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지나 밝혀진 육군본부의 인권침해

감추고 숨기고 묻어둔 진실들

등록 2005.04.01 09:56수정 2005.04.01 18:19
0
원고료로 응원
시골 사람들일수록 관공서 문턱을 높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복잡한 법률용어나 행정적 절차에 대한 부담 때문이기도 하지만, 웬만큼 큰 문제가 아니면 관청을 거치지 않으려는 소박한 마음 씀씀이에 기인한다.

a 육군본부의 순직·전사자 변경 처리 미통지는 인권침해라는 진정을 국가인권위에 접수시킨 문철주씨.

육군본부의 순직·전사자 변경 처리 미통지는 인권침해라는 진정을 국가인권위에 접수시킨 문철주씨. ⓒ 인권위 김윤섭

어쩌다 그냥 넘길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라도 직면하게 되면 시골 사람들은 집안이나 마을의 어른을 찾는다. 경험 많고 사리에 밝은 분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다. 지리산 자락이 숨을 고르고 내려앉은 경남 산청 땅에서 70여년을 살아온 문철주(73)씨가 바로 그런 노인이다.

문씨의 먼 친척, 정확히 말하면 처재종질서(아내의 7촌 조카의 남편)인 민모씨가 군대에서 병을 얻어 사망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군 당국의 기록에 따르면 민씨는 전방부대에 복무하던 중 갑자기 혈관이 터졌고 부산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돼 입원치료를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당시 민씨의 아내 김모씨는 시댁 식구들이 '새댁이 문병 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리는 바람에,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도 보지 못한 채 오랜 세월 복받치는 설움을 달래가며 살아왔다. 가족들은 육군본부 측이 '단순병사'로 통보한 것에 의문을 품었으나, 당시만 해도 군 당국을 상대로 진실규명에 나서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문씨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03년 봄이다. 김씨는 문씨의 집에 인사차 들렀다가 한맺힌 사연을 털어놓았고 김씨의 얘기를 듣고 직감적으로 군 당국의 조사에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곧바로 구제활동에 나섰다. 문씨는 먼저 민씨의 아들을 통해 민씨가 사망한 부산통합병원에 의료일지 사본과 병원장 확인서를 요청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오래 됐다"며 발급을 거부했다.

민씨의 아들이 통합병원을 직접 찾아가 재차 요청했을 때도 병원 측의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자 문씨는 유족들이 어렵게 찾아낸 민씨의 군번을 명기한 탄원서를 작성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발송했고, 곧이어 이 문서는 국가인권위에 이첩돼 진정사건으로 접수됐다.

국가인권위는 문씨의 진정내용(알권리 침해 : 순직 변경사실 지연 통지로 인한 인권침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군본부의 명백한 인권침해 행위를 밝혀냈다.


즉, 육군본부가 단순 병사로 분류했던 민모씨를 1996년 12월 순직으로 변경 처리한 사실을 알고도 이를 유족들에게 통보하지 않은 점을 확인한 것이다. 또한 국가인권위는 문씨의 진정내용이 개인문제가 아닌 군 전체의 중대한 사안임을 감지하고 조사범위를 육·해·공군 순직·전사자로 확대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2004년 8월 국가인권위는 "순직·전사 변경처리 미통지는 유족의 알 권리 및 명예권을 침해한 행위"라는 결정을 내리고, 육군참모총장에게 책임자 징계 등을 권고하고, 국방부장관에게 창군 이후 해·공군의 사망구분 재심사를 권고했다.


국가인권위의 조사를 통해 육군본부가 1996년과 1997년 모두 네 차례의 전공사상심사위원회를 통해 창군 이후 병·변사 처리된 4만5804명 중 9756명을 전사 및 순직으로 직권 변경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러자 문씨는 "국가가 죽음의 원인을 잘못 처리한 것과 이를 알고도 유족에게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며 2004년 10월 육군참모총장에게 국가배상 등을 요구하는 질의서를 보냈다.

하지만 육군본부는 "전국적으로 유사한 사건이 많고, 현실적으로 배상하기 어렵다"고 회신했다. 이에 문씨는 "국가는 반드시 억울한 죽음에 대해 보상해야 한다"며 유족들에게 민사소송을 권했고, 유족들은 현재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이다.

문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직접 작성한 문서들을 훑어보니 빈틈이 거의 없었다. 쉽지 않았을 듯한 문제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비결을 물으니 그가 걸어온 과거사가 실타래처럼 풀어져 나왔다. 1951년 겨울, 전쟁의 광기가 남녘땅 지리산을 뒤덮을 무렵 그는 할머니와 함께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한국현대사의 수많은 상처 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얼룩으로 남아 있는 거창양민학살의 현장이었고, 문씨의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집단 총살당한 517명의 원혼 중 한 명이었다. 사건 전날 문씨는 산청의 누님 집으로 피난 가 있는 바람에 참변을 피할 수 있었지만, 할머니의 억울한 죽음은 어린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문씨는 1963년부터 31년간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했다. 거창사건 희생자의 유족이 경찰을 하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는 '국가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소명의식으로 숱한 시련을 딛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쪽에는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나지 않았고, 언젠가는 거창사건 진상규명 활동에 나서겠다는 의지가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

문씨가 1994년 경찰을 그만두자마자 '거창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에 가담해 회장과 고문직을 맡은 것도 그런 연유다. 문씨는 요즘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국가는 가장 중요한 인권문제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야말로 국가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지는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인권위는 2004년 10월 육군본부의 순직·전사자 변경처리 미통지 내용을 진정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한 문씨에게 '국가인권위원회보상금지급규칙'에 의거해 2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문씨는 "당연히 할 일은 했을 뿐인데 보상금을 받게 돼 부끄럽다"면서 "세상이 어른을 공경하지 않고 남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쪽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마을 사람이 부탁한 새로운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이 또한 군 의문사 사건으로 오래 전 일이다. 군 당국의 기록엔 제대를 앞두고 음주운전 도중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문씨는 이 말을 믿지 못한다. 그간 너무도 많은 국가의 거짓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고인과 함께 근무한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3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3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AD

AD

AD

인기기사

  1. 1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오빠가 죽었다니... 장례 치를 돈조차 없던 여동생의 선택
  2. 2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한국 의사들의 수준, 고작 이 정도였나요?
  3. 3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대세 예능 '흑백요리사', 난 '또종원'이 우려스럽다
  4. 4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5. 5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영부인의 심기 거스를 수 있다? 정체 모를 사람들 등장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