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일에 만난 원적산의 아무르장지뱀

등록 2005.04.06 04:22수정 2005.04.06 15:0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식목일 아침에 전해들은 첫 소식은 산불소식이었다. 해마다 이즈막에 흑사병처럼 번지는 산불은 강원도 지역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나무를 심는 날에 나무가 타죽는 것은 산신령의 심술일까? 졸지에 식목일(植木日)이 화목일(火木日)로 바뀐 탓은 철없는 인간의 짓이다.


담뱃불도 산불의 빌미가 되기에 산에 오를 때 담배도 피우지 말아야 하는데, 식목일에 원적산(경기 여주)에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꼴불견을 보았다.

주록리 계곡에서 어느 가족이 부탄가스로 라면을 끓여먹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 옆에는 '취사금지'라는 플래카드가 멀쩡히 걸려 있는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자녀가 커서 이 행동을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그 꼴불견을 보고 강원도의 산불을 떠올리는 건 지나친 억측일까?

a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마을안내석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마을안내석 ⓒ 박종인

식목일에 등산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아침에 산불소식을 들으니 산에 가기가 거북스러웠다. 현관을 열면 항상 눈에 들어오는 원적산이지만 한 번도 올라보지는 않았었다.

이천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한 원적산(634m)은 경기도 이천시, 광주시, 여주군에 걸쳐 자리한 산이다. 초봄까지도 정상엔 눈이 쌓여 있는 것이 집에서 보인다. 산에 오르다보니 계곡에는 아직도 얼음이 남아 있었다.

원적산에 오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계곡으로 오르기로 했다. 주록리 마을 어귀에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떡하니 버티어 있고, 그 옆에 작은 장승들이 나란히 서 있다.



a 주록리 작은 정승들

주록리 작은 정승들 ⓒ 박종인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예전에 사람이 살았지만 지금은 비어 있는 흙집이 덩그러니 있고, 예전엔 거친 잡풀만 우거졌을 터에 우아한 전원주택이 의기양양하게 자리하고 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몰아내듯 문화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주거형식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내 눈에 산 속의 현대식 건물이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건 왜일까?

천이(遷移) 과정에 의해 산의 나무들이 양수림에서 음수림으로 변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지지만 조립식 자재와 인위적 색상의 건축물은 산과의 유착(癒着)이 어려워 보인다.

a 주록리계곡의 빈 흙집

주록리계곡의 빈 흙집 ⓒ 박종인

겨우 차 한 대가 지나갈 수 있는 계곡길을 따라 올라가니 여름 한철을 노리는 썰렁한 펜션이 듬성듬성 나타나고 마지막 펜션을 지나니 '병력하차지점'이란 곳이다.

차를 그곳에 세우고 걸어서 올라갔다. 길은 매우 가파른데 차가 지나간 흔적이 있다. 원적산에 군부대가 있기에 군사용 도로인 줄 알았는데 산길이 끝나는 곳에 탁 트인 묘지가 있다.

해월(海月) 최시형의 묘가 거기에 있었다. 최시형(1827~1898)은 고아로 성장하여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하다가 동학에 입교하여 최제우의 뒤를 이어 제2세 교조가 되었다. 동학의 탄압을 피하면서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경전을 완성했다.

a 주록리계곡의 전원주택

주록리계곡의 전원주택 ⓒ 박종인

최시형 선생은 당시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였으나 고종31년(1894) 전봉준이 동학혁명운동을 일으키자 북접접주(北接接主)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南接軍)에 합세했다.

1898년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순도하였다. 6월 5일 광화문 밖에 가매장된 시신을 이종훈(李鐘勳) 등이 수습하여 야간에 밤길을 달려와 이곳에 장사지냈다.

최시형의 묘소에서부터는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오솔길이 이어졌다. 선 채로 말라죽은 고목과 삭정이만 눈에 띌 뿐 생명의 기운은 아직 미약했다. 오솔길에는 바짝 마른 신갈나무 잎사귀가 수북이 쌓여 바스락거렸다. 작은 불똥이라도 튀면 금방 큰 불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다.

a 도토리 깍쟁이

도토리 깍쟁이 ⓒ 박종인

산의 배경은 온통 갈색이다. 거기에서 난 화사한 생명의 기운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희미하나마 노란 생강나무꽃이 눈에 띄었다. 아직 진달래 꽃봉오리가 터지기는 이른 감이 든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살폈다. 도토리의 깍쟁이가 눈에 들어왔다. 도토리 알도 보였다. 지난 가을에 떨어진 도토리 중에 얼마는 다람쥐가 먹었겠고, 얼마는 겨울에 얼어죽었겠고, 또 얼마는 뿌리 내리고 싹 틔워 이 숲의 미래가 될 것이다.

갈잎을 비집고 나온 어린 소나무도 눈에 들어왔다. 그의 앞길은 험난할 것이다. 햇볕을 좋아하는 양수림(陽樹林)인 소나무가 참나무 틈에서 제대로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싹 트고 나온 그 의지로 큰 나무로 자라주길 바랄 뿐이다.

a 도토리

도토리 ⓒ 박종인

가파른 비탈을 오르니 비교적 완만한 능선길이 나타났다. 멀리 마을도 보였다. 한결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정상을 향해 걷는데 작은 물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소풍날 산 속에서 보물 찾듯이 한참을 살피다가 작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것은 아무르장지뱀이었다.

제 몸과 같은 색인 낙엽 속에 숨어 앞만 살짝 내놓고 멈춰 있는 그 녀석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 속에서 아무르장자뱀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난 숫눈에 첫 발 떼듯 설레는 마음으로 디지털카메라에 녀석을 담았다. 처음에는 녀석이 달아날까봐 선 자리에서 그대로 우선 사진에 찍었는데 거리가 멀어서 초점이 흐렸다.

a 어린 소나무

어린 소나무 ⓒ 박종인

좀더 가까이 다가가며 계속 사진을 찍었다. 녀석은 모델인 양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녀석과 카메라가 한 자 정도 거리로 가까워졌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덕분에 선명한 녀석의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내가 녀석을 살피듯 녀석도 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반갑고 신기한 맘으로 녀석을 살폈지만 녀석은 두렴과 경계의 맘으로 나를 살폈을 것이다.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웠다. 좀더 자세히 살피고자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대니 한 자 가웃 달아났다. 내가 그만큼 다가가니 녀석은 그만큼 달아났다.

a 낙엽 속의 아무르장지뱀

낙엽 속의 아무르장지뱀 ⓒ 박종인


a 아무르장지뱀

아무르장지뱀 ⓒ 박종인

나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녀석에게 서운했지만 녀석에겐 인간을 경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인간이 아무르장지뱀에게 다가가는 것은 흥미의 문제이지만 아무르장지뱀이 인간에게서 달아나는 것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계곡에서 취사하는 그 사람은 아무르장지뱀의 생존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겠지? 아무르장지뱀아,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a 달아나는 아무르장지뱀

달아나는 아무르장지뱀 ⓒ 박종인

덧붙이는 글 | 녀석을 만난 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아무르장지뱀'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마뱀은 아무르장지뱀, 줄장지뱀, 표범장지뱀, 장지뱀, 도마뱀이 있다고 했는데, 설명만 읽고선 조금 헷갈리네요. 혹 제 정의가 틀렸으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녀석을 만난 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아무르장지뱀'이라고 불렀습니다. 도마뱀은 아무르장지뱀, 줄장지뱀, 표범장지뱀, 장지뱀, 도마뱀이 있다고 했는데, 설명만 읽고선 조금 헷갈리네요. 혹 제 정의가 틀렸으면 지적을 부탁드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