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는 우리 것에 대한 '그림내'가 있습니까?

김성동 님의 산문집,<먼 곳의 그림내에게>를 읽고서

등록 2005.03.19 00:01수정 2005.03.2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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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겉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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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옛 것이나 정든 사람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살았던 기억들이나 오줌보 친구들과 어울렸던 옛 일들을 가끔씩 그리워 할 때가 있다. 봄철 물오른 보리 잎으로 풀피리를 만들어 불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보리랑 고구마를 구워 먹던 그 때 일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런 그리움들을 생태적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얻는 그리움들 말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그리움도 있지 않을까. 굳이 말을 만들어 본다면 생득적 그리움 같은 것. 어린 시절에 보거나 들으면서 겪은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어느 정도 성인이 된 시절에 겪은 것들로부터 얻게 되는 그리움들 말이다.


부도로 내려앉은 회사에서 모든 동료들과 동고동락하며 힘겹게 이겨냈던 그 시절의 그리움들. 문학 동아리를 만들었지만 활동비조차 없어서 서로가 돈을 모으고 또 맨발로 뛰다시피 하며 그 일들을 해 냈던 그 시절의 그리움들. 먹을 끼니조차 없이 굶주리거나 일 년 넘게 라면으로 때워야만 했던 시절에 쌀 한 가마니를 아무런 말없이 덥석 갖다 주었던 그 동료와 그 선배의 사랑스러운 일들…. 그런 그리움이라면 생태적 그리움보다도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아무튼 생태적 그리움이든 생득적 그리움이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그리움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니 그런 그리움들이 없다면 결코 사람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그저 생각만으로 떠올리는 그리움이 있을 것이고, 마음속에 고이 품고 있는 그리움도 있겠다는 것이다.

그런 모든 그리움들을 한 마디로 말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그리움들을 한 단어로 압축시킨다면 어떤 게 나올까. 굳이 그런 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거기에 어울리는 멋진 말이 있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다름 아닌 '그림내' 다.

'그림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건 그리움을 줄여서 한 말이다. 다시 말해 내가 여태껏 자라면서 만난 자연과 사람과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일컫는 말이다. 당연히 어린 시절 시골에서 보고 자랐던 논밭도 될 수 있고, 오줌보 친구들도 될 수 있고, 내게 이모저모 많은 도움을 베풀어 준 모든 사람들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들에겐 어떤 그림내가 있을까.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겐 보통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그림내가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만난 그림내가 있을 수 있겠고, 또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이모저모 도움을 받은 그림내도 있을 것이고, 그가 쓴 모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의 생채기 같은 그림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 그림내를 멋지게 그려주고 있는 작가가 있다. 김성동 님이 그인데, 그는 (좋은날) 라는 책을 통해서 자신이 여태껏 만났던 그림내들,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그림내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고 있다.

"까닭 없이 배알티하고 싶고 까닭 없이 집을 나가버리고만 싶던 소년시절은 철벽같은 누리틀과 더구나 은산철벽 같은 어른들의 악지센 힘 앞에 무참히 꺾이어져 버렸는 데다가, 마안한 꿈과 활찐 될끼 앞에 기뻐 춤춰야 될 청춘은 죽어버리고, 낙엽지는 중년의 대마루판에 올라서 버린 것이다. 성(性)과 성(聖)의 갈등과 낮과 밤의 모순과 현실과 이상의 부조리 속에서 쉰한살, 52년 9개월짜리의 싯누런 내 중년은 그렇게 또 처참하게 주주 물러앉고 있는 것이다."(20쪽)


작가 김성동 님은 이 책에서 불교의 구도자가 되기 위해 만났던 스님들과 그들의 가르침들, 옛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만난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과 그들의 가르침들, 우리나라 대하소설의 명맥을 이어 온 홍명희·황석영·박경리·이문구 선생과의 만남과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 생채기 얼개처럼 늘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의 고향과 그 삶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각각의 그림내로 담아서 그려내고 있다.

그 그림내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가 몹시도 추구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건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순 우리말을 아끼고 더욱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불자가 되려고 무진 애를 썼던 그였지만 부처는 그를 속세로 내몰고서 오로지 우리말을 지켜내도록 했던 것 아니겠는가.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안 까닭에 그는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외래어들과 왜놈들 말을 깡그리 몰아내고, 오히려 정겹고 더 그리운 우리말을 우리 식으로 모두 바꾸어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것이리라.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어휘 또는 개념어들 가운데 거의 전부가 왜식이라고 한다면, 놀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부끄럽고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성터 주변의 마을 이름이 성내리(城內里) 또는 성내동(城內洞)으로 바뀌었고, 장승백이가 장승(長承)이 되었으며, 비석거리 또는 비석골을 입석리(立石里)로 바꾸어 버린 일제였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된 버드냇골이 유천동(柳川洞)이 되고, 물치가 수색(水色)으로, 새터말이 신촌(新村), 쇠귀골이 우이동(牛耳洞), 솔고개가 송현(松峴), 박달내가 단천(檀川)으로 되는 등 온 나라 안의 땅이름 거의 전부가 왜식이다."(133쪽)

요즘 들어서는 오작교에 얽힌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도 안 계시고, 터질 듯 부풀어오르는 오줌보를 발뒤꿈치로 눌러 막으면서까지 그 옛 이야기를 들으려는 손자들도 없는 시대라고 안타까워하는 김성동 님.

소설을 필두로 한 문학이야말로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할 가내수공업이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웬일인지 요즘 작가들이 붕어빵 찍듯 하나같이 컴퓨터로 찍어내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는 작가 김성동 님. 조선의 눈으로 산천과 인심을 보려하지 않고 서구의 눈으로만 우리의 산천과 우리의 인심을 보려한다는, 그래서 우리의 왜곡된 문화풍토와 교육을 몹시도 통탄하고 있는 김성동 님.

그래서 그는 사라져 가는 우리 것에 대한 그 안타까움과 아픔들을 껴안은 채, 우리 정서에 맞고 우리 풍토에 맞는 살가운 우리 옛 그림내들을 더 고이 뽑아내고 더 고이 간직하려고 애쓰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어떤가요? 당신에게는 우리 것에 대한 그림내가 있습니까?

먼 곳의 그림내에게

김성동,
좋은날,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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