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53회)

등록 2005.03.22 08:25수정 2005.03.2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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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 안은 이중 삼중의 나무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유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서요하 유역의 출토 옥룡과 우하량 여신묘 출토 여신상, 발해 연안식 청동단검, 은허 부호묘 출토 곡옥, 하북성 당상신 대성산 유적 출토 홍동패식…. 그러한 유물들이 창고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 유물들을 살피고 있는 김 경장의 머릿속으로 어떤 빛이 빠르게 스쳐 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아 김 경장은 얼굴을 찌푸리며 생각해내려 애썼다. 뿌연 안개 속의 막연한 느낌은 들었지만, 그것을 정확히 한 단어로 끄집어 내기란 어려웠다. 분명 이 유적들을 살피며 들었던 느낌이었다. 단서는 이 유적들 속에 있었지만 그걸 몰라 답답할 뿐이었다.

한참 동안 그런 사념에 빠져 있는데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엉망진창이죠."

조교가 겸연쩍은 얼굴로 유물과 김 경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는 것이다.

"보존 처리는 모두 끝난 유물들입니다만 아직 분류가 덜 되어서 이 모양입니다."


김 경장은 아직 뇌리에서 꿈틀거리는 상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폈다. 사방이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박힌 밀실인데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라 유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긴 힘들었다.

"이걸 밖에 들고 나가 살필 순 없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이 유물들은 절대 반출이 불가능합니다."
"바로 밖에 있는 복도도 안 된다는 겁니까?"
"파손의 우려가 있어 곤란합니다."


할 수 없이 김 경장은 그 자리에 쭈그려 앉은 채 유물들을 하나씩 살폈다. 하지만 워낙 방대한 양이라 자세히 살펴보긴 힘들었다. 중요한 건 이 유물을 통해 박사가 숨겨놓은 유적을 찾아야했다. 그 유물은 분명 여기 있는 것과는 다를 게 분명했다. 이것들 보다 훨씬 중요하고 의미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도 그와 연장선상에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도대체 안 박사는 무슨 유물을 발견했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 지키려 했던 것인가? 그리고 그들 또한 이 유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모든 조직을 동원하고 있다. 사람의 목숨에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그 유물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보관된 유물들은 기원전 3000년 이전의 것이 많았다.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시대와 거의 비슷한 것이다. 조교가 유물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눈으로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유적들은 그 오랜 세월을 뛰어 넘어 원형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5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 어려울 만큼 모두 정교하고 색깔이 화려해 보였다.

한참 동안 유물을 살피고 있는데 조교가 뒤에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문화재 안내원 같은 말투였다.

"중국의 전통 사학자들은 황화유역을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근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은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결코 한 곳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김 경장이 앉은 채 뒤를 돌아보자 조교는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문화수준도 결코 중원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흥륭와(興隆窪) 문화는 중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해자로 둘러싸인 완벽한 형태의 촌락 유적지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용과 용무늬 도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용 형상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나무칸에 놓인 용모양의 옥조각을 들어 보였다. 그 용 모양 옥장신은 얼굴이 마치 짐승의 모양을 닮고 통통한 몸은 한 바퀴를 감돌고 있었다. 머리 부분에는 작은 구멍을 뚫어 실을 꿰어 걸 수 있도록 했다. 용은 입을 꼭 다물고 코는 높이 치켜세우고 있어 마치 용머리가 전진하는 모습이었고 목덜미의 갈기는 날아갈 듯 유려했다.

"우리 중국 사람들은 황제의 자손임과 동시에 용의 자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용의 형상은 중원이 아닌 이 부근 요하에서 가장 빨리 등장했던 것입니다.

듣고만 있던 김 경장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데 만약 이 지역이 예전에 중국의 영토가 아니라 다른 곳의 지배를 받았던 곳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다른 곳의 지배를 받았다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요하 지역은 예전에 고조선이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 고조선 이전에는 구리라는 나라가 이곳을 다스리고 있었죠."
"물론 그런 나라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은 모두 중국에 복속해 있어 우리와 같은 나라로 볼 수 있죠. 다시 말해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이라는 겁니다."

김 경장은 입술을 들썩이며 무슨 말인가 하려다 어금니를 세게 깨물었다. 지금은 그와 논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유물들을 통해 어떤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은 지금 수배를 받고 있지 않은가? 여기까지 연락이 닿을지 모를 일이었다. 얼른 유물을 살피고 자리를 피해야만 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유물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어차피 이 유물들을 통해 답을 얻으러 온 것은 아니었다. 여기 보관된 유물들을 유추해 힌트를 얻으려는 것 뿐이었다. 길게 심호흡을 하며 일어섰다.

"다 보셨으며 나가시죠."

여태 뒤에서 지키고 있던 조교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김 경장도 몸을 일으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잘 보고 갑니다."

조교와 악수를 나누고 헤어진 후 박물관 밖으로 나왔다. 밖은 다시 비를 뿌리고 있었다. 날이 많이 어두워진데다 빗발도 제법 굵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등을 안경을 반쯤 가리고는 뛰기 시작했다. 방학이라 교정을 오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가 쏟아져 내려 다니는 행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교정은 적막감까지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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