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외이흉은 거칠 것이 없었다. 산서상인연합회의 오대수장 중 한자리를 차지한 산서 나가를 무시할 곳은 없었다. 산서 나가를 상대한다는 것은 곧 산서상인연합회를 상대한다는 말과 같았다. 황실이 아니라면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지방 군지휘관)나 포정사사(布政使司:지방행정관)까지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건들 수 없는 위치가 바로 오대수장이라는 자리였다.
무림문파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구파일방이라 할지라도 한 수 접어주는 것이 도리인 것이다. 하물며 같은 산서성 내에 있는 신검산장 정도가 그들과 맞설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산서상인연합회가 마음만 먹는다면 손 하나 쓰지 않고 신검산장 내 모든 인물들을 굶어 죽일 수도 있었다.
더구나 중의와 선화라는 남녀가 하찮은 인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그들의 행보는 주위의 시선을 그리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그들이 직접 황원외를 찾아 손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중의라는 인물은 그 점을 분명히 했다. 지금은 토끼몰이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은 몰이꾼이었다. 북이나 징을 울려대면서 주위를 돌아다니면 토끼는 불안해 어디론가 달아나려고 할 것이고, 토끼를 잡을 사람은 중의와 선화였다.
저녁 내내 이쪽저쪽을 어슬렁거리다 술시(戌時) 말에 약속한 장소로 향하여 은밀하게 움직여 주면 될 것이었다. 다만 종적을 발견하기는 어려워도 무공을 익힌 본능적인 감각은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섬뜩한 것이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최소한 산서 나가의 인물들을 건들지는 못할 거라는 중의의 말을 믿고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이제 약속한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고, 약속한 장소에서 약속한 일을 벌여야 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신검각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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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북경(北京)에서 날아 온 전서는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내용이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왜… 나일까? 북경에 연대부도 있는데 굳이 나를 부르셨음은….)
상대부는 그렇지 않아도 북경에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헌데 마침 함태감께서 그를 부른 것이고, 부른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오랫동안 비워 두어야 했다. 최소한 서너달은 족히 걸릴 일이었다. 그의 자리는 그렇게 오래 비워 두어서는 안 될 자리였다. 그럼에도 후임을 두지 않고 그의 자리를 비워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가 짧은 시간에 이룩해 놓은 조직은 매우 치밀했고, 그가 당분간 자리를 비운다고 흔들릴 것은 없었다. 그에게는 자춘(仔椿)이 있었고, 전연부(全然扶)와 조궁(曺藭)이 있었다. 이들 셋이 서로 호흡을 맞춘다면 잘해 나갈 것이다.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며 자신 만을 지켜보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미안하네. 불러 놓고 차가 식을 동안 내 생각에만 빠져 있었구먼."
사실 윗사람이 불러놓고 말을 하지 않는 경우는 대개가 일을 잘못해 안 좋은 말을 할 때다. 그들 역시 그런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었다. 계면쩍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자 이들 세 사람은 안도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북경에서 함태감께서 부르시는군. 이번 춘절(春節)을 북경에서 지내고 달탄(韃靼)에 보낼 사신 일행에 끼어 다녀오라는 말씀이야."
정월이면 언제나 국경을 맞대고 있든 아니던 주위 여러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온다. 신년을 맞이하여 인사차 보내오는 사신이라 하여 하정사(賀正使) 등으로 불린 것인데, 의례 예물을 가져오게 되고 그에 하사(下賜), 상사(賞賜)라는 명목으로 답례물을 주다보니 일종의 공무역(公貿易)의 성격을 띠게 되고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쪽에서 사신을 보내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였다. 주로 변방의 세력들이 발호하지 않을까 하는 경우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주로 보내게 되는데 이번 역시 그런 의미의 사신일 가능성이 높았다. 최근 들어 달탄의 움직임은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직 전 대륙을 정복했던 초원의 정신이 살아있어 탁월한 장수가 나온다면 큰 위협이 될 것이었다.
"왜 굳이 대부를 그 사신 일행에…."
자춘의 말에 상대부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함태감께서 네놈을 어여삐 보신 모양이다. 본관 없이도 네 녀석으로 충분히 꾸려갈 수 있다고 판단하셨겠지."
천관은 환관들의 조직이었다. 어디에 있던, 나이가 많고 적건 간에 그 조직의 수뇌는 환관이 되어야 했다. 그것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비록 경험과 연륜은 전연부와 조궁에 미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비운 그 자리를 메울 사람은 오직 자춘이었다.
"미리 북경에 당도하라는 말씀도 역시 뭔가 단단히 일러둘 말이 있을 터. 아무래도 내일은 출발해야겠어."
"하면 언제나 돌아오실 것인지?"
조궁의 물음에 상대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튕겼다.
"글쎄… 아무래도 명년 삼월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세 사람이 의논해서 일을 꾸려나가도록 해.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무슨 일이라고 못할까?"
그는 확인을 하듯 세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뜸을 들이며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언의 확인이었고, 압력이었다. 세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다 문득 상대부의 시선이 전연부의 얼굴에 가서 멎었다.
"아… 그리고 자네는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 개봉으로 곧 출발해."
"무슨 일이온지?"
"아! 그러면 되겠군. 내일 나와 같이 출발하기로 하지. 어차피 가는 길이니 말이야."
낙양에서 북경으로 가는 일은 여러 갈래가 있었지만 어차피 정주를 지나 개봉에서 북쪽으로 관도를 타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빠른 길이었다. 상대부는 세 사람이 의혹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자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을 다녀갔던 서가화와 송하령이 며칠 전 실종됐어. 그것도 개봉의 관석당의 집에서 말이야. 쉬쉬하고 있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납치되었다고 하는 게 옳을지 몰라. 탁자가 부서져 있고, 호위무사와 시녀가 점혈 된 상황에서 누군가를 따라 나섰다고 하거든."
"누가 감히 그런…."
"관석당이 이쪽저쪽 쑤시고 있는 것 같아. 금의위까지 나서고 있는 모양인데 아무런 단서가 잡히지 않고 있다더군. 함태감께서 특별히 자네보고 직접 나서라 하셨어. 아마 강남 서가의 압박이 큰 모양이야."
전연부는 몹시 귀찮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시시한 좀도둑이나 여염집 여자를 납치해 팔아먹는 놈들은 분명 아니었다. 누군지 몰라도 서가화와 송하령을 납치할 인물이라면 관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일은 자칫 욕만 들을 뿐 아무런 생색도 나지 않는 일이다. 그는 무거운 마음을 누르며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수하는…."
전연부의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상대부가 중간에서 잘랐다.
"편한대로 추리도록 해. 그쪽 포두나 금의위에서 파견 나온 자들도 자네를 도울 거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서가화와 송하령을 찾아야 해. 아니 최소한 그녀들이 누구에게 납치되었는지 정도는 알아내야 할게야."
상대부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정말 그의 말대로 보고할 조그만 꼬투리라도 찾아야만 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말이다. 전연부의 가슴이 점점 답답해 왔다. 이것은 솔잎에 빠진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
(41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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