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작가 임철우의 소설 <백년여관>

등록 2005.03.31 12:35수정 2005.03.3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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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지원, 학술연구 등을 전담할 ’제주4․3평화재단‘이 설립된다.”

“80년 5월 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숨진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최근 화재로 소실됐으나 행정기관의 지원이 없어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광주시의원과 전남도의원 일부가 …전남도청 부지에 5․18민주화운동 등을 상징하는 높이 518m의 타워 건립을 추진 중인 가운데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얼마 전 단신기사 3꼭지를 보고 한 권의 책이 머릿속에 희멀거니 얼굴을 드러냈다.

a 임철우의 <백년여관>

임철우의 <백년여관> ⓒ 박신용철

최근 일제 잔재, 4.3항쟁, 갑오농민전쟁,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 등의 과거사문제가 민주화의 진전에 힘입어 이제야 제자리 찾기를 시작했다.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역사 속에서 좌우이념대립의 폭풍우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감내해야만 했던 지난 반백년의 세월은 오늘에서야 ‘진상규명’이란 이름으로 제 모습을 찾고 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역사 바로잡기’가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도 불온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첫 방문했던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국민들은 ‘변화와 개혁’을 요구했고 ‘할 말은 하는 당당한 대통령’을 갖기를 원했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국민들의 기대는 남달랐다. 그는 “사진 찍기 위해 미국에 가지는 않는다”고 했다. 대통령이 된 그는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NO"라고 말하기를 기대했던 국민들의 자존심을 짓뭉갰다. 그리고 5월 광주를 방문했다.


이처럼 80년 5월 광주에 마음의 빚을 졌다며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외쳤던 목소리들은 이 정치권력으로 발길을 옮아갔고 대다수는 일상으로 몸을 숨겼다. 정치권력은 80년 5월 광주를, 기념하고 참배하는 역사로 전락시켰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것처럼 ‘위로부터의 혁명(보수적 혁명)’은 무섭다. 자본주의가 자신의 모순마저 자본화하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처럼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두려워하는 기득권층은 ‘혁명’조차 블랙홀처럼 흡수해 현상적으로는 혁명의 대의를 수용하면서도 모양새를 조금씩 바꿔가며 기득권을 유지해 간다. 과거 민주화를 외쳤던 이들도 별다르지 않다.


과거청산의 열망이 뜨거운 가운데도 ‘불온한 시선’을 떨어뜨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제도권에 포섭된 역사가 박제화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물론 올바른 과거사청산은 시대적 소명이자 요구다. 그러나 역사는 정권으로부터 공인받는 게 아니라 면면히 이어지는 역사의 파고 속에서 자리매김 되어야만 박제되지 않은 역사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국회 앞에서 오랜 기간 동안 노구의 몸을 이끌고 천막농성을 벌이며 일제하 강제징용, 징병문제를 일본정부와의 외교적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 자국민들의 외침을 외면해왔던 정부,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국군 등에 의한 양민학살 문제를 해결해달라며 부모들의 유골을 길거리에 내놓고 천막농성을 벌였던 촌로들. 이들 개개인의 삶에서 소설 <백년여관>은 거친 숨을 토해낸다.

우리는 60년간 왜곡되고 훼손되어온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자리로 옮기려는 시지프스의 노력이 한창인 지금 우리는 정말 역사 앞에 맨몸뚱이로 마주서서 정직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것일까?

평소처럼 사우나를 마치고 전신거울 앞에 섰을 때 느껴지는 낯설음과 부끄러움을 던져줬던 소설 <백년여관>은 온전히 역사 앞에 자기 자신과 마주대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를 되묻고 있었다. <백년여관>은 49년 4․3사건→한국전쟁 때 보도연맹학살사건→80년 5월 광주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라리 ‘지옥’이라고 표현해야 맞을지 모르는 세월을 죽음과 함께 살아왔고 살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잊지 말라며 고통스러워한다.

평생 원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손바닥처럼 평생을 50년 광주를 낙인찍혀 사는 작가.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전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자신의 뿌리도 모른 채 이국땅에 입양되어 폐쇄적인 삶을 살다 환청에 이끌려 한국 전라도 영도라는 자그만 섬에 이끌려온 요안. 가족의 희망이었다가 베트남전쟁에 참전, 한쪽 팔을 잃고 고엽제 후유증에 술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문태. 49년 서북청년단과 군경에 의한 말살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 지역주민들이 대량살상당하는 과정에서 가족이 차례차례 몰살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하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던 지옥을 살아낸 귀천네 등

이들은 알 수 없는 목소리에 이끌려 영도라는 작은 섬 <백년여관>에 모인다. 제주 4․3항쟁, 보도연맹원사건, 80년 5월광주의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온 이들은 자신에게 멍에처럼 지워진 과거지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역사의 회용돌이 속에서 겪었던 고통스러웠던 삶을 대면하게 된다.

소설<백년여관>은 박제화 되어가는 역사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 자의 시간과 죽은 자의 시간. 이 세계엔 그 두개의 서로 다른 시간이 공존한다. ‘죽은 자의 시간은 결코, 연대기의 숫자를 바꾸는 것만으로, 과거니 역사니 하는 따위 딱지를 붙여 간단히 폐기처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를 기억하는 자들의 삶을 통해, ‘산자의 시간’과 더불어 존재하고 또 한참을 지속해간다.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한 인간 존재의 죽음은 육신의 호흡이 멎음으로써가 아니라 그 기억하는 지상의 맨 마지막 인간이 사라지는 순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거라고”

사실 <백년여관> 80년 광주의 고통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영혼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작가 임철우 자신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소설 연재 중 더러 주변에서 내게 말했다. 또 그 얘기냐고. 요즘 같은 세상에 해묵은 역사, 지나간 사건에 왜 그리 집착하느냐고. 그때마다 어설픈 웃음으로 혼자 삼켜버리곤 했던 그 대답을 이제는 말해주고 싶다. 아니다. 당신이 말하는 해묵은 역사니 지나간 사건 따위를 나는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난 단지 사람을,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죽은 자와 아직 살아 있는 자. 그들의 이름 없는 숱한 시간들을, 사랑과 슬픔과 고통의 순간들을 나는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라고.”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고통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미래의 화합으로 마무리 짓는 <백년여관>은 잊지 말아야할 무엇이 존재함을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어차피 삶이란 다만 견디어 내야할 뿐이라는 것. …이 순간 아직 나는 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자기의 알몸으로 진실 앞에 정직하고 싶은가? <백년여관>.

덧붙이는 글 | 블로그 '신새벽의 새꿈꾸기(http://blog.naver.com/storyrange.do)'에 실린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 '신새벽의 새꿈꾸기(http://blog.naver.com/storyrange.do)'에 실린 글입니다.

백년여관 - 임철우 장편소설

임철우 지음,
문학동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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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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