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향에 취하고 친절한 마음씨에 취하고

천 리 밖에서 받은 따뜻한 도움의 손길

등록 2005.04.07 09:32수정 2005.04.0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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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문 캄캄한 낯선 여행지에서 잠 잘 곳을 구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더구나 혼자가 아닌 가족과 함께 있는데 말이다.


거기에 더해 아이의 몸이 불덩이처럼 열이 오르고 먹은 것마다 모두 토해내는 심각한 상황이 겹쳐진다면 즐겁자고 떠난 여행은 이미 고역중의 고역일 것이다.

그럴 때, 아무 정신없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누군가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조용히 내민다면 아마도 그 고마움은 여행지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엊그제 실제로 겪었던 그런 사례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2005년 4월 3일부터 5일까지는 일요일과 식목일 징검다리 휴일이었다. 중간이 되는 4일(월요일)이 마침 아이들 학교의 자율휴업일이어서 작심을 하고 회사에 하루 휴가를 낸 다음 오붓한 가족여행을 떠났다. 맘 속에 언젠가 꼭 한 번 가보고야 말겠다고 점찍어 두었던 '섬진강 여행'이었다.

진안의 마이산을 거쳐 산수유로 유명한 구례의 산동마을과 화엄사, 연이어 하동의 쌍계사와 화개장터를 둘러보고 강을 건너 청매실 농원, 다시 강을 건너 소설 <토지>의 고향 평사리까지 보고나니 어느새 어둠이 까맣게 내려 앉아 있었다. 강행군이었다. 이제 어디선가 잠 잘 곳을 찾아야만 했다.

벚꽃축제까지는 아직 며칠 시간이 남아 있던 터라 빈 방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하동 읍내를 몇 번이나 빙 둘러 보아도 방이 없다.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에 배는 고프고 어서 빨리 쉬고 싶은데 말이다.


거기에 더해 어제 저녁부터 심상치 않던 큰아이는 물만 먹어도 다 토하고 열은 열대로 펄펄 끓는다. 덕분에 다른 식구들이 이곳저곳 구경을 다니는 사이에도 큰애는 하루 종일 차 속에서 잠만 자야 했다.

하여간 약을 먹이려고 해도 약이 독한 탓에 일단 밥을 먹여야 했기에 숙소는 둘째치고 급한 대로 식당부터 찾았다. 온통 재첩국 천지 속에 용케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하는 곳이 있어 차를 세웠다.


집사람은 곰탕, 작은 아이는 비빔밥, "그래도 하동까지 왔는데" 하며 나는 재첩국을 주문했다. 큰아이는 밥 한 숟가락에 물만 말아 먹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오직 어서 빨리 고픈 배를 채우고 잠 잘 곳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 솔직히 맛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맵고 짤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재작년인가 경상도 내륙지방을 여행하면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크게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한 탓에 밥 먹는 것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고 은근히 걱정부터 앞선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주문한 음식들이 예상과는 달리 전혀 '경상도스럽지'가 않았다(경상도 음식을 폄하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지역적인 특색을 표현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뿐이오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시장이 반찬인 탓인가 싶어 집사람에게 물어보니 곰탕도 먹을 만하고 비빔밥도 맛있다고 한다. 하하! 식당은 제대로 찾았나보다 하면서 열심히 밥을 먹고 있는데 주인인 듯싶은 아저씨 한 분이 오셔서 이것 저것을 얘기해 주신다.

"곰탕시키셨지예? 잘 하셨심더. 우리 집 곰탕은 사골을 푹 고아서 제대로 만든 것이라예! 억수로 맛있으니까네 맛나게 드이소!"

아저씨는 큰아이를 보시고는 묻는다.

"야는 와 안먹심니꺼?"
"예. 이 녀석이 좀 아픕니다. 아주 심하게 체한 것 같습니다."
"그라예! 그라몬 지가 아주 특효약이 있는데 한 번 먹여 보실랍니까?"

하시면서 뭔가 시커먼 젤리같은 것이 담긴 조그만 유리병을 갖고 오셨다. '매실 엑기스'라고 하는데 먹기 싫어도 꼭 먹어야 한단다. 병원에서 이미 '편도선염'이라는 진단과 함께 약까지 받아든 터라 선뜻 받아들이기가 뭐했지만 매실액이 '체'한 것에 좋다는 얘기를 들어 보았던 터라 아이에게 참고 먹으라 했다.

큰아이는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잘 먹었다. 옆에서 음식을 나르던 아주머니께서도 등을 두들겨 주시고 손도 따주셨다. 엊저녁 집사람이 했을 때처럼 역시나 피가 잘 나오질 않는다.

"심하게 체했나 보네예. 인자 괘안을 겁니더."

자신이 잘 체하기 때문에 아예 손 따는 기구를 갖고 다니신다는 아주머니가 씩씩하게 말씀해 주셨다. 주인 아저씨는 옆에서 빙긋이 웃고만 계셨다. 나는 이왕지사 신세 지는 김에 잠 잘 곳도 부탁을 드려 보았다.

"혹시 저희 한 가족이 묵을 만한 곳이 없을까요?"
"요새 관광철이라 아마 방이 없을 낍니다. 그라도 함 알아 볼 테이니까네 식사나 하고 계시소."

잠시 후.

"다른 곳은 방이 엄꼬 여가 하나 있다꼬 하네예. 제 친척 동생이라 했으니까네 이리 가시면 될 낍니다. 여가 새로 지은 곳이라 깨끗해가 가족들이 하루 저녁 잠자기 괘안을 낍니다. 혹시라도 방값을 더 달라카믄 지한테 전화하이소!"

저녁을 다 먹고 아저씨께서 일러주신 곳으로 갔더니 그새 다시 여관의 카운터로 전화가 왔다. 내용을 들어보니 잘 해드리라는 당부인 것 같다. 덕분에 원래 요금보다 2만원이나 더 싸게 방 값을 치르고 객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말씀대로 깨끗해서 아이들이 더 좋아한다. 침대에서 뛰고 난리다. 어! 저 녀석 봐라! 잠깐 느끼지 못했는데 큰 녀석의 혈색이 좋아졌다.

"야! 너 괜찮냐?"
"네! 다 나았어요!"

엥! 와! 체한 것에 매실이 좋다더니 매실의 효과가 과연 이런 것이구나!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집사람도 놀라며 이내 안심하는 눈치다. 사실 큰아이 걱정에 구경다운 구경도 못하고 분위기마저 냉랭하던 차였다.

순간 상황이 이렇게 잘 풀리지 않고 어려워졌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상상을 한 번 해 본다.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끝냈을 테고 큰 녀석은 계속 열이 났을 것이다. 약은 먹었겠지만 쉽게 회복되지 않아 아마도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루고 힘들어 했을 것이고 녀석을 지켜보는 집사람과 나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음날 일정도 다 무효가 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애써 맘 먹고 결행한 가족여행은 그걸로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식당 아저씨의 친절 하나가 우리 가족의 '행복여행'을 되찾아 준 것이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숙소를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반가워하시며 아이 걱정부터 하신다. 고맙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당신 손주도 요만하시다며 껄껄 웃으신다.

진주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집사람과 나의 입가에는 내내 '빙그레'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길이 조금 막혀도 짜증스럽지 않았으며 즐겁고 상쾌한 기분으로 봄기운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오직 서울에서 천 리나 멀리 떨어진 머나먼 하동이라는 물 설고 낯선 곳에서 느낀, 어렵고 곤란한 상황에서 헤매고 있을 때 내민 따뜻한 도움의 손길 때문이었다.

하동읍내 유성식당 김동곤 아저씨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a 식당 아저씨 내외분과 함께. 가운데서 눈감고 있는 녀석이 급체한 큰아들 녀석이다.

식당 아저씨 내외분과 함께. 가운데서 눈감고 있는 녀석이 급체한 큰아들 녀석이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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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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