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보다 더 힘들었던 기숙사 생활

추억의 기숙사에서 3년을 살았던 신설고등학교 학생들

등록 2005.03.17 12:54수정 2005.03.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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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활은 웬만한 자신과의 싸움 아니고는 하지 못할 짓이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규칙적이어야 함은 물론 제때 챙겨먹으려면 여간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안 된다. 나에게도 짧은 자취 생활 기간이 있었다. 6개월 남짓 무기력한 일상의 연속에 지각을 밥 먹듯이 했다.

학생은 성적으로밖에 보여줄 게 없던 시절 창피한 성적표를 가져가자 반강제로 자취생활을 접어야 하는 비운을 자초하고 말았다. 추석 무렵 어느 날 형이 학교로 찾아왔다. 미적거리고 있으면 아이 버린다는 판단이 선 건지 다짜고짜 빈 손수레에 책과 이불보자기를 싣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공부와 담쌓고 사는 나를 보다 못한 형과 아버지께서 내린 용단이었다. 기숙사에 넣으면 곤두박질했던 성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유난히 몸이 약한 막내 동생이라도 대학에 보내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 B사감과 러브레터> 같은 한가한 기숙사인줄 알았다. 뒤늦게 들어간 기숙사엔 3학년 형들이 나를 꼬맹이라 부르며 귀여워해주었다.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건지 내가 빈자리 하나를 꿰차고 들어가자 11명의 선배들은 활력을 되찾은 듯 했다. 관심을 갖고 돌봐줬고 동기생보다 더 친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아! 이렇게 재미난 곳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친절하고 즐거웠다.

며칠 후 밤 10시쯤이었다. 남학생 기숙사 도서관이 웅성웅성 시끄러워졌다. 한창 졸릴 때 장난이 심해지면 누구든 통제하기 힘든 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의자가 엎어지고 칸막이 위로 오르기도 하고 난장판이 펼쳐진다. 야단법석이다.

“집합! 집합!”

원형질 사감선생님의 집합 소리에 우르르 쾅쾅 우당탕 난리가 난 듯 다들 팬티만 걸치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간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었다. 예외가 적용될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서.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서두를 이유가 뭔가. 졸리던 차 머뭇거리고 있었다.

“야 규환아 빨리 벗고 나와. 늦게 나가면 죽는다.”
“예?”
“언넝 나와 임마. 팬티바람으로….”

양말도 신지 않고 웃통도 알몸이다. 팬티는 삼각의 ‘쌍방울’이다. 드넓은 운동장 바닥엔 모난 자갈이다. 운동화를 신고서도 편치 않은 운동장이었다. 쌀쌀한 바람에 닭살이 오돌토돌 돋았다. 밤 10시, 대학 운동장보다도 드넓은 허허벌판에 1, 2, 3학년 남학생만 100여명 모여 있다.

사감선생님은 울그락 불그락 상기되어 매를 들고 나오신다. 손짓을 하자 사생장(舍生長)의 구령에 맞춰 양말도 신지 않고 칠흑을 가르며 돌기 시작했다. 발바닥으로 전해오는 갈라질 듯한 아픔. 확인해볼 겨를도 없이 이를 앙다물고 뒤쫓아 가기에 급급했다. 내 보드라운 살갗이 찢겨서 피가 흐르는데도 계속해서 오염물질을 넣고 있는 기분이다.

스무 바퀴쯤 돌았을 무렵 그칠 법도 한데 우린 서른 바퀴를 향해 내달렸다. 아픔은 이제 잊은 지 오래다. 땀으로 온몸이 범벅이 되었다. 눈까지 매워왔다.

“제자리 섯! 박종구 기준!”
“기준!”
“넓게 벌려!”
“야!”

서로 채이지 않게 널찍하게 펼쳤다.

“엎드려 바쳐! 푸샵 50회 실시!”
“하나 둘 셋 넷…스물아홉.”
“요놈들 봐라. 요령피우고 있네.”

이골이 난 듯 다들 별 힘들이지 않고 잘들 하지만 나 같은 초보와 몇몇 약골은 끙끙대며 30개를 기점으로 힘겨워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만 선생님 매가 가만두질 않는다.

“탁, 타닥! 탁!”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30여 분을 또 돌렸다. 허리가 끊어지듯 아팠다.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늬들 정신 있는 학생이냐? 학력고사가 며칠이나 남았다고 이리 소란이야. 공부하기 싫으면 친구들 방해하지 말고 기숙사를 나가면 될 것 아니냐? 뭐야 응? 손차모?”
“예!”
“3호실 술 먹었지? 정용호 너는?”
“아, 아닙니다.”
“욘녀러새끼들 3호실은 남아 있어.”

무균질의 원형에 가까운 체육 담당 김 선생님은 신설학교를 명문으로 키워보겠다는 학교 측의 뜻에 따라 1달에 한번만 댁으로 가실뿐 학생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사셨다.

1회 1명, 2회 1명, 3회 3명, 4회 2명, 5회 70여 명만 광주지역 학교에 합격할 성적이라 그 척박한 환경에서 대학에 보내려면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것이 스파르타식이었다. 학생들도 정학시킨 담임선생님께 시퍼런 낫을 들이댈 정도로 거칠었다.

나와 동기인 5회부터 학교다운 면모를 갖추었던 건 적당히 공부를 하면 특(特), 갑(甲), 을(乙)로 나눠 전액 면제, 수업료 면제, 수업료 절반 감면의 혜택이 돌아가고 그 중 잘하는 몇몇 학생은 기숙사비 마저 내지 않도록 했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대학에 절반 이상 보내고 서울 명문대와 전남지역 우수대학 단과대 수석을 몇 해 차지하면서 학교 측의 열의를 알아차린 지역주민들이 너도나도 우리 학교로 보내기에 이른 것이다.

매를 다섯 대씩 맞고 일으켜 세워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는 모기떼에 가만히 세워둔다. 담양 창평면은 너른 들판이라 아직 모기떼가 극성을 피웠는데 땀에 절어있어 주변 모기가 모두 모여 늦여름 잔치를 하고 있다.

손이 조금이라도 움직여 긁적거리면 어김없이 매가 와서 갈겨댄다. 3호실이지만 1학년이라 열외였다. 형들을 두고 기숙사로 들어와 찬물에 샤워를 하고 청소를 마치고 점호준비를 해도 선배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내가 정신을 차렸다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을 이기지 못하는 잠꾸러기가 되어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마치고 오면 9시 반쯤엔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해 늘 어디에 숨을까 쥐구멍찾기에 바빴다. 아침에도 일어나지 못해 선생님 표적이 됨은 물론이었다.

규칙적인 생활 덕분인지 조금씩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2학년 중간고사를 보고나서 나는 기숙사를 탈출하여 서울로 도망을 하기에 이른다. 미리 써놓고 간 편지가 도착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서울에서 5일간 지내는 동안 마음을 정리하고 가보니 아직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뒤로 사감선생님은 네 맘대로 하라며 눈길 한번 주지 않으니 완전 자유의 몸이 되어 자고 싶으면 자고 학교 가고 싶으면 가는 불량학생이 되었다. 옆 건물이 교실이라 아침밥을 먹고도 1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1~2분 전 도착하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그날그날 선생님과 누가 늦게 도착하는가 내기를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2년을 보내는 동안 4등급이었던 성적이 1등급에 이르렀다. 자만에 빠질 법도 하지만 수학이라는 복병-모의고사 55점 만점에 두 번이나 14점을 맞았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지막 한해를 어찌 버틸 수 있을까.

또 한번 나는 대형사고를 치고 말았다. 기숙사는 엄격하여 매주 집에 갈 수가 없었다. 냄새 풀풀 나는 빨래도 학교 기숙사에서는 절대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격주로 빨랫감을 챙겨 등에 지고 나서는 풍경은 흡사 피난민이었다.

집에 가지 않는 주말 일요일 오전이면 의무적으로 면사무소 앞에 있는 목욕탕에 가서 때를 벗기고 와야 하는데 가져간 속옷빨래 하느라 진풍경이 벌어진다. 주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봉지에 싸서 비누칠하고 불려서는 거품을 쉴 새 없이 뿜어내는 광경이 연출된다. 3학년 3월 초 어느 날 빨래와 몸의 때를 득득 문질러 벗기고 나니 온몸에 힘이 좌악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은호야 배 안 고푸냐?”
“무지막지하게 벗기고 비벼댔더니 출출해.”
“너도 한바가지 나오더만….”
“사둔 남말허고 있네.”
“배 좀 채우고 가자.”
“그래.”

마침 장날이라 우린 장돌뱅이가 되기로 짐을 챙겨 걷노라니 하늘이 유난히 밝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마지막 운명을 다하듯 조촐해진 오일장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날은 내가 조장이었다. 우리 호실 12명 중 두셋만 빠지고 우린 의기투합을 해서 먹을 것을 찾았다. 지금은 줄서야 먹을 수 있는 내장국밥집 앞을 지나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허기가 더 밀려왔다.

묻지도 않고 국밥집으로 들어가서 한 그릇씩 시켰다. 일찌감치 점심을 먹었더니 나른한 게 아닌가. 시장 통에서 자취하는 친구 집에 머무르기를 또 30여분. 목욕 하고나서 1시간 반을 지체했다.

논둑을 따라 등나무를 끼고 개구멍으로 들어가 보니 비상이 걸려있다. 아침에 목욕탕 갔던 아이들 모두가 불려나갔다. 벌건 대낮에 팬티바람으로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엔 운동장이 아닌 논가에 있던 공동묘지 앞이다.

아직 덜 녹은 논에서 앞으로 뒤로 구르고 멍석말이까지 하고보니 흙투성이에 깜둥이가 되었다. 일요일 날 통학버스를 타고나온 여학생들이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고 있다. 팬티도 논물에 절어 걸레가 되었다. 깨끗한 몸을 더럽히고서도 히죽거리며 샤워를 했다.

우린 3년 가까이 긴 시간 동안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찐밥, 짬밥을 먹고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저벅거리고 물이 찬 운동장을 몇 바퀴 돌았는지 모른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아 운동장엔 자갈투성이였는데 체육시간과 교련시간에는 더 열심히 자갈과 녹슨 못을 줍는 모범생이었다.

덧붙이는 글 | 사감선생님과는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냅니다. 기숙사에서 함께 3년을 보냈던 친구들은 끈끈함이 보통이 아닙니다. 같이 고생을 하고 한솥밥을 먹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지금은 세월과 선생님들의 정성 그리고 지역주민들, 후배들이 합심하여 좋은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김규환 기자는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刊)을 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대표이다. 올 연말 쯤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나물 백화점 <산채원 山菜園>(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사감선생님과는 지금도 연락을 하며 지냅니다. 기숙사에서 함께 3년을 보냈던 친구들은 끈끈함이 보통이 아닙니다. 같이 고생을 하고 한솥밥을 먹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지금은 세월과 선생님들의 정성 그리고 지역주민들, 후배들이 합심하여 좋은 학교를 만들었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김규환 기자는 <잃어버린 고향풍경1>(하이미디어 刊)을 냈다.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cafe.daum.net/hongaclub)대표이다. 올 연말 쯤 전남 화순 백아산으로 귀향하여 산나물 백화점 <산채원 山菜園>(cafe.daum.net/sanchaewon)을 만들 꿈을 현실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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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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