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정동극장 샛길로 들어와 전경의 삼엄한 눈초리를 피해 들어서면 허름한 서양식 건물을 만난다. 바로 중명전이다. '무거운 빛'의 전각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사 사바친이 설계했는데 창틀의 둥근 아치가 러시아식임을 어렵게 말해준다.
광복 60년, 을사늑약 체결 백년, 우리가 중명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명전은 경운궁(덕수궁)의 일부였고 경운궁은 한국 근대사의 중심에 있던 정동의 중심지였다. 이것이 정동과 경운궁이란 역사 공간을 되새김질해야 하는 까닭이다.
정숙한 동네 '정동'. 이곳의 지명은 태조가 매우 사랑했던 여인에게서 연원한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당시 4대문 안에는 무덤을 쓸 수 없다는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경복궁 근정전에서 바라다 보이는 황화방 북쪽 언덕(현재 경향신문사 일대로 추정됨)에 능을 모셨다. 그래서 '貞'릉동이란 지명을 얻게 되었다.
정동과 경운궁이 역사의 전면에 부각된 것이 1896년 아관파천. 당시 고종은 세자 순종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었던 경복궁에서 탈출, 정동에 있는 아라사(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다. 이때부터 정동과 경운궁은 한국 근대사의 중심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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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이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 박신용철
<고종이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은 통상 역사가들이 연대기순이나 사건순으로 기술한 죽은 역사가 아니라 건축사를 중심으로, 즉 역사 공간을 중심에 놓고 역사 사건을 이야기함으로써 살아숨쉬는 근대사를 들려준다.
김정동 목원대 건축학과 교수의 열 번째 저서인 <고종이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은 올해 1월 미대사관으로부터 반환받아 복원계획이 수립되고 있는 경운궁(덕수궁) 복원의 중요한 자료이자 정부와 학계에는 문화주권과 학자적 양식을 지키라는 준엄한 푯대기도 하다.
미대사관측은 2002년 구 경기여고 터에 조선총독부 1.8배에 달하는 복합외교센터를 짓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한국정부에 주택건설촉진법 시행령의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4년여에 걸친 시민들의 반대로 보존결정이 내려졌다. 대사관신축예정지가 경운궁(덕수궁) 권역 중에서 가장 신성시되는 선원전 등의 주요 전각이 있던 곳이라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경운궁 터인지도 몰랐다고 항변했고 학자들은 말이 없었다. 경운궁터에 복합외교센터를 짓겠다고 요구한 미대사관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곳이 경운궁 터인지도 몰랐던 우리 자신을 뼈아프게 반성해야할 일이다.
김정동 교수는 '덕수궁터 미대사관·아파트 신축반대 시민모임' 공동대표를 맡아 구 경기여고 터가 경운궁의 일부라는 사실을 학술적, 문헌적으로 밝혀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반미주의자로 오인 받기도 했지만 학자적 양식에 따라 조사한 땀의 결실이 바로 <고종이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이다.
정동 지역은 1883년 5월경 미국 대사관이 '4대문 안에서는 외국인의 토지 매입을 금한다'는 대한제국의 국법을 어기고 경운궁 일부를 불법 매입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배제학당, 이화여고 등 미국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본부가 정동 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고종이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을 따라 고종이 한발 한발 옮겼던 정동 일대와 경운궁 일대를 함께 산보해 보자. 고종과 호흡을 맞추다보면 일본, 청나라,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몰아치는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고자 몸부림 친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제국'의 고뇌가 고스란히 묻어온다.
이는 한국 근대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서 신자유주의에 떠밀려 가는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면 결국 어두웠던 역사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엄혹한 진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닫을 땐 사랑하는 연인처럼 가슴에 꼭 안게 된다.
P.S 정부는 광복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에 각종 행사를 비롯한 대한민국 리모델링 작업에 한창이다. 중앙정부, 지방정부 할 것없이 '광복'을 주제로 내건 지역 축제에 2천억원을 투여할 계획이다.
필자는 대한민국이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롭게 자리매김에 한다고 굳게 믿는 이들에게, 외세에 의해 찢겨간 근대사를 통해 반복되지 않는 역사, 청산된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모든 이들에게 <고종이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의 일독을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출판사 : 발언/ 출판일 : 2004년 10월 15일/ 저자 : 목원대학교 건축학과 김정동 교수.
문화유산연대(http://www.koreanheritage.or.kr/)에 실린 글입니다.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지음,
발언(건설기술네트워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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