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대치, 자네의 생각으로 어르신께서 광산을 근거로 군세(軍勢)를 키우기라도 하신단 말인가?”
“딱히 그런 확증이야 없어도 어르신의 그간 말씀과 돌연한 잠적, 그리고 경신년 난의 연루설 등을 고려한다면 일종의 심증은 있는 것 아니겠나. 더구나….”
“더구나?”
유홍기의 말에 오경석이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근자에 불거진 안주 마두산 일을 생각해도 그들이 광산을 끼고 있는 도당이란 걸 쉬 짐작할 수 있는 일인데, 하필 종적을 감추었던 어르신이 광산을 열고 계시다? 그리고 그 도당들이 사용한 총포가 흡사 서양식의 병기를 모방하였음이 적실할 진데 그런 총포를 제조할 도량과 혜안을 가진 이라면 역관을 지내신 어르신 같은 분이 적임 아니겠는가.”
“조금은 억측인 듯 하고 약간은 타당한 듯도 하네만, 그분이 무엇이 아쉬워 그런 위험을 감수한단 말인가?”
“그야 알 수 있나. 언제는 어르신께서 부족함이 있어 노비들과 호형호제하고 작인들을 식솔처럼 거느렸겠나. 혹 모르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매 역관이란 중인신분의 한계가 서글펐는지.”
“그 어르신 그런 분은 아닐세. 자네도 알잖은가. 설혹 큰일을 꾸민다 해도 자기 한 몸을 위해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란 걸.”
“에이, 나도 모르겠네. 이제 보니 내가 쓸데없는 머리에 양분을 빼앗겼구먼. 직접 마을에 도착해 어르신을 뵈면 모든 게 자명해질 것을, 겨우 그 몇 조금을 기다리지 못해 이 안달이 났네 그려.”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구먼. 이렇게 설왕설래 할 참이면 이미 호미봉 아랫말에 당도를 하였겠네 그려. 자 어서 가 봄세.”
당분간 내리막길이 계속 되는 지라 둘은 나는 듯 걷는 듯 잰 걸음으로 길을 잡았다.
“아-!”
호미봉 아랫말에 도착한 오경석과 유홍기는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동네 어귀로 접어드는 모퉁이를 돌자 눈을 막던 언덕이 트이면서 훤한 동리가 나타났다. 어귀에서 곧게 뻗은 길은 마을 옆을 지나 멀리 광산에 이르는 길과 곧장 마을로 들어서는 길로 갈리는데, 마을로 향하는 대로 양 옆으론 제법 흐벅한 논들이 펼쳐져 있었다.
산말랭이 아래 경사면에도 계단식 논들이 다단이 마련되어 있었고 불모의 땅이라 여겨지는 곳에도 밭작물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었다. 허름한 초가집들이었지만 100여 호 남짓 되는 집들이 마을의 중앙에 빽빽이 밀집되어 있었고 중앙 뒤편의 경사지대 위에 제법 규모를 갖춘 기와들이 몇 채 있었으며 그 뒤의 둔덕 고지대에도 무슨 창고 건물 같은 것들이 군데군데 들어서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이건 광산촌이 아니라 제법 실한 부촌을 연상케 하네 그려.”
어귀에 멈춰 선채 마을을 조망하던 유홍기가 말했다.
“광산에 딸린 식솔들이나 관계붙이들이 제법 된다 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오경석도 역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군영문의 군수 광산(軍需鑛山)과는 달리 은점이나 금점은 금은의 사회적 수요가 높고 은화가 생산 분배 되는 곳이어서 점역이 이루어지는 즉시 점소(店所) 주변에는 장시가 형성되고 의류나 미곡뿐 아니라 술과 고기 등을 파는 각종의 상점들이 점촌(店村:광산촌)에 개설되어 점은이 생산 분배될 무렵에는 금, 은 또는 연을 구하려는 상인과 이속들이 몰려들어 금, 은점이 설치된 산골짜기는 장시를 방불하게 하는 마을로 변모한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또 규모가 큰 점촌에는 경외관아에서 파견한 차인배들과 국내외의 금, 은을 필요로 해 몰려든 상인들, 수백․ 수천 명의 광군과 그 가족들, 그리고 생활필수품과 주식을 팔기 위한 좌고(坐賈)와 행상(行商)들이 운집하여 초막과 토옥이 즐비하고 상거래가 성행하는,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루기도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을 감안해도 평상시에 이렇듯 안정된 광산촌이 들어서 있는 경우는 보기 드문 예였다.
“이제야 알겠구먼.”
한참이나 마을을 훑어보던 유홍기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인가?”
오경석이 물었다.
“어르신은 이곳에 당신의 왕국을 만드신 게야.”
“평소 어르신의 생각을 현실로 옮길 왕국 말이지? 광산촌 치고는 지나치게 확보해 놓은 논밭을 보며 그런 생각도 했네.”
오경석도 유홍기의 말에 동의 했다.
“어르신의 만년에 이 작은 곳에서나마 수탈과 핍박이 없는 화평의 땅을,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는 평등의 땅을 만들려 하신 것 같네.”
“헌데 이 동리의 형세가 말일세.”
“형세가 왜?”
“병법에 밝은 소견이 없는 나도 이곳이 천혜의 지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우리가 돈 이 모퉁이 언덕 위에 망루를 두기만 한다면 십리 밖의 움직임도 조망할 수가 있겠어. 가장 높은 호미봉 아랫자락에 마을이 들어앉아 있으니 뒷배경은 든든할 것이고 왼편 산에서 흘러내린 자락이 자연스레 동네를 감싸 안고 여기까지 흐르니 이 쪽 산자락과 언덕 사이, 50보도 되지 않을 이 모퉁이만 틀어막는다면 광산과 마을로 통하는 길목이 완전히 차단되는 것 아니겠나. 설사 산을 넘어 마을로 들어가려 해도 가파른 산날들이 자연스레 성벽 역할을 하니 소수의 인원으로도 다수를 당할 수 있을 터이고.”
유홍기가 산세와 지세를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마을 기와집들이 둔덕 위에 올라앉은 것도 다 까닭이 있어 보이는구먼.”
“그렇지. 자네도 그리 보나? 광산촌에 되지 않게 기와가 웬 말인가. 아마 저 집들은 관청 역할을 위해 지어졌을 것이고 위치로 가늠해 보건대 동리 어귀에서 논을 가로질러 마을에 이르는 길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니 유사시에 지휘소로 쓰기에도 안성맞춤이야. 어귀에서 마을까지의 거리도 대략 두 마장이 넘는 길이니 급하면 둔덕 위로 움집할 수도 있고.”
“맞네. 저 둔덕의 형세가 그야 말로 산성의 지세야. 70길이 넘는 높이와 펑퍼짐한 경사가 농성하기에 꼭 좋은 곳이지. 드러낼 수 없는 처지니 내성, 외성을 쌓을 수야 없었겠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흡사 왜성의 산성 축조술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듯하이. 부분적인 석축시공(石築施工) 몇 곳을 빼고는 제외하고는 그저 흙을 깎아내는 삭토(削土)와 흙을 모아 쌓는 성토(盛土), 혹은 굴(堀)을 파내 만드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나.”
비록 오경석이 청나라와 관련한 역관이긴 하였으나 문헌을 통해서인지 왜관을 담당한 역관들을 통해서인지 제법 일본의 성곽 축조 방법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듯하였다.
“오호라. 산마루에 평평한 곡륜(曲輪)이나 중턱의 요곡륜(腰曲輪), 그리고 측면에서 빠져 후면에 이를 듯한 대곡륜(帶曲輪) 등이 모두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일대에 왜인들이 축조했다던 그 토성들의 구조와 흡사한 것도 같고. 저 둔덕으로 오르는 초입의 관문이나 길옆으로 연이은 호들, 흙을 깎아낸 절토(切土)의 흔적들이 모두 방어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시설들이 분명하네.”
눈썰미 있는 유홍기가 오경석의 동조에 힘입어 둔덕을 방어시설로 단정을 내렸다.
“귀한 광물이 나는 곳이니 치안에 신경을 아니 쓸 수 없는 처지라 해도 저 정도 방비면 흡사 전쟁이라도 치루겠다는? 그럼 혹시 자네 말대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
“에이, 대치 이 사람. 그래도 그 정도야….”
“여하튼 어르신을 뵈면 알 일 아닌가.”
오경석은 여전히 인정하기가 석연찮은 듯 대꾸했으나 유홍기는 대강 짐작이 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갈무리 했다.
마을 어귀에서 논 사이로 난 대로를 지나 얼추 초가들이 밀집한 초입에 들어섰다. 나무 그늘에 마련된 정자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노인들에게 권병무 역관 댁을 물으니 묻는 이를 쳐다보는 일도 없이 둔덕 경사면에 있던 번듯한 기와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짐짓 바둑에만 몰두하고 있는 양 고개를 돌리진 않고 있으나 모르긴 몰라도 이미 두어 마장 전부터 마을로 들어서던 자신들을 보고 있었을 터였다.
노인이 손짓한 기와집 방향으로 이 둘이 고개를 돌렸을 때 , 그 기와집의 대문에서는 환갑을 넘긴 듯한 노인이 이곳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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