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눈으로 푸코를 보다

들뢰즈의 <푸코>를 읽고

등록 2005.04.12 06:42수정 2005.04.1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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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들뢰즈, <푸코> 표지

들뢰즈, <푸코> 표지 ⓒ 동문선

순진한 로크의 생각처럼 우리가 보고 말하는 것은 과연 '백지' 상태에서 이루어질까? 왜 가난하거나 핍박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들리지 않을까? 예컨대 3년 전의 2002년 월드컵에 관한 기사들, 모 대기업에서 시청앞 광장에 대형 모니터를 설치한다는 기사는 많았는데, 왜 그 당시 노점을 철거당해 생계가 막막해진 사람들에 대한 보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을까?

우리가 보고 말하는 것을 규정하는 무언가가 있어서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인식의 바탕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있다" 이것이 선험철학의 전제이다.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푸코의 선험철학, 신칸트주의적인 면모이다. 그러나 칸트와는 구분해두자. 칸트라면 '선험'은 자기가 속한 마당을 인식하는 주체의 능력에 귀속한 것이지만 들뢰즈에게 '선험'은 오히려 주체를 구성하고 가능하게 하는 '마당' 같은 것이다.


현상학이 주체가 열어젖히는 세계의 의미에 집중한다면, 푸코의 세계는 언표와 가시성으로 갈라져 있고 주체는 오히려 그 둘에 의해 구성된다. 우리가 보는 것은 한 시대가 보여주길 허용하는 '빛'의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고 말하는 것은 한 시대가 말하길 허용하는 '언어'의 범위 안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 둘이 언표와 가시성이라는 한 시대의 지층, '지식'을 구성한다.

현상학의 단일 세계와 달리 언어적 형성과 가시적 형성들은 독자적인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왜 감옥에 대한 이론들과 형벌체계의 행태들은 놀랍도록 일치하는 경우가 있는가? 감옥에 대한 이론이 형벌체계를 결정하고, 새로운 형벌의 등장이 감옥에 대한 이론을 만든다는 상호결정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왜 어떤 형벌, 어떤 이론은 상호결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사장되는가? 왜 지배적인 이론이 현실의 행태를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가? 둘은 얽혀있지만 이건 차라리 전투와도 같은 얽힘이다. 이 얽힘 속에서 독자적인 논리로 움직이는 가시성과 언표를 조응하게 하는 제3의 심급이 있는 게 아닐까?

여기서 소환되는 '권력'이라는 심급, 지층화되지 않는 힘들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그 유명한 푸코의 계보학적 작업들이다. 계보학은 지층화되지 않으면서 규정력을 행사하는 권력들의 관계들에 대한 연구이다. '빛'과 '언어'는 권력 관계의 다이어그램에 조응한다. 다시 말해 '권력'이 보여주고 말할 것을 결정한다. 우리가 보고 말하는 것은 권력들의 전투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어디에나 있다고 해야한다.

합의를 말하고 보편적 '인간'을 상정하는 수많은 이론들. 그러나 그 '인간'에는 권력관계의 승리자들만이 들어가지 않는가? 남성, 백인, 자본가, 식민주의자라는 우리에게 알려진 승리자들. 푸코는 선험의 허위 뒤에 보편과 객관을 가장한 권력의지를 보고 그에 대해 저항하기를 촉구한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모든 것이 시대의 지층의 규정을 받는 '지식-존재', 또는 권력의 다이어그램으로부터 규정을 받는 '권력-존재'라면, 모든 인식조차 거기서부터 가능하다면 근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가?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부터 이 책이 들뢰즈의 이야기인지 푸코의 이야기인지 모호해지기 시작해지는 듯하다. 권력은 거기에 작용할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그러므로 그것은 권력관계의 다이어그램 외부에 작용하고 있는 보다 선차적인 힘을 가정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그 가장 먼 외부의 힘은 아마 들뢰즈에게는 '욕망'으로 불리는 것이리라.


어쨌든 푸코도 이로부터의 벗어남을 고민해왔던 듯하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존재양식을 찾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으로부터 그 힌트를 찾는다. 고대 그리스에는욕망을 추구하면서도 방탕에 빠지지 않은 추구와 절제의 양면을 지닌 양생술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시대의 지식과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처럼 내 삶의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 자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 이것이 푸코의 세 번째 존재양식인 '자기-존재'이다.

'사유하기'란 가장 외부에 있는 힘을 구부려 내부로 가져오는 것, 시대의 동일성 강제에서 벗어나 자기 안에서 대면하는 타자의 얼굴이다. 물론 지식과 권력의 규정은 계속해서 이 내부를 무화시킬 것이다.

체 게바라가 상품패션의 아이콘이 되고, 커트 코베인이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고. 자신에 대한 공격까지도 흡수해버리는 놀랍도록 유연한 오늘날의 권력의 힘을 보라. 그러나 '자기적 존재'가 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과정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들뢰즈의 '탈주'는 리오타르처럼 단순히 가지고 있는 차이를 드러내고 그를 분쟁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유목적 주체'는 끊임없이 지배적인 코드와 영토로부터 자신을 벗겨내고 '차이화' 한다.

이런 '과정'으로서의 '유목적 주체'와 이 책의 '자기-존재'는 유사한 궤적을 보여준다. 혹시 들뢰즈는 푸코를 걸고 자기 얘기만 한 건 아닐까? 일반적인 비평서와는 다르게 들뢰즈가 쓴 <푸코>는 비평자와 비평대상간의 객관적 거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가 푸코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들뢰즈의 생각인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들뢰즈의 색깔은 어디에도 죽어있지 않지만 모든 이야기들은 푸코를 통하지 않고서는 행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들뢰즈의 필체로 그린 푸코의 '초상화'라고 할까. 이 책은 그런 책이다.

근대 권력의 효과로서 '인간'이라는 주체의 죽음을 선언했던 푸코. 그렇다면 '자기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마도 니체가 '초인'이라고 불렀던 새로운 주체성의 도래를 예감하는 것인가? 우리의 욕망이, 우리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 되는 그런 존재 양식은 가능할까? 아마 거기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과 실례를 만드는 작업은 우리의 몫이리라.

덧붙이는 글 | 들뢰즈가 쓴 <푸코>에는 두 가지 판본이 있다. 95년에 새길에서 나온 <들뢰즈의 푸코>가 있고(절판되었다는 소문이 있긴 하나), 03년에 동문선에서 나온 <푸코>가 있다. 번역이나 디자인이 깔끔하기야 당연히 최근의 판본이 낫다. 그러나 푸코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비평한 '철학극장'이라는 논문은 <들뢰즈의 푸코>에만 수록되있는 보너스다. 어느 판본이 나을까? 이에 대한 판단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들뢰즈가 쓴 <푸코>에는 두 가지 판본이 있다. 95년에 새길에서 나온 <들뢰즈의 푸코>가 있고(절판되었다는 소문이 있긴 하나), 03년에 동문선에서 나온 <푸코>가 있다. 번역이나 디자인이 깔끔하기야 당연히 최근의 판본이 낫다. 그러나 푸코가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비평한 '철학극장'이라는 논문은 <들뢰즈의 푸코>에만 수록되있는 보너스다. 어느 판본이 나을까? 이에 대한 판단 역시 독자들의 몫이다.

푸코

질 들뢰즈 지음, 권영숙.조형근 옮김,
새길아카데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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