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사진 속에 남은 꽁치찌개의 추억

등록 2005.03.24 14:51수정 2005.03.2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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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보글보글 끓는 꽁치 찌개, 기억도 함께 끓고 있다.

보글보글 끓는 꽁치 찌개, 기억도 함께 끓고 있다. ⓒ 최성수

그날로부터 먼 길을 걸어왔다. 이제는 기억조차 아슴아슴하게 멀어진 것 같다. 때때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아득하기까지 하다. 앞뒤 재지 않고 헐레벌떡 달려온 생의 구비가 어느 새 그때로부터 삼십 년을 넘어섰다. 바쁘게 달려왔지만, 너무 아쉽게 지나가 버린 세월이었다.


그날을 1970년대라고 부르자. 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에 고등학교와 대학에 입학한 나와 같은 세대에게 세월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 세대는 어쩌면 삼십 년에 삼백 년을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상업 자본주의의 핵심은 속도다. 속도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상품으로 삼는다. 시간이라는 상품 속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되면 낙오자로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 그것이 어쩌면 현대 사회를 사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무한 질주의 속도전을 생각하면 나는 우선 타자기를 떠올린다. 대학 다닐 무렵, 문학청년이었던 나는 타자기 한 대를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다. 내가 쓴 시를 타자기로 깨끗하게 쳐 보관하고 싶은 꿈, 그 꿈 때문에 나는 타자 학원에 나가 타자를 배우기도 했다. 요즘처럼 컴퓨터가 일상화된 세대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을 일이리라.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내가 장만한 것이 전동 타자기였다. 약간의 수입이 있었던 1980년대 초반이었다. 전동 타자기는 수동식 타자기보다 글자체도 깨끗했고 사용도 편리했다. 오타를 치면 삑삑 소리가 나면서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처음 그것을 장만한 내게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물건이었다.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처음 컴퓨터를 대하게 된 것은 1988년을 전후한 무렵이었다. 그 당시 내가 만난 컴퓨터는 디스켓을 넣고 구동을 시켜야 하는 하드가 없는 제품이었다. 그래도 그 컴퓨터가 얼마나 신기했던지…. 빠르게 치면 미처 타자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던 컴퓨터였지만, 글을 써서 저장을 할 수 있고, 언제든지 꺼내 인쇄해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


a 꽁치 찌개에 넣을 양념. 감자가 꼭 들어가야 제 맛이 난다.

꽁치 찌개에 넣을 양념. 감자가 꼭 들어가야 제 맛이 난다. ⓒ 최성수

이제는 인터넷으로 모든 자료를 찾아 볼 수 있고, 다른 나라 사람과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컴퓨터가 변화했다. 그런데? 그래서 정말 행복한 컴퓨터 세상이 된 것일까?

시간에 쫓겨 바쁘게 살다가 오히려 나 자신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흔 중반을 넘어설 때부터 자꾸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옛날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시간이라는 현실적 추적자를 따돌리려는 내 무의식의 발로는 아닐까?


재작년 연말의 일이다. 어느 대학에서 특별 강의 요청을 해 왔다. 그해에 나는 <오마이뉴스>에 교육장편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 연재로 이달의 뉴스 게릴라로 선정이 되기도 했고, 그 이듬해 이월에는 '2월22일상'을 받기도 했다. 아마도 그런 사연으로 내게 인터넷 글쓰기와 문화라는 강좌를 부탁한 것 같았다.

나는 그 강연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인터넷이라는 최첨단의 매체는 새로운 세대와 친숙한 문화이고 우리와 같은 기성세대에게는 낯설기 그지없다. 대화가 단절된 시대,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화면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채팅), 말하는 속도로 글을 쳐 올리며 대화하는 중에도 또 다른 사이트를 뒤적거리는 자기 중심의 그 무한 속도를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인터넷 글쓰기를 한동안 피해 다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만난 것이 <오마이뉴스>였다.

<오마이뉴스>에는 우리 같은 기성세대의 이야기를 담을 틀이 존재했다. 그래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내 기사의 대부분은 무한 속도 경쟁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그 반작용으로 선택한 삶에 대한 이야기다. 느리고 게으르게 사는 고향 이야기를 나는 가장 빠른 속도의 대변자인 인터넷 매체를 통해 쓰고 있는 것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한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면 오히려 벗어나보자는 생각을 가진 기성세대가 첨단의 매체 인터넷에 쓰는 자신의 변명쯤으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그런 내 이야기에 신세대인 대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더러는 갸웃거리기도 했다. 하여간 속도에서 벗어나고픈 욕망, 그것은 요즘도 내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때로는 나를 과거지향의 인물로 만들기도 한다. 늙었다는 이야기일까? 나이 들면 과거를 먹고 산다고 하니 말이다.

그 과거 지향의 촉수 중에서 나를 가장 예민하게 자극하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아마 유사 이래 요즘처럼 음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 때도 없었을 것이다. 전통 음식만이 아니라 외국 음식에다, 그 둘을 섞은 퓨전 요리까지 정말 없는 음식이 없을 정도다.

a 먼저 고추장을 물에 풀어야 한다. 된장을 섞으면 텁텁한 맛이 난다.

먼저 고추장을 물에 풀어야 한다. 된장을 섞으면 텁텁한 맛이 난다. ⓒ 최성수

그런데 그 숱한 음식들보다도 더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내 기억 속의 맛들이다. 어렸을 때 먹었던 음식들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수많은 추억의 음식들이 그리워지는 것도 어쩌면 시간에서 벗어나고픈 내 무의식의 자극 때문일 것이다.

음식만큼 보수적인 것도 없고, 음식만큼 질긴 욕망도 없다. 자신이 먹어본 음식이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는 음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가장 그리운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음식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음식에 얽힌 추억과 기억 때문이리라.

그런 음식 중의 하나가 내게는 꽁치찌개다. 꽁치찌개 하면 1970년대 후반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는 떨어져 갈 곳이 없던 시절,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하고, 세상의 모든 일에 날을 세우던 때였다.

몇몇 친구들과 서울 근교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모두들 상처받은 짐승처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던 때였으리라. 당시만 해도 서울 근교가 지금처럼 북적거리지 않았고, 손쉽게 갈 만큼 교통이 편하지도 않았다.

시외버스를 타고, 또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간 곳이 지금의 수원 용주사 근처였다. 그러나 그 시절 우리는 수원 화성이나 용주사 같은 문화 유적에 관심이 있을 나이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마음을 풀어버릴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입을 옷조차 변변히 없어 고등학교 때 입던 교련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 용주사 근처의 숲 속에서 우리는 소주를 마셨고, 세상에 대한 울분을 털어놓았고, 그리고 얼큰하게 취해 점심밥을 해 먹었다.

a 70년대의 어느 날, 꽁치 찌개를 끓여먹던 사회 초년 시절의 모습, 이제는 흑백 사진 한 장으로 남은 추억이다.

70년대의 어느 날, 꽁치 찌개를 끓여먹던 사회 초년 시절의 모습, 이제는 흑백 사진 한 장으로 남은 추억이다. ⓒ 최성수

한동안 공기 펌프질을 해야 불을 붙일 수 있던 낡고 낡은 석유 버너에 땀을 흘려가며 겨우 해 놓은 음식은 밥과 달랑 꽁치찌개 한 그릇이었다. 얼큰하게 고추장을 풀고, 감자를 숭숭 썰어 넣고, 가져온 온갖 양념들을 마구 섞어 끓인 꽁치찌개는 코펠 가득 넘쳐났다. 우리는 마치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 나오는 동창들처럼, 세상에 자리 잡지 못하고 떠돌며, 때로는 서로에게 터무니없는 신경질을 내기도 하면서, 얼굴이 벌겋게 되도록 꽁치 찌개를 입에 퍼 넣었다.

지금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어떤 울분이 그 시절 내게는 생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졌으리라. 대학 문제? 가족에 대한 불신? 유신으로 이름 지어진 독재 정권이 몰고 가던 광폭한 사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그날의 내 의식 속에 뒤범벅이 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식의 뒤범벅이 꽁치찌개를 더 맛나게 했으리라. 하여간 나는 그날 이후 야외에 나가면 해 먹는 최고의 반찬이 꽁치찌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거의 삼십 년이 흘렀다. 이제는 야외에 나가 밥을 해 먹는 사람도 드물어졌고, 나도 가족들과 여행을 가면 밥을 사 먹거나 혹은 삼겹살을 구워먹지 꽁치찌개를 끓여 먹지는 않는다.

꽁치찌개를 끓여 먹지 않게 되면서, 그 시절의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지기 시작했다. 교련복을 입고 다녔던 기억도 없어지고, 귀를 다 덮고도 넘어 뒷목을 간질이던 장발이 유행이었던 것도 잊었다. 그 나이때면 흔히 갖는 세상에 대한 비분강개도 어느 정도 삭아버렸다.

어디를 가기 위해 여러 차례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일도 이제는 승용차로 한 번에 해결한다. 편리함으로 느긋함을 바꿔버리고, 옛 일은 아예 기억조차 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현실의 안일과 안온을 받아들이고 즐기게 된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꽁치찌개는 내 입맛에 기억되는 소중한 추억이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꽁치찌개 타령을 한다.

a 고추장 푼 물이 끓으면 양파와 감자를 넣고 한 번 더 끓인다. 추억도 함께 익는다.

고추장 푼 물이 끓으면 양파와 감자를 넣고 한 번 더 끓인다. 추억도 함께 익는다. ⓒ 최성수

“아빠, 내일 저녁 반찬은 뭐예요?”

지난주 수요일의 일이었다.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내가 밥 당번인 내일의 반찬이 궁금했나보다. 무슨 반찬을 해줄까 생각을 하다 나는 퍼뜩 꽁치 찌개를 떠올렸다.

“내일은 꽁치찌개를 해줄게.”

내 말에 녀석은 그게 무슨 반찬인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었다. 다음 날, 꽁치찌개를 끓여 상에 올려놓자 녀석이 한 숟가락 떠먹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괜찮네.”

그러면서 녀석은 연신 꽁치를 찾고, 감자를 건져내 먹었다. 큰 녀석도 맛나게 먹어, 그날 한 냄비 끓인 꽁치찌개는 동이 나 버렸다.

“아빠는 특이한 찌개도 끓일 줄 알아.”

늦둥이 녀석은 새로운 음식이 신기한지 그런 소리를 제 엄마에게 했다. 무엇이든지 잘 먹는 녀석이니 음식의 맛을 제대로 알고 한 말일 리는 없으리라. 아들 녀석들이 꽁치찌개에서 아빠의 추억을 알 수는 없겠지만, 나는 맛있게 먹는 녀석들을 보면서 한 장의 흑백 사진처럼 꽁치 찌개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바람처럼 사라지고 만 1970년대의 기억과, 삼십 년 가까이 닳고 달아 실마리조차 찾을 길 없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그 꽁치 찌개 앞에서 추억처럼 되살아났다.

그 날 함께 꽁치 찌개를 먹던 친구들은 이제 흑백 사진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모두들 자기의 일에 바빠, 소식조차 없는 친구도 있고, 일년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마주칠 뿐인 친구도 있다. 모두들 급하게 다그치는 시간이라는 괴물에 등 떠밀려 그 시절 기억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꽁치찌개를 마주하고 그 옛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꽁치 찌개는 기억의 맛이다. 암담하고 암울했던 70년대 후반의 슬픈 그림자가 꽁치 찌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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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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