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진실, 자유는 여전히 소중하다

테리 이글턴, <미학사상> - 탈근대 논의의 도전에 대한 맑스주의의 대응

등록 2005.04.09 01:48수정 2005.04.10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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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를 위시한 탈근대론자들의 "근대"를 청산하자는 도전에 맞서 "근대"가 여전히 유효한 계획임을 주장하는 논의들도 있었음을 지나쳐서는 안 될 것이다.

a 테리 이글턴, <미학사상>의 표지

테리 이글턴, <미학사상>의 표지 ⓒ 한신문화사

탈근대론자들이 대부분 이성 자체에 대한 회의를 통해 "근대"라는 거대 계획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나갔다면, 분명 그 대척점에는 도구적 이성의 문제들을 노정할 수 있는 "비판적" 이성을 통해 "근대"의 계획을 계속 수행해나갈 수 있을 거라 믿은 하버마스가 있었고, "성찰"을 통한 "근대"의 심화를 주장한 앤서니 기든스나 울리히 백 같은 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탈근대 논의에 대해 가장 탐탁치 않은 시선을 보낸 곳은 이 누구들보다도 정통적인 맑스주의 이론가 진영이었을 텐데 이들 대부분이 신봉하던 노동과 계급의 중심성, 그리고 "혁명"이라는 거대계획은 어떤 중심도 집중도 거부하는 탈근대론의 주장들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문제 뒤에 숨어있던 다양한 주체들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여성이나 소수자 문제, 인종 문제 등에서 맑스주의 진영의 납득할 만한 대응이 촉구되면서, 거기에다 68 혁명으로부터 동구권 붕괴라는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이 가져온 정세적 "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이들 역시 사회변동에 따른 학문 지형의 변화에 자신의 문제틀을 다시 구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많은 탈근대 논의들은 "미적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를 모더니티에 대한 주요한 비판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예컨대 앞서 소개한 리오타르는 아방가르드의 작업들이(구체적으로는 "숭고"의 체험) 모던에 대한 비판의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아도르노는 쇤베르크와 앵포르맬 음악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설 수 있는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예감"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작품 미학이나 영향 미학의 차원뿐만 아니라 존재 미학에서도 그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요즘 비판적 서가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푸코의 "자기적 존재"나 들뢰즈의 "유목적 주체"는 근대적 삶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의 미학적 재구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탈근대 논의에 의해 현대 사상의 미학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밀려왔다. "미적인 것"을 단순히 상부구조로 폄하해버렸던 맑스주의는 이에 대해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완고한 이미지를 가진 맑스주의 진영의 대표적 문학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맑스주의 계열의 비평가가 아니라면 해내기 힘들었을 "미적인 것"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진행해 나간다. 그는 탈근대 논의의 "미적인 것"에 대한 열광이 지나치게 일면적인 측면이 있음을 지적하며 "미적인 것"의 다재다능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탈근대 논의에서 말해온 것처럼 "미적인 것"은 새로운 형태의 자율과 자결을 예시해주고 법과 욕망, 도덕과 인식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개체와 전체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진정한 해방의 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미적인 것"에는 사회적 권력을 거기에 예속된 이들의 육체 깊숙이 주입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헤게모니 유지에 효과적으로 동원되어왔던 측면 역시 있었던 것이다.


<미학사상>은 이런 "미적인 것"의 양면성을 바탕으로 샤프츠베리에게서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이르는 서구 사상을 재독해하는 책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사회 역사적인 변동과 새로운 사상의 대두를 연결해 제시하는 태도인데 이런 작업은 맑스주의적 저작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독자들은 거대한 구조를 치밀하고 역동적으로 설명해주는 맑스주의적 작업 방식의 장점을 이 책에서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글턴은 바움가르텐 이래 "육체"에 대한 담론으로서 출발한 미학이라는 학문 체계 자체가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피지배계급의 육체적인 생의 영역까지 통제하려고 한 지배계급의 전략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육체적인 생을 부르주아적 이성의 존엄한 범위 안에서 통제하고 합리적으로 형식화하려한 계획이 "미학"으로 요약되는 시도였던 것이다. 현실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부르주아적 이상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지 않게 하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미적인 것"을 다루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과제였다.

이글턴은 책의 전반부에서 도덕적 감각파 이론가로부터 칸트, 쉴러, 헤겔에 이르는 계몽 사상가들이 "미적인 것"을 통해 생활 세계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헤게모니를 어떻게 강화하려 했는지 보여준다.

이들 사상의 궤적은 이상적 부르주아 세계와 현실의 시민 사회를 통합하려 했던 시도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은 오히려 중반부의 쇼펜하우어에 이르러 생활 세계에 대한 "거부"라는 염세주의의 역설로 나타나고 이 역설이 주체의 "결단" 외에는 지양될 방법이 없음이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드러날 것이다.

후반부의 시작을 알리는 맑스는 좌초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대안으로서 제시된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처럼 이제 구체적인 생활 세계로부터 이성이나 가치들이 유추될 것이다. 그리하여 억압적 사회질서는 그것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킬 힘과 욕망을 산출할 수밖에 없다. 이글턴은 이어 니체, 프로이트와 벤야민, 아도르노에 이르는 현대 사상의 궤적을 통해 유물주의적 윤리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책에서 "삶의 미학적 재구성"이라는 탈근대 논의의 주요한 테마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충실히 따르면 윤리적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도덕적 감각파 이론가들은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그런 주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주장을 한쪽은 해방의 계기로 한쪽은 사회유지의 계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역설적이다.

단순히 욕망하는 것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은 우리에게 자신의 억압을 욕망하게 할 수 있으므로. 지배에 대한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는 헤게모니에 의한 지배가 무서운 이유이다.

이글턴은 이런 권력의 고도화된 지배에 맞서 급진적 이론가들이 보다 명민하고 치밀한 전략을 통해 저항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말한다. 탈근대 논의에서 제기된 새로운 논의들은 모두 가치있는 것들이라고.

그들이 주장하듯이 이성, 진실, 자유는 백인, 자본가, 남성의 지배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 그러나 거기에 수긍하면서도 섣불리 그런 가치들을 폐기해버릴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지배계급에게 모두 넘겨주기엔 아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개념을 우리가 전유할 수 있을 때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글턴은 믿는다.

이글턴은 탈근대 논의에서 유행하는 감성과 차이 물신주의에 맞서서 여전히 성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이성"을, 개별과 보편의 화해를 추구하는 "변증법"을, 차이의 구심점이 될 수 있을 "동일성"을 구출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게 명민하고 꼼꼼한 이글턴이 탈근대 논의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리오타르나 푸코에 대해서 지나치게 희화화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이글턴은 탈근대 논의로부터 맑스주의의 계획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을까? 그가 제안한 유물주의적 윤리학의 정치는 지배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을만한 "명민한"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건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그러나 이글턴의 생각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이 책은 서구 근현대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보기드문 "읽을만한" 두꺼운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책의 원제는 "Ideology of Aesthetic"이다. 미학에 국한되지 않고 "미적인 것"이 서구 사상에서 수행해온 기능을 탐구하는 저작인데 "미학사상"이라고 제목을 달아놓은 것은 좀 생뚱맞다.

덧붙이는 글 이 책의 원제는 "Ideology of Aesthetic"이다. 미학에 국한되지 않고 "미적인 것"이 서구 사상에서 수행해온 기능을 탐구하는 저작인데 "미학사상"이라고 제목을 달아놓은 것은 좀 생뚱맞다.

미학사상

테리 이글턴 지음, 방대원 옮김,
H.S MEDIA(한신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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