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만에 다시 찾은 전등사

잘 알려진 강화이야기-강화도 전등사

등록 2005.03.22 23:24수정 2005.03.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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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를 언제 다녀왔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첫째가 아장아장 걸을 때니까 벌써 10여 년이 흐른 것 같다. 그 때만 하더라도 강화도는 오가는데 5~6시간은 족히 걸려 가깝고도 먼 섬이었다. 근래 들어 초지대교도 놓였고 길도 넓혀져 조금만 부지런을 피면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는 섬이 되었다.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바다와 산이 빚어내는 풍경도 훌륭하다
강화도는 지붕없는 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바다와 산이 빚어내는 풍경도 훌륭하다김정봉
일 년에 몇 번이라도 가는 강화도이지만 10년이 넘게 전등사를 가지 않은 이유는 전등사는 찾는 이가 많아 호젓한 분위기가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바로 옆에 있는 정수사가 내 맘을 빼앗았기 때문인데 갑자기 전등사가 보고 싶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답사 여행을 하다보면 생각과 달리 처음엔 대찰을 가기보다는 조그만 절에 매력을 느껴 호젓하고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조그만 절을 찾게 된다. 이해하지 못하고 듣는 클래식 음악이 지겹게 느껴지듯 아는 것 없이 대찰을 찾게 되면 그게 그것 같고 이해하지 못하여 쉽게 싫증을 느끼게 된다. 웬만한 절은 다 다녀 본 끝에 이제는 다른 절과 비교도 해보고, 한 가지 문화재에서 다른 곳에서 보았던 문화재를 떠올리게 될 줄 알면서 거꾸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절을 찾게 된다.

1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찾아가긴 했는데 양지바른 담 밑 흙 길에서 첫째하고 놀다 온 기억뿐. 처마를 살짝 들어 올린 대웅보전의 상쾌함과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나녀상과 나녀상에 얽힌 이야기, 대웅보전의 축소판이라 할 만한 아담한 약사전, 멀리 바다를 마주보고 서 있는 멋진 대조루, 이색적으로 생긴 범종, 풍수설에 따라 고려 때 지어진 가궁궐의 흔적 등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게다가 전등사가 성내에 있다는 사실과 전등사의 역사가 고구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은 더 더욱 모르고 다녀왔으니 전등사를 하나의 공원 정도로 여기고 다녀온 셈이다.

10여년 전에는 양지바른 흙 길 주변에서 머물다 온 기억밖에 없다(사진은 이미지 꾸미기를 한 것임)
10여년 전에는 양지바른 흙 길 주변에서 머물다 온 기억밖에 없다(사진은 이미지 꾸미기를 한 것임)김정봉
과연 전등사가 고구려 시대의 절이 맞는가? 남한에는 고구려에 관련된 절이나 유물이 드물어 전등사의 역사가 고구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무척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어쨌든 전등사의 창건설은 고구려 소수림왕2년(372년)에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가는 도중에 이 곳에 전등사를 열었고 이 당시의 절 이름은 진종사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이곳은 백제 땅이었고 백제가 불교를 도입한 연도가 384년이니까 서로 맞지 않으나 아도화상이 강화도를 경유하여 신라로 갔을 가능성이 있고 백제의 영향력이 이곳까지 강력하게 미치지 않았을 거라는 점, 그리고 백제는 신라와는 달리 불교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점을 감안하면 이 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전등사는 삼랑성(정족산성) 안에 존재하는데 삼랑성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 알려진 게 없다. 삼랑이라는 신하를 시켜 축성하였다 해서 붙여졌다는 말도 있긴 하지만 단군의 세 아들,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扶餘)가 이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이라 했다는 말이 고려사에 전한다.

삼랑성의 동문,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 하여 삼랑성이라 하는데 남문과 달리 누각이 없어 성문 같지가 않다
삼랑성의 동문,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 하여 삼랑성이라 하는데 남문과 달리 누각이 없어 성문 같지가 않다김정봉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마니산 참성단이 이 근처에 있고 단군의 아들과 관련한 삼랑성의 존재를 근거로 전등사의 창건을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해인 소수림왕 때로 끌어올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고구려와 관련된 유물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는 않지만 전등사의 창건을 고구려로 올리고 싶은 마음이다.


전등사가 최초로 기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고려 원종 때이다(1264년). 이때에는 전등사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지만 삼랑성 가궁궐에서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으로 전등사의 존재가 나타난다. 전등사의 이름은 1282년에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의 원찰로서 처음 등장한다.

전등사의 입구는 남문과 동문 두 개인데, 삼랑성의 동문은 성문에 누각이 없어 성문으로 보이지 않고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보인다. 동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고 절로 향하여 흙 길이 길게 뻗어 있다.

동문으로 들어와 처음 대하는 것이 대조루. 대웅전으로 이르는 문의 역할을 하는데 고개를 꼿꼿이 들고 오는 사람은 이마를 부딪칠 정도로 통로는 높지 않다. 밑으로 지나가는 젊은이들이 머리를 약간 숙이며 "통로가 왜 이리 낮지?"하고 말을 주고받는다. 부처님이 모셔진 대웅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낮춰 경건한 마음을 갖도록 고의로 낮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대조루, 바다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듯하다. 대조루 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
대조루, 바다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듯하다. 대조루 밑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숙여야 한다김정봉
대조루(對潮樓). 조수를 마주하고 짝을 이루어 대답하는 누각이라. 이름이 절의 누각이라기보다는 선비가 지은 정자의 이름 같기도 하다. 바로 옆에 연못이 있고 멀리 보이는 바다를 품안에 담으려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자, 이제 대웅전으로 가볼까?
자, 이제 대웅전으로 가볼까?김정봉
머리는 정면을 향하고 몸을 굽혀 대조루 밑을 빠져나가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개를 활짝 펼친 새처럼 대웅보전이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몸체에 처마 끝이 살짝 들려 상쾌한 맛이 난다. 막돌 허튼층쌓기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막돌초석을 놓았다. 정면 3칸에 해당하는 부분은 큰 막돌로 쌓았고 왼쪽 끄트머리와 오른쪽 측면은 작은 막돌을 사용했다. 큰 막돌을 보고 고개를 그대로 들어 처마 끝을 보면 막돌의 견고함과 처마 끝의 상쾌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대웅전(보물 제 178호), 처마가 살짝 들려 상쾌함이 돋보인다
대웅전(보물 제 178호), 처마가 살짝 들려 상쾌함이 돋보인다김정봉
전등사 대웅보전의 네 귀에서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나녀상의 전설은 유명하다. 광해군 때 전소된 대웅전을 다시 지을 때 이 공사를 맡은 도편수가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와 정분이 나 노임을 받은 돈을 주모에게 맡겨 놓았는데 주모는 공사가 끝나기 전에 이 돈을 몽땅 갖고 도망가 버렸다. 이에 앙갚음을 할 요량으로 네 개의 나체상을 만들어 대웅전 네 추녀를 떠받치게 하여 날마다 독경소릴 들으며 죄를 뉘우치게 하였다 한다.

처마를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나녀상,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볼거리다
처마를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나녀상,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볼거리다김정봉
이 나녀상을 원숭이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부처님이 원숭이 왕자로 있을 때의 본생담에 근거를 두고 있다. 도편수가 개인적인 울분을 표현하여 성스런 대웅전에 나녀상을 조각하여 끼워 넣었다면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원숭이 모양과 흡사한 나녀상을 조각하여 핑계거리로 삼고 나녀상에 대한 실제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흘린 것은 아닌지? 여하튼 어디에서 볼 수 없는 익살과 해학이 담겨 있다.

대웅보전 왼쪽 옆으로 아담하고 예쁘게 생긴 약사전이 있다. '리틀 대웅전'이라고나 할까? 언제 지어졌는지 알려진 게 없고 고종 13년(1876년)에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다만 모양과 건축양식으로 볼 때 대웅전과 함께 조선 중기(광해군 13년, 1621년)에 건립 된 것으로 짐작된다.

약사전(보물 제 179호), 리틀 대웅전이라고 할까? 모양새와 건축양식이 대웅전과 흡사하다
약사전(보물 제 179호), 리틀 대웅전이라고 할까? 모양새와 건축양식이 대웅전과 흡사하다김정봉
전등사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는데 전등사 범종이다. 한눈에 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흔히 보는 범종과 형태가 크게 다르다. 중국의 종이기 때문이다. 이 종에 새겨진 명문에는 중국 송나라 때(1097년)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에서 제작되었다고 되어 있다.

이 종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는가는 알지 못한다. 전등사는 일제 말기 때 군수물자 징발에 본래 있던 범종을 강제로 공출 당했다가 해방 후 공출당한 범종을 찾던 중 우연히 부평 군기창 뒷마당에서 이 종을 얻게 되었다.

전등사 범종(보물 제 393호), 중국 종으로 모양이 이색적이다
전등사 범종(보물 제 393호), 중국 종으로 모양이 이색적이다김정봉
작년까지만 해도 대조루 옆에 있는 범종루에 걸려 있던 것을 적묵당 담장 옆에 있는 종각으로 옮겨 놓고 종각에 있던 종을 범종루에 걸면서 안내판은 범종루 옆에 그대로 두는 바람에 사전 정보 없이 보면 범종루에 걸린 종이 보물 393호 전등사 범종으로 착각하기 쉽다. 전등사 범종은 적묵당 담장 옆 종각 안에 답답하게 갇혀 있다. 또한 가끔 자료에 보면 이 전등사 범종이 일제 때 공출당한 범종을 되찾은 것으로 나오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전형적인 산지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 전등사는 대웅전, 향로전, 약사전, 명부전, 극락암, 대조루, 범종루, 종각, 적묵당을 비롯하여 몇 채의 요사채가 짜임새 있게 들어서 있다. 이런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삼성각 주변이다. 이곳에서 보는 전등사의 전경이 가장 눈에 찬다.

삼성각 주변에서 본 전등사 전경, 이 곳에서 보는 정경이 제일이다
삼성각 주변에서 본 전등사 전경, 이 곳에서 보는 정경이 제일이다김정봉
한국의 건축물은 정면에서 보는 것도 좋지만 서로 포개진 지붕과 팔작지붕의 팔자 그리고 합각 부분의 삼각형을 조금 높은 곳에서 비껴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여행의 마무리는 여기서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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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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