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민이는 아시아 최연소 '번지 점퍼'

[예니네 가족 텐트메고 유럽가기 22] 번지점프를 하다②

등록 2005.04.12 21:50수정 2005.04.13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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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의 번지점프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도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고 무슨 일이든지 허락을 받고 하며 마냥 어리광을 부리던 아이들이 스스로 134m의 하늘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그것은 그냥 재미있는 일을 아이들이 했다는 사건 이상으로 필자를 감상적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여행 경비를 아껴 쓰고 그 돈으로 번지 점프나 하자" 할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감정이었는데 대견하면서도 일순 허전한, 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먼저 점프를 끝내고 배를 타고 나온 딸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래 이제 네가 다 컸구나. 뭐라 표현 못할 벅찬 감정이었다.


a 번지점프를 위해 케이블카가 정지해 있다.

번지점프를 위해 케이블카가 정지해 있다. ⓒ 유원진

라우터부르넨에 있는 레포츠 사무실에서 상담할 때 사실 필자는 스카이다이빙에 관심이 있었는데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한사람당 사오십만원이라는 가격이 너무 비쌌다. 번지점프도 낮은 것은 조금 쌌는데 아이들이 가장 높은 코스를 하겠다고 졸라서 두사람 몫으로 삼십만원을 지불했는데 처음에는 조금 비싼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중에는 하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어땠어?"

사실 그 당시는 자세히 물어 보지 않았었다. 아이들은 그냥 웃음으로 대답했다. 떨어지는 순간 기분이 어땠을까? 뛰어내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번지점프 이야기를 쓰면서 아이들을 불렀다. 아빠는 점프를 해보지 않았으니 해본 너희들이 직접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하고 부탁했다.

a 시범조교의 완벽한 폼

시범조교의 완벽한 폼 ⓒ 유원진

예니의 번지점프

'누가 수면제 좀 주세요. 먹고 잠든 다음 뛰어내리게. 그럼 모르잖아요. 순서를 기다리는 이 순간이 이토록 괴로운 시간이 될 줄 몰랐어요. 늘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이 순간은 그냥 잠들고 싶네요.'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쓴 유서 같지만, 사실은 번지점프하기 전의 내 마음이었다. 뛰어 내리기 직전, 세상이 모두 멈춰 있는 듯한 느낌. 내 귀에는 오로지 심장 소리만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초조함과 흥분의 도가니 속…. 아직은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도 나의 손과 발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자기들끼리 떨고 있었다.

a 폼이 엉성하다

폼이 엉성하다 ⓒ 유원진

수전증인가? 매서운 바람에도 끄떡없던 나의 이 튼실한 두 다리들은 왜 이런다지. 난 아무렇지 않거든. 번지점프, 그까짓 거 뛰어내리면 그만인 것을. 난 뭐든지 할 수 있는 강하고 위대한 존재야. 나 자신을 믿어. 믿어, 믿는다구.


아무리 속으로 다짐해 봤자 눈 앞에 보이는 정말 '위대한' 자연 앞에서 난 먼지일 뿐이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왔는데 아직 하늘은 저 위에 있다. 산은 이제야 올라왔냐며 손을 내밀고 바람은 뛰어내리라고 재촉한다. 자기처럼 하늘을 날아보라고. 약이 오른다. 이제 보니 난 아무것도 아니잖아.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고 떠들어대도 자연앞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는 걸.

케이블카 안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 사람들의 시선, 카운트 다운…. 그런 것들이 한데 버무려져 자극적인 머스터드 소스처럼 내 입안 가득 침이 고이게 했다. 더 이상 참는 것은 무리였다. 빨리 나를 부르는 케이블카 밖의 세상 속으로 나를 그냥 던져 버리고 싶었다.

a 로프의 반동으로 다시 튀어오르고 있다.

로프의 반동으로 다시 튀어오르고 있다. ⓒ 유원진

셋… 둘… 하나…. 뛰었다. 순간 비행기가 생각났다. 전 세계 어디든지 단숨에 갈 수 있지만 숨막히도록 답답한 비행기. 하지만 지금 난 숨막히지 않고도 세상 최고의 비행기, 바람과 함께 있다. 내 마음을 다 주고 싶을 만큼 상큼한 바람 냄새. 눈앞에 보이는 푸른 자연의 속삭임. 바람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바람과 함께 영원히 머물고 싶은 이 순간, 내 몸은 온통 저 아래 보이는 호수의 촉촉함에 젖었다가 금방이라도 증발해 버릴 것만 같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여주인공 고 이은주씨가 자꾸만 생각났다. 그녀는 번지점프를 해 보았을까? 영화 제목처럼 그녀가 번지점프를 해 보았다면,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맛보았다면…. 죽고 싶을만치 버거운 이 세상을 좀 더 견뎌낼 수 있지 않았을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태민이의 번지점프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짜릿한 스릴과 전율이 머릿속을 스친다. 번지점프의 그 짜릿함, TV 속에서나 보던 번지점프를 할 거라는 말을 여행 전에 들었던 것이 내가 스위스를 학수고대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a 안전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안전장비를 점검하고 있다 ⓒ 유원진

8월 22일, 끝나가는 여행을 멋있게 정리하고자 우리는 라우터부르넨의 역에서 레포츠회사의 차를 기다렸다. 잠시 후 파란색 승합차가 도착해서 우리를 태우고 인터라켄 방향으로 달렸다. 한참을 한적한 시골길을 달려 번지점프 장소인 스톡호른이라는 산에 도착하였다.

나는 맨 마지막으로 점프했다. 이 번지점프는 사다리나 다리 같이 고정되어 있는 곳에서 뛰는 것이 아니고 케이블카에서 뛰어내리는 이동식인데 안에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놓아서 일부러 긴장감을 조성한 것 같다.

a 뛰어내리는 순간

뛰어내리는 순간 ⓒ 유원진

다리에 로프를 다 묶자, 옆에 있던 조교가 "셋 둘 하나, 번지!"라고 외쳤고 그와 동시에 나는 케이블카에서 뛰어 내렸다. 음악소리와 조교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지금 하늘을 날고 있다. 이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짜릿했다. 다른 사람이 그러듯 나도 소리를 질러 보았다. 사나운 바람이 귓전을 후려 갈겼다. 로프가 튕기더니 다시 위로 잡아 끌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갔다.

안전요원들이 나를 내려 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뜻밖에도 그들은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로프와 안전장치를 벗자 머리가 띵했다. 아마도 거꾸로 매달려 피가 머리로 쏠려서 그랬을 것이다. 번지점프를 마치고 조교와 악수를 했다. 그는 내게 "아시아 최연소면서 스톡호른의 1000번째 점퍼"라고 말해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데 칭찬을 하니 쑥스러웠다. 그러면서도 기분은 좋았다.


a 조교보다는 못해도

조교보다는 못해도 ⓒ 유원진

우리 부부가 호숫가에서, 마치 놀이터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돌아오는 아이들을 기다리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은 하늘에서 두려움에 떠는 자신과 싸우면서 기다리고 인내하고 뛰어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 있을 것 같던 부모가 없었다. 순간 겁도 났겠지만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제 한뼘은 더 커 보였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아직 점프의 흥분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듯 상기되어 있었고 하늘을 날던 순간을 다시 되새김질하는 듯이 보였다.

이제 머지 않아 아이들은 두 팔을 벌리고 하늘에서 뛰어내렸듯 세상 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맨 처음 하늘에서 뛰어내리던 순간을 기억해내고 용감하게, 그러나 겸허하게 도전하고 이겨내기를 빌어 본다. 아이들을 안아주었던 스위스의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호수 위로 스톡호른의 산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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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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