의 해일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거대한 폭풍이 휘감아 오는 것 같았다. 미증유(未曾有)의 거력(巨力) 앞에서 그는 잠시 정신을 잃은 것도 같았다. 막아낼 수 있는 어떠한 것도 머리 속에는 떠오르지 않았고,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워졌고, 마음마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존본능 뿐이었다.

의(意)는 허(虛)요, 심(心)은 공(空)이니…
사유(思惟)의 결과물인 의(意)가 사라지고(虛), 삶에 본래 있음에도(心)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니(空)… 모든 것이 있고 없음에는 그 한계가 없는 것.

검로(劍路) 역시 초식(招式)을 이루는 부분인 것, 그것에 따른 것은 어차피 격(格)이오, 체(體)다. 그것은 의(意)에서 생겨난다. 결국 배우고 익힌 형식(型式)일 뿐이다. 그것은 본래 올바른 길이지만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한계라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그것을 벗어나야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는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버려야 한다. 버릴 때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버려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그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경지는 처음 아무 것도 없는 그것과는 다르다. 버렸으되 이미 가득 차 있는 상태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나 이미 차 있는 상태. 없는 것 같지만 이미 넘칠 만큼 차 있는 상태에서 본래 격(格)과 형(型)을 벗어나 처해 있는 상황에 가장 적합한 무엇인가를 생성해 내는 것이다.

어떠한 생각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버린 후에 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뜨지 않음이 무에 다르랴. 눈을 감음은 현혹되지 않음이었으나 이미 그에게 닥쳐오는 것은 눈가림이 아니었다. 생각하고자 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느끼고자 해서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어디선가 누군가가 그에게 속삭이는 듯 느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검을 쳐들었다. 그리고 다가드는 거대한 폭풍의 중심을 향해 느릿하게 일검(一劍)을 찔러 넣었다. 그 일검은 기이하게도 해일처럼 밀려드는 빛의 광휘도, 거대한 푹풍과도 같은 검강(劍罡)의 폭죽도 헤집고 있었다.

쿠--콰---와----!

마치 산사태로 인하여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과 굉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으로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이었고, 그것은 그에게 법열(法悅)과도 같은 환희로 다가왔다. 그 깨달음은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검이 무언가 베었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의 검이 수 조각으로 부러져 나가며 검자루만 남았음을 느꼈다. 그래도 좋았다. 십초만에 처음으로 상대를 벤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대의 검은 자신의 목줄기를 긋고 있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했던가? 상대는 무언가 자신의 검으로 베게하고 자신의 목을 벤 것이다. 그는 이미 죽은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이미 목을 긋고 있는 검을 쳐낼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는 패했다. 그리고 죽는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듯 눈을 감으며 본능적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의 깨달음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들어 선 세계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림 역사를 되짚어 봐도 그가 오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인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 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해 깨달음을 얻고 있는 자가 그와 마주한 상대라면 그 깨달음 역시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툭--털썩---!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담천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얼굴로 자신의 잘려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려 가고 있었다. 목을 타고 흐르는 핏줄기를 느끼면서 그는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의 시야로 오른팔이 잘려진 강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그의 팔도 보였다. 그리고 환상처럼 강명의 주위에 두 인물이 나타난 것이 보였다. 그들 사형제 한사람에게 반드시 있는 두 명의 좌우산인(左右狻人)이었다.

“주공!… 어찌…?”

그들의 얼굴은 당황함과 당혹감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주군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의 주군에게 상처를 입힐 자는 이 세상에 없었다. 헌데 오른팔이 잘려진 것이다. 아니 잘라 준 것이다.

“이 일에 간섭하지 말고 물러나 있으라 했다.”

강명의 입에서 폭갈이 터졌다. 노한 모습이었다.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더욱 당황스러웠지만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등 뒤로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그들의 목을 치지 않는 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

강명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는 수하들이다. 그는 시선을 돌려 휘청거리고 있는 담천의를 바라보았다. 이미 강명의 얼굴은 처음 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산악과 같이 버티고 선 제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마지막 담천의가 쳐낸 검초. 아니 그것은 검초가 아니었다. 자신이 펼쳐낸 그 모든 것을 산산이 흩어 버리던 그것. 강명은 이미 그것이 무언지를 알았다. 이 아이가 벌써 그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은 이후에 자신과 다시 검을 맞대는 일이 있다면 아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는 깨달음만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다.

“이것으로 너에 대한 빚을 갚았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반드시 네 목을 치겠다.”

빚…? 무슨 빚을 말하는 것인가? 그는 왜 분명 내 목을 그을 수 있음에도 머리카락만 베고 만 것인가? 왜… 왜 나에게 팔 한쪽을 잘라 준 것인가? 그의 약속대로 십초만에 자신의 목숨을 취할 수 있음에도 취하지 않은 것인가? 육합난비를 펼쳐 보인 것은 자신의 부친과의 관계를 말하고자 함이었던가 아니면 그가 군문(軍門)에 있음을 나타낸 것인가?

그 앞에 담천의는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몸속의 모든 진기가 사라져 버린 듯 힘이 하나도 없었고 패했다는 사실보다는 목숨을 구걸 받았다는 굴욕감이 그를 더욱 참담하게 했다.
시야에 어둠이 찾아 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입속에서는 ‘당신은 누구요’라는 말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어찌 말하랴!

강명은 몸을 돌렸다. 이것이 마지막 십초를 펼치면서 그가 찾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는 담천의를 벨 수 없었다. 그 스스로 자신의 동생이라고 생각해 왔던 담천의를 어찌 자신의 손으로 벨 수 있을까? 아직 무언가 주지도 못했는데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을까? 아직 끌어안고 보듬어 주지 못했는데 그에게 어찌 상처를 줄 수 있을까? 그는 후회했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팔 하나로 던져 버렸다.

“떠나지 못한다면 강해져라. 그 누구도 너를 베지 못하도록 강해져라. 내가 너를 베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라.”

담천의가 보지는 못했지만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강명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사내로 태어나 자신이 사내라고 생각한 그 때로부터 처음 맺힌 눈물이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서일까? 떠나는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 고독해 보였다.

담천의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고개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리고 구걸 받은 목숨이었다. 그의 입에서 짐승의 신음 같은 괴음이 흘러 나왔다.

갑작스럽게 찾아 온 깨달음. 그것이 봉오리도 맺지 못한 채 패배라는 아픔 속으로 잠겨 버렸다. 그 세계에 맛볼 수 있는 자는 극히 선택된 인간이었다. 하지만 선택된 인간도 더 강한 자를 만나면 패한다. 그는… 패했다.
(제34장 完)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4. 4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5. 5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이러다 임오군란 일어나겠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