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원짜리 백반에 반찬 17가지... 찌개까지

[식당 탐방기] 남도여행에서 스치듯 발견한 '임금님 수랏상'

등록 2005.04.06 23:31수정 2005.04.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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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기운을 조금이나마 먼저 느끼려고 지난 4일에 휴가를 내어 2박 3일 일정으로 남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서울에서 살지만 늘 마음 속에 담고 있는 전라도 일대를 돌며 촬영을 하고 돌아오는 일정입니다.

촬영을 위한 여행이다보니 촬영을 마치면 곧장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식사는 늘 도로가의 기사식당에서 때우게 되고, 잠은 잠자리와 목욕 그리고 PC방까지 한 번에 해결되는 찜질방을 이용합니다.


여행의 재미를 들자면 뭐니뭐니해도 볼거리와 먹거리, 이 두 가지가 아닐까요? 그 중에 먹거리는 여행의 즐거움을 한껏 돋워주기도 하고, 때로는 기분을 '팍' 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제 경우를 보자면, 특히 남도 여행에서 음식때문에 실망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행지 곳곳의 평범한 식당에서 최고의 밥상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일간 아홉 번의 식사를 했고 그 중에서 식당에서 먹은 게 일곱 번입니다. 기사를 통해 몇 곳을 소개할까 합니다.

남원-구례 도로가의 남원휴게소식당

a 동이 터올 무렵에 아침식사를 위해 들른 남원휴게소 식당입니다.

동이 터올 무렵에 아침식사를 위해 들른 남원휴게소 식당입니다. ⓒ 정상혁

새벽 2시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남으로 남으로 향해 달리다가 새벽을 맞이할 때쯤 남원에서 구례 방향의 국도 어디쯤 주유소 옆에 위치한 남원기사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지방에는 단돈 3000원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있나 봅니다. 그러고 보면 서울의 물가가 높다는 것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메뉴판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뭘 먹을까 고민하는 저희에게 식당 주인 아줌마가 쌀쌀맞게 던진 한 마디는 "아침에는 시래기 해장국 잡숴요" 였습니다.


라면 빼고 제일 싼 게 시래기 해장국인데 그걸 권하니 오히려 어색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막상 아줌마가 가져다준 밥상을 보고는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3000원짜리 백반 한 상에 반찬이 무려 8가지, 게다가 얼큰한 맛이 일품인 시래기 해장국까지 나오니 아침식사로 이런 진수성찬을 받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a 서울이라면 3,000원으로 이런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서울이라면 3,000원으로 이런 멋진 식사를 할 수 있을까요? ⓒ 정상혁

막 들어섰을 때 툭툭 쏘아대는 말투에 좀 당황스러웠지만 욕쟁이 할머니가 하시는 식당치고 음식 맛 형편없는 곳은 없지 않습니까? 불경기라고 매운 맛이 유행한다는데 머리가 깨질 정도로 맵기만 한 음식점이 있는가 하면, 이곳 시래기 해장국처럼 졸린 새벽에 정신이 '확' 들게 하는 그럼 품위 있는 매운 맛도 있습니다.


3000원짜리 백반에 따라 나온 밥맛은 또 어떻습니까? 정말 맛있게 지은 밥은 밥 자체가 반찬이기도 합니다. 꾹꾹 눌러담지 않아 고슬고슬한 밥은 김에만 싸먹어도 너무 훌륭했습니다. 지방 인심이 모두 그렇지만 추가하는 공기밥은 대개 무료입니다. 하지만 공짜가 어디 있나요. 추가로 먹는 밥은 직접 가져다 먹을 줄 아는 '센스' 정도는 있어야겠지요?

오랜 시간 동안 운전하고 오면서 피곤했던 몸과 마음이 3000원짜리 백반 한 상에 모두 풀렸습니다. 계산하고 나오는 길에 동전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식당 밖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 드시라고 놓아둔 동전이랍니다. 들어서면서부터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순간까지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동 악양면 면소재지 금정식당

길을 달려 지리산 고개 정령치를 넘어 구례 그리고 다시 매화축제가 한창인 하동을 지나 악양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은 대하드라마 <토지>의 촬영지인 최참판댁과 촬영장 세트가 지척에 있습니다. 경치와 마을 분위기가 너무 좋아 많은 분들이 노후를 보내고 싶어하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곳곳에 매화꽃이 만발한 이곳의 면소재지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서울이라면 좀처럼 들어서고 싶지 않은 허름해 보이는 외관인 금정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좁은 부엌에 할머니 두 분이서 열심히 음식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다른 메뉴도 많이 있지만 점심으로는 역시 백반이 제일입니다. 마침 배달을 위해 도시락에 담은 반찬을 보고 혹시나 했던 마음에 역시나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4000원에 이렇게 화려하고 맛깔스럽게 담은 도시락을 받을 수 있다니 이 근처 사시는 분들은 엄청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겁니다.

a 이렇게 예쁘게 담은 맛있는 반찬을 배달까지 해줍니다.

이렇게 예쁘게 담은 맛있는 반찬을 배달까지 해줍니다. ⓒ 정상혁

다섯 개로 나눠진 반찬통이 한 개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되고 반찬들 하나하나가 너무나 먹음직스러워 가뜩이나 배가 고파 있는데 입속에 침이 한가득 고이게 했습니다. 식사 준비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2개의 반찬에 콩비지국까지 나왔습니다. 조기구이, 콩비지 그리고 제육볶음까지 한꺼번에 나오니 다른 곳에 가면 한 번에 하나씩밖에 먹을 수 없지만 이곳은 일석삼조로 즐길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식당에서 직접 만든 듯한 도토리묵, 마늘무침 등을 비롯한 각종 나물과 김치들. 봄철의 깔깔한 입맛을 돋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반찬들이 있을까요?

a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입에 침이 한 가득 고여있는 채로 찍은 사진입니다.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입에 침이 한 가득 고여있는 채로 찍은 사진입니다. ⓒ 정상혁


a 커피는 할머니가 공짜로 타주십니다. 취향대로...

커피는 할머니가 공짜로 타주십니다. 취향대로... ⓒ 정상혁

제가 백반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구성 자체가 웰빙이기 때문입니다. 반찬의 구성을 보면 가장 많은 것이 김치와 나물 등의 푸성귀들이고 그 다음으로 소금에 절인 젓갈이나 해산물류, 마지막으로 고기류 약간입니다.

다만 전라도 쪽으로 가면 갈수록 반찬의 맵고 짠 정도가 강해져서 싱거운 음식에 익숙하신 분에게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전라도서 나고 자란 제 입맛에는 그야말로 '딱'입니다.

한 상 잘 먹고 나면 식당 주인 할머니께서 손수 커피를 타주시는데 이 맛이 또한 일품입니다. 웬만한 자판기 커피도 할머니가 타주신 커피 맛에는 미치지 못할, 그럴 맛이었다고나 할까요. 함께 여행을 간 동행은 "이 집에 들어설 때부터 나는 이 집 음식이 맛있을 줄 알았어. 주방에 할머니가 계신 집치고는 음식 맛없는 집이 없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순천시 GK식당

a 이곳에서 두끼를 해결했습니다.

이곳에서 두끼를 해결했습니다. ⓒ 정상혁

자, 그럼 여행 첫 날 저녁식사였던 4500원짜리 순천의 GK회관은 어땠을까요? 무려 17가지나 되는 반찬에 찌개까지 나왔습니다. 전국 어디에서도 4500원으로 이보다 훌륭한 밥상을 받아보긴 힘들 겁니다.

순천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있어서인지 조기구이, 꼬막, 젓갈, 굴무침, 게장까지 유난히 해산물 반찬이 많이 나왔습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추가 공기밥은 공짜입니다.

근처 찜질방에서 자고 아침에 다시 들렀습니다. 어제 저녁과 똑같은 반찬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정말이지 괜한 기우였습니다. 몇 가지 기본 반찬을 빼고는 반찬이 싹 달라졌습니다.

조기구이가 전어와 갈치로 바뀌었고 아침메뉴라 김과 계란말이, 아삭아삭 오이무침 그리고 색깔은 희끄무레하지만 맛은 일품인 된장찌개까지 아침으로는 너무 화려해 약간은 부담스럽기까지 한 식사였습니다.

식당을 나서는 길에 식당이름의 'GK'의 뜻을 여쭤보니 '건강'의 약자랍니다. 정말이지 이곳에서 자주 먹으면 너무 건강해지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a 아침밥상입니다. 아침으로는 좀 거한 밥상이긴 합니다.

아침밥상입니다. 아침으로는 좀 거한 밥상이긴 합니다. ⓒ 정상혁



순천-화순간 도로가의 내고향 기사식당

마지막으로 소개할 식당은 순천에서 화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내고향 기사식당입니다. 이곳에서 말로만 듣던 이층으로 쌓은 백반을 만났습니다. 역시 메뉴는 백반이고 가격은 4000원입니다. 주문하고 5분도 안 되서 쟁반 하나가 밥상 위에 놓이는데 반찬 놓을 자리가 부족하여 2층으로 쌓았습니다.

순천의 GK식당 못지 않습니다. 된장을 풀어 시원하게 끓인 게된장국에, 알싸하게 입맛을 자극하는 청량고추 한 입 베어 물고 순례하듯 반찬 하나 하나씩 젓가락을 옮겨가며 먹으니 슬슬 살찔 걱정도 되기 시작하지만 이런 생각, 밥상 앞에 두고 예의가 아니겠지요?

a 이층으로 쌓인 반찬 좀 보세요. 한동안은 잊지 못할 겁니다.

이층으로 쌓인 반찬 좀 보세요. 한동안은 잊지 못할 겁니다. ⓒ 정상혁

a 순천에서 화순가는 길에 점심을 먹은 내고향 기사님 식당

순천에서 화순가는 길에 점심을 먹은 내고향 기사님 식당 ⓒ 정상혁

봄내음 물씬 나는 나물에서부터 전라도답게 맵고 짜지만 감칠맛나서 입맛 당기게 하는 젓갈, 그리고 노릇하니 맛있게 구워진 꽁치구이, 큼직하게 썰어 볶은 감자와 표고버섯까지 어느 하나고 빼놓을 수 없는 맛깔나는 반찬들입니다.

이렇게 쭈욱 둘러보니 몇 가지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첫째, 어디건 너무 알려진 곳만 찾으려 하지 말고 우연히 들른 평범한 식당에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 한 끼가 가능하다.

둘째, 지방의 식당들은 적어도 가격이 비싸면 비싼 만큼 다른 게 있다.

셋째, 어디 가나 추가 공기밥은 공짜다.

넷째,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으면 저처럼 소화제를 사먹어야 하는 일도 생긴다.

꽃피는 봄날에 어디론가의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다면 방송 출연으로 널리 알려진 곳보다는 길가에서 만나는 평범한 식당에서 최고의 밥상을 받아보십시오. 여행의 재미가 곱절로 늘어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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