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더 된 가족사진 속에서 만난 아버지

등록 2005.04.13 14:41수정 2005.04.1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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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버지가 찍으신 20 년도 더 된 가족사진.

아버지가 찍으신 20 년도 더 된 가족사진. ⓒ 심흥구

지난해 분가를 하면서 예전에 아버지께서 찍으셨던 필름들을 같이 가지고 왔었다. 그동안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서랍 청소를 하던 중 무심코 꺼내보게 되었다. 20년도 더 넘은 그 오래된 필름들을 불빛에 비춰보자 거기에는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내 어린 시절들과 우리 가족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신 할머니, 지금 자신의 딸인 선이와 꼭 닮은 누나, 젊고 아름다운 어머니, 어릴 때도 똘똘해 보이던 형 그리고 지금의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아버지. 다른 할 일이 많았는데도 눈이 침침해질 만큼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필름들을 봤다.

내가 머리가 나쁜 탓인지 사진을 찍었던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지금은 다들 분가해서 사느라 명절 아니면 어른들 생신 때나 되어야 한자리에 모이지만 이런 사진을 보고 있으면 역시 가족이구나 싶다.

a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어린 나.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어린 나. ⓒ 심흥구

며칠 전이 아버지 생신이라서 그랬을까? 사진들 중에서 유독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문득 마음 한 구석이 아릿했다. 언젠가 그 밤이 생각나서였다.

밤늦게까지 집에서 작업을 하다가 기척에 나가보니 아버지가 욕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다른 식구들이 깰까봐 조용히 토하고 계셨다. 나는 그저 조용히 아버지 등을 두드려 드렸고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다 토하고 나서도 아버지는 그대로 앉아계셨다. 약주를 많이 드셔서 그런가 싶었는데 아버지는, 조용히 울고 계셨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아버지가, 그것도 막내아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시다니. 당시 아버지는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을 겪으셨고 그래서 많이 지쳐 있었다. 무심해서 그랬던 것은 아닌데 많이 신경을 써드리지 못했었는데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고되셨던 모양이었다.


다음날 나는 조심스레 아버지에게 많이 힘드시냐고, 지난밤의 일을 무안해 하실까봐 일부러 아버지도 우시냐고 농담처럼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대답은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당신도 종종 울곤 한다는 말씀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밖에 아버지의 눈물을 보지 못했던 나에게 당신의 고백(?)은 다소 충격이었다.

아버지 같이 자존심 강한 사람도 울다니. 새삼 아버지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다. 흰 머리와 처진 어깨. 아, 이런…. 나는 덩달아 울게 될까봐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 뒤로 기르던 개가 수술을 하거나 어머니가 입원하셨을 때도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어질고 착해져서 그런 거라고 누군가 말해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버지의 나이 들어가시는 모습은 마음이 아프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사진을 찍은 게 언제였나 생각해보니 벌써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다음에 찾아뵐 땐 아버지가 하루라도 더 젊으실 때 꼭 같이 사진을 찍어야겠다. 사진의 빛은 바랬지만 바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얘기도 나누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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