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이 된 선생님 이야기

[책읽기가 즐겁다 123]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등록 2005.04.13 11:12수정 2005.04.13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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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생농사를 짓던 사람

a 겉그림입니다.

겉그림입니다. ⓒ 지식산업사

부모들은 자식농사를 짓습니다. 교사들은 학생농사를 짓습니다. 우리는 예부터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으니 부모들이 자식을 기르는 일을 농사짓기에 견주어 왔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사는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농사를 짓는다고 할 만합니다.


농사는 뿌린 대로 거둡니다. 준비한 만큼 거둡니다. 때 맞춰 김매기를 해야 하듯, 아이들 둘레에 퍼진 잡풀 같은 찌꺼기를 덜어내고 솎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풀약을 치며 밭고랑이나 논두렁에 자라는 온갖 풀을 다 말라 죽여서는 안 됩니다. 온갖 농약을 치며 가을걷이만 많이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약 먹고 잘 자란 곡식은 알도 많이 달리고 굵기도 굵다고는 하지만 속까지 알찰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능금이나 포도나 배 같은 열매는 농약을 엄청나게 쳐서 보기에는 굵고 맛있어 보여도 속에 밴 농약 때문에 껍질째 먹을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딸기는 어떻습니까. 배추는 어떻습니까. 감자나 고구마는 어떻습니까?

아이들을 키울 때 농약을 치듯 키운다면 높은 학교까지 마치고 덩치도 큰 아이가 될 수 있으나 속은 허전하고 빈 쭉정이가 될 수 있어요. 겉보기로는 못생기고 크기고 작은 열매나 곡식이 속은 더 알차고 영양이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아이들도 좀 덜 배우거나 공부는 못하더라도, 속으로 여물어 참되고 당차고 씩씩하고 착한 아이로 키우는 일이 훨씬 훌륭합니다.

농사꾼이 된 박도님은 '농사짓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처음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도 '가르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느꼈으리라 봅니다.

.. 공장에서 제품이 쏟아지듯 학생을 길러내는 곳에서는 참다운 사람 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 <13쪽>


정든 학교를 떠나면서 아이들에게 "학교가 민주화해야 사회도 나라도 민주적이 됩니다.<13쪽>"라는 말도 들려주었다는군요. 집안이 살가워야 마을도 살갑고 사회도 살가울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배워야 학교를 마친 뒤에도 민주주의를 마음껏 펼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민주가 자리잡은 학교에서 학생 대접을 민주에 걸맞게 공부해야, 나중에 이 아이들이 커서 다른 사람과 마주하면서 사람을 '민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억눌리기만 하고 경쟁에 시달려야 한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경쟁에 시달리게 하는 똑같은 기계나 소모품이 될 뿐입니다.


농사짓기가 공장에서 똑같은 제품을 찍어내는 일이 아니듯, 부모가 자식을 기르고,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똑같은 아이들을 '규격과 틀과 형식'에 맞춰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이리하여 부모도 교사도 '아이농사'를 짓는다고 말할 수 있고, 부모와 교사가 아이농사를 참답게 잘 지어야 비로소 이 나라와 사회는 참다운 나라, 아름다운 나라로 이어갈 수 있다고 봅니다.

<2> 농사꾼이 된 교사

"시장에서 사 먹는 것보다 맛이 있네요."
아내는 몇 번이나 말했다.
"우리의 땀방울이 스민 거라서 그럴 거요."
화학비료도 농약도 치지 않은 무공해 남새들이다. <38쪽>


강원도 횡성군 안흥산골에 자리잡은 박도님은, 부모가 되어 자식농사도 지어 보고, 교사가 되어 학생농사도 지어 본 뒤, 농사꾼이 되어 땅농사도 짓고 있습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농사꾼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동안 시장에서 사다만 먹던 것을 이제는 땀 흘리며 두 손으로 지어서 먹으니 얼마나 맛있을까요. 몸에서는 얼마나 반가워하고 고마워할까요.

.. 승용차는 시골사람일수록,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 필요한 것 같다. 시골에 살아 보니까 마을과 마을을 잇는 대중교통이 뜸하고, 애써 가꾼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거나 객지에 있는 자녀에게 갖다 주려면 승용차가 아주 요긴하다. 십 리 길 이십 리 길 논밭에 새참 나를 때도 얼마나 좋은가 .. <133쪽>

그동안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는 이런 이야기를 못 가르쳤겠죠? 시골사람한테 얼마나 차가 큰 존재인지 못 느꼈을 테니까요. 손수 곡식을 지어서 먹으며 느낀, '그야말로 참으로 훌륭한 맛'도 지난날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 거의 대부분의 동물들은 사람을 매우 무서워한다. 모든 동식물의 소원은 하나같이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가 아닐는지. 대부분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사람만 사는 양 동식물을 마구잡이로 사냥하거나 채취하고, 학대하고, 그들이 못살게 환경을 더럽힌다 .. <229쪽>

자연 사랑, 환경 사랑도 교사로 있을 때는 '입으로만 떠드는', 그러니까 '지식으로만 말하는' 일이었을 텐데, 이제는 몸소 자연을 겪고, 언제나 자연과 함께 하면서 온몸으로 배우니, 온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언젠가는 이웃한테 잣송이를 얻어서 뜰에 두었답니다. 잣송이를 하나하나 까는 일이 까다롭기에 한동안 그대로 두었다는데, 다람쥐가 산에서 내려와 부지런히 까먹고 배를 채웠답니다. "아내도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이 쟤들의 식량을 모두 뺏은 건데 나에게 쩨쩨하게 하나만 준다면서 좀 많이 주라고 나무랐(228쪽)"다는군요.

아무래도 박도님이 그 잣송이를 아깝게 여겨 조금만 주고 나머지는 '사람이 가지려' 한 듯한데, 아내가 이를 보고 '그렇게 욕심 좀 부리지 말라'고 한 말씀 했을 테며, 그리하여 다람쥐는 잃었던 잣을 되찾을 수 있었겠다 싶습니다.

이렇게 다람쥐와 보낸 어느 가을날 일은 예순 해 동안 살아온 박도님 삶에서 아주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겠다 싶습니다. 서울 어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도 틀림없이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겠지만, 이렇게 다람쥐와 부대끼면서 느낀 깨달음처럼 큰 울림이 있었을까요?

.. "마소의 새끼는 시골로,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을 이제는 '사람의 새끼도 시골로'로 고쳐야 할 때다. 왜냐하면 시골 학교는 전교생이 1백 명도 안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교사로부터 알뜰하게 개인지도도 더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교과서인 대자연으로부터 도시 아이들보다 더 많이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 <255쪽>

이제 박도님은 이 책,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만한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사람의 새끼도 시골로 보내자"는 말을요. 행정수도 문제도 사람이 시골에서 넉넉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정책을 펼치면 자연스럽게 풀 수 있다고, 사람이 도시로만 모이는 까닭은 시골에 살면 넉넉하고 즐겁게 살아갈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며, 좋은 자연을 늘 곁에 두고 있는 시골에서 물질로도 마음으로도 넉넉하게 살아갈 정책을 펼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잠깐 책을 덮고 제가 일하는 이곳, 충주시 신니면에 있는 ㄷ초등학교를 생각해 봅니다. 이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서른 안팎입니다(하지만 한두 해 뒤면 스물 안팎으로 줄고 한두 해 더 지나면 열 안팎이 됩니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교장도 있고 교감도 있고 담임도 있고 해서…. 교사와 학생 비율이 거의 1:2입니다. 벌써 옛날에 분교가 되고도 남을 곳인데, 한국전쟁 전적비와 기념관이 학교 안에 있어서 아직 그대로 두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조금 차를 타고 나가 음성으로 가 보고, 가까운 진천이나 제천으로 가 보면 길가에 '문닫은 학교'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모습을 곧잘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닫고 버려진 초등학교가 대단히 많으리라 봅니다.

몇 백 군데도 아니라 천 군데도 넘지 싶은데요, 이렇게 작은 학교에서 자연을 벗삼아서 사람답게 자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다면(제도권 교육에서도) 얼마나 좋을까 하는, 또 이런 좋은 학교를 제대로 뒷배하는 일에는 돈도 많이 들지 않으니 여러모로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3> 농사꾼이면서 인터넷신문 시민기자

.. 일백 년 전, 농사꾼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났을 때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때 나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에는 똑같은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한다. 외세에 빌붙은 이들과 탐관오리들을 대대적으로 솎아내지 않는 한, 반 토박 난 나라가 또 다시 결딴날 것 같다 .. <157쪽>

교사이면서 인터넷신문 시민기자였던 박도님은, 이제 농사꾼이면서 인터넷신문 시민기자가 되었습니다. 농사꾼이면서 시민기자가 되니 '농사꾼 눈과 생각과 마음과 몸'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농사꾼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다고 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밑바닥에서 세상을 보니 세상이 얼마나 썩어 있는지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나라 정치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뒤집어 줘야 세상이 건강할 텐데, 우리 나라는 해방된 뒤로 한 번도 정치판을 제대로 뒤집어 주지 않았다. 그 새 한 차례 정권 교체를 했다고는 하지만, 호미로 깔짝거리는 데 지나지 않았다. 가래로 확 깊숙이 뒤집어야 그해 농작물이 땅힘을 받아서 잘 자란다고 한다.(17쪽)"고 힘주어 말하는 박도님입니다. "고매한 학자의 고상한 말보다 우매한 농사꾼의 경험에서 나온 우직한 말에 더 생생한 진리가 담겨 있기도 하다.(18쪽)"면서 안흥이라는 산골마을로 내려와서 사는 일을 참으로 기쁜 보람으로, 즐거움으로 생각합니다.

.. 혼인예식은 횡성읍내 한 예식장에서 가졌는데 예식장 이름이 '향교 웨딩 홀'이었다. '향교 예식장'이라고 하지 않고 '향교 웨딩 홀'이라고 이름을 붙인 게 눈에 거슬렸다. 상품이나 가게 이름에 굳이 외래어를 써야 더 고급스럽거나 품위가 있는 걸까? 더욱이 향교라면 가장 전통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 아닌가 ..<273쪽>

날카로운 눈길이지만 늘 부드럽게 다가가는 손길입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따뜻하게 보살피고 감싸면서 가르치듯, 시골에서는 곡식 하나하나 소중하고 고맙게 여기며 돌볼테지요. 인터넷신문 시민기자로 기사를 쓰면서는 자기가 쓰는 글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매만지며 좋은 이야기가 널리 퍼질 수 있기를 바랄 테고요.

책 정보

- 책이름 :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 글+사진 : 박도
- 펴낸곳 : 지식산업사(2005.3.25)
- 책값 : 9500원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책 겉을 보면 비닐로 밭이랑을 덮는 모습이 나오고, 몸글에도 농사짓는 준비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즘 어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고, 북녘으로 '농사지을 비닐 보내는 운동'도 하는 줄 압니다. 이렇게 비닐을 씌우면 김매는 수고를 덜고, 씨알도 더 굵게 맺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비닐농사로 거둔 곡식이 비닐 없는 농사보다 더 속이 찬 곡식을 맺을 수 없고, 한 번 쓴 비닐은 엄청난 쓰레기가 됩니다.

엊그제 박도님과 전화로 이야기할 때 비닐농사 문제도 꺼냈습니다. 비닐농사를 안 하면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안흥산골에서 살면서 두 식구가 오순도순 먹고 이웃한테 조금 나눠 주기도 할 만큼이면 굳이 비닐농사를 안 지어도 넉넉하다고요.

저잣거리에 내다 팔 곡식이 아닐 테니 더더구나 비닐농사를 지을 까닭도 없고, 저잣거리에 팔 곡식이라 해도 비닐농사가 아닌 땅농사만 지어서 거둔 곡식을 내다 팔아야 더 좋다고 봅니다. 못생기고 크기는 작아도 더 많은 땀과 손길이 밴 곡식이 몸에도 더 좋고, 땅(자연)에도 더 좋으니까요.

다른 사람도 아닌 박도님이라면 이 비닐농사만큼은 짓지 말아야지 싶어요. 좀더 깨끗한 농사, 겉보기가 아닌 속보기로 우리 몸과 마음을 가꿀 수 있는 농사를 지으며 땅도 곡식도 자연도 농사짓는 사람도 보살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는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이어 실었던 글 가운데 예순 꼭지를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기사로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면서 차분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글은 책과 헌책방과 우리 말을 사랑하는 모임인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게시판에도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안흥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는 그동안 <오마이뉴스>에 이어 실었던 글 가운데 예순 꼭지를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기사로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르면서 차분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글은 책과 헌책방과 우리 말을 사랑하는 모임인 '함께살기(http://hbooks.cyworld.com)' 게시판에도 함께 올려놓겠습니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박도 지음,
지식산업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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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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