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색해,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아"

지난25일 부산방송에 출연했습니다

등록 2005.03.11 08:43수정 2005.03.1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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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갑자기 배가 출출하다. 나는 아내를 찾는다. 아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어, 컴퓨터에서 내 목소리가 나온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보름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2005년 2월 25일.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갑자기 덥다는 느낌이 든다. 양복저고리를 벗었지만 그래도 갑갑하다. 그래서 넥타이마저 풀어 헤친다.

나는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본다. 아침 9시38분이다. 이제 한연아 방송작가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이건 생방송이다. 한번 실수 하면 돌이킬 수 없다. 나는 인터뷰 원고를 들여다본다. 나는 ‘그래, 처음이 중요하다’란 생각에 첫 대목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는다.

“반갑습니다, 애청자 여러분. 창원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아빠 박희우입니다.”

나는 이 대목을 수백 번도 더 연습했다. 그런데도 매끄럽지 못하다. 이거 어떡한다… 목소리까지 떨린다. ‘그래, 방송국 인터뷰 요청을 거절해야 했어’란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는 15분을 버텨야 한다.


그때 전화벨이 울린다. 나는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방송작가다. 그는 광고가 나간 다음에 방송이 시작된다고 내게 말한다. 나는 수화기에 귀를 밀착시켰다. 광고시간은 채 30초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척 길게 느껴진다. 광고가 끝났다. 잔잔하게 음악이 흘러나온다. 진행자가 글을 낭송한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내용이다.

“오늘도 이혼부부는 많았습니다.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했습니다. 저는 출석 여부를 확인합니다. 순서대로 그들을 좌석에 앉힙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시원함과 섭섭함과 착잡함이 교차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그들만의 회한에 잠겨 있을까요.

그때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젊은 여자가 등에 업고 있는 아기를 다독거립니다. 아기의 아버지가 얼굴을 찡그립니다. 여자는 남자를 흘겨봅니다. 금방이라도 욕설을 주고받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여자에게 잠깐 복도에 나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 아기 말고도 부모를 따라온 아이가 몇 명 더 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아빠와 엄마의 손을 틀어쥐고 있습니다. 판사가 법정에 들어섭니다. 저는 법정대기실에 있는 이혼부부를 차례로 부릅니다”


글 낭송이 끝났다. 나는 그제야 알아차린다.

지난 1월 7일에 내가 <오마이뉴스>에 올린 ‘이번이 마지막 이혼이었으면’이란 글의 일부다. 다시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1년에 3천쌍을 이혼시킨 남자, 그 남자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부산방송 유정임의 ‘미시타임’, 금주의 화제인물을 소개하겠습니다. 인터넷신문인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계시는 창원지방법원 박희우님을 소개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박 기자님?”

“안녕하세요?”


처음부터 실수다. 지금까지 외웠던 인사말 대신 나는 ‘안녕하세요?’란 말밖에 하지를 못했다. 나는 하루 전날에 방송작가로부터 인터뷰원고를 받았다. 내게 질문할 내용은 10개였다. ‘이혼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 쓰게된 계기, 한국의 이혼율, 가장 이혼을 많이 하는 세대, 이혼사유, 가장 가슴 아팠던 이혼, 이혼을 줄일 수 있는 방법 등.

나는 답안을 작성했다. 원고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를 시작하니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등에서는 계속해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마에까지 땀방울이 맺혔다. 나는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직원들이 박수를 쳤다. 아주 자연스러웠다며 칭찬을 했다. 실수가 한군데도 없었다고 했다. 목소리도 아주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 그때 내 머리 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들어도 어색해.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아.”
“당신 목소리 맞아요. 매일 들어도 지겹지를 않아요. 우리 신랑 잘했어요, 호호!”


아내가 술상을 본다. 안주는 두부김치다. 컴퓨터에서는 계속해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결혼할 때는 서로 좋아서 했을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혼이라니요. 물론 이혼도 하나의 권리인 것만은 분명해요. 그런데 말이죠. 성인이라면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의무와 책임을 가져야하는 거예요. 부부가 이혼을 하면 자식들은 어떻게 됩니까. 아이들은 부모 밑에서 크는 게 제일 좋아요. 그걸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쉽게 이혼을 하지 못할 거예요. 어쨌든 이혼은 신중해야 한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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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맞는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저는 수필을 즐겨 씁니다. 가끔씩은 소설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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