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41회(7부 : 타는 목마름으로)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3.21 20:26수정 2005.03.22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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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기 화백 제공

동족상잔보다 더한 형제 상잔의 비극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얼른 쓰고 있던 마스크와 모자를 벗어 던졌다. 최루가스로 인해 눈이 아프고 쓰라려 내 눈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위대 맨 앞으로 나아가 돌과 화염병을 자제할 것을 외쳤다. 형도 그런 나를 보았는지 한참 넋이 빠진 사람처럼 있더니 동료들을 향해 최루탄 공격을 멈추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다 자유 그리워 하얀 꽃들을 수레에 싣고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늘의 이 고통 이 괴로움 한숨 섞인 미소로 지워버리고 하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우린 불나비 오- 자유여 오- 기쁨이여 오- 평등이여 오- 평화여 내 마음은 곧 터져 버릴 것 같은 활화산이여 뛰는 맥박도 뜨거운 피도 모두 터져 버릴 것 같애 친구야 가자가자 자유 찾으러 다행히도 난 아직 젊은이라네 가시밭길 험난해도 나는 갈 테야 푸른 하늘 넓은 들을 찾아 갈 테야

우리는 어둠을 지우고 빛나는 별 하나 그릴 수 있어 하늘도 땅도 모두 지우고 새로 그릴 수 있어 우리는 비겁을 지우고 진정한 용기를 그릴 수 있어 아픈 기억도 모두 내일의 희망으로 그릴 수 있어 세상은 내게 무릎 꿇으라 하지만 난 너를 바꿔 야겠어 이 길에 내가 상처 입는다 해도 결코 멈출 거라고 생각하지마 손을 잡고 함께 싸워 가면 더 아름다운 미래가 있어 비록 우리 작은 힘이지만 우리만이 할 수 있어 우리의 청춘을 걸고

한판 싸움이 다가올수록 우리 가슴은 처음처럼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듯 처음처럼 뜨겁게- 두근거리던 처음의 마음 우리 투쟁으로 희망이 됐고 지금도 처음이라 고 아-- 여긴다면은 날마다 희망이라오 저들에게 희망이 됐고 알게 하리라 우리 가 지쳤다고 믿는다면 그건- 하룻밤의 꿈이라는 걸-- 동지들아 몰아쳐 가자 끝이 보일수록 처음처럼--


시위대는 이밖에도 '님을 위한 행진곡', '타는 목마름으로', '아침이슬' 등 민중가요 일명 데모가를 부르며 흐트러진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지났을까. 학생회 부회장으로 있는 사람이 시위대 앞으로 나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더 밀어붙이지 않고 왜 공격을 멈추는 겁니까?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오늘은 시내 진출도 가능할 것 같은데, 왜 여기서 주저앉느냐 그 말입니다."


"우리 이제 그만 평화적인 시위를 합시다. 이 정도면 우리의 뜻은 전달된 게 아닙니까?"

내가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랬더니 그 사람도 자기의 주장을 꺾지 않았다.


"무슨 얘기입니까? 뉴스거리가 되도록 큰 싸움을 벌여야지요. 이쯤에서 그만두면 어느 신문에서 우리가 데모했다고 한 줄이라도 실어 주겠습니까? 좀더 가열찬 투쟁을 합시다. 그래서 내일 신문에 우리들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합시다."

물론 일리는 있는 얘기였다. 우리가 평화적이 시위를 한다고 한들 캠퍼스 안이면 몰라도 밖에서는 보장해 줄 리도 만무했지만, 설사 평화적 시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정책에 반영하기는커녕 코웃음만 칠 것이다. 그리고 어느 신문사나 방송사도 눈여겨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위문화가 그랬다. 외국의 선진국에서는 사람들이 거리에 모여 구호만 외쳐도, 피켓만 들고 백악관 앞에 서 있어도 언론에 보도가 되고 위정자들이 반응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경우, 누가 하나 죽든지 중상을 입든지 어쨌든 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그러한 속내를 잘 모르는 일반 국민들은 왜 대학생들의 시위가 점점 폭력성을 띠는가를 잘 몰랐다.

"우리의 타도 대상이 현 정권이지 저 전투경찰은 아니지 않습니까? 알고 보면 저들도 우리와 똑같은 대한민국 국민이요, 피 끓는 젊은이들입니다.

심지어 저 전경들 가운데는 엊그제만 해도 우리와 같이 이렇게 시위를 하다가 군대에 가게 되어 군인이란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 이상의 과격 한 폭력시위는 서로에게 상처만 줄뿐입니다. 이쯤에서 평화적인 시위로 전환합시다."

내가 다시 평화적인 시위를 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비판했다.

"그런 인정주의에 빠지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학우가 주장하는 논리대로 한다면 대통령 전두환도 타도 대상이 아니지요. 그도 엄연한 우리 국민의 한사람이니까요.

어쨌든 이유를 불문하고 저들은 진압 경찰입니다. 현정권의 하수인이라고요. 우리가 그러면 저들과 싸우지 누구와 싸우란 말입니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싸움을 합니까?

아니, 아니지요. 싸우기 싫으면 저 경찰들에게 비키라고 하세요. 비키면 될 것 아닙니까? 우리는 저들과 싸우고 싶어 싸웁니까? 우리의 길을 막고 서 있으니까 돌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도 휘두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학우 여러분, 다시 일어나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들인가를 똑똑하게 보여 줍시다! 자 진격 앞으로!

부학생회장의 주장에 다시 분기탱천한 시위대가 일어나서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 때 내가 다시 그들을 막고 서서 말했다.

"잠깐, 잠깐만요! 저기 저 전경 가운데는 저의 형도 있습니다. 제 친형이 있다고요. 학우 여러분들의 친형이 저기 있다고 해도 돌을 던지겠습니까? 화염병을 던질 수 있겠느냐고요?"

그러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렇게 해서 다시 한바탕 피 터지게 타오를 것 같던 불꽃이 힘없이 사그러들고 말았다.

그 일로 형은 징계를 먹었고, 나는 개량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혀 운동권 학생들에게 백안시 당했다.

5월말. 전남대학교에서 지난번 '오월 문학상' 시(詩)부문에 응모했던 작품이 입상되었다며 연락이 왔다. 직접 광주까지 와서 시상식을 빛내주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내가 응모했던 작품은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숨진 젊은 죽음을 시화한 것이었다.


푸른 낙엽(落葉)

어젯밤
때 아닌 비바람을 맞고
떨어져 누운 꽃망울

아침이 되었지만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바쁘게 물방아를 찧고 있다

푸른 낙엽 위의 구슬이 우는 듯 웃는 듯
함초롬히 나를 바라본다
타다 남은 촛농인가?
감지 못한 눈동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잃은 마리아의 눈물인가?

여기
젊은 가슴이
神의 사랑으로 여울져
싸늘한 피부를 감싸고 있다
죽어서 오히려 영롱한 빛을 토해내는
파노라마 속에서
홍수 후 노아에게 보여준 창조주의 약속을 읽는다

이제,
파란 얼굴로 땅에 입 맞추는
골고다의 비애는
저 바다 밑 어두운 세계에로
영원히 잠들지어다
술집 위로 높이 솟은 십자가가 필요 없는 그 날
진정 너의 심장은 분수처럼 날아올라
하늘을 맘껏 노래하며 춤출 수 있으리

안녕, 친구여!
진실로 새 날이 오면
아름다운 재회를



오월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은 초희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나보다도 더 좋아했다. 그러면서 시상식이 있는 전남대에 자기도 함께 데리고 가 달라고 했다. 초행길이라서 낯설고 또 혼자 가기도 좀 적적할 것 같았는데 잘되었다 싶어 그러자고 했다.

광주, 광주라!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울렁울렁 거렸다.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를 내가 밟아보다니, 괜스레 옷깃이 여미어지고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우리는 기차 편으로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역에서 내린 우리는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전남대로 향했다.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42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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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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