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63회

등록 2005.04.18 08:03수정 2005.04.1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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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단사련 만화지 진독수는 일행과는 달리 뒤늦게 신검각을 벗어났다. 그는 마음이 찜찜했다. 사실 좋은 음식을 푸짐하게 먹은 것은 고맙지만 그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그럴 마음도 없었지만 그럴 기회도 없었다. 그가 한 일이라곤 준비해갔던 선물인 은월비(銀月匕) 한 자루를 전해 준 것이 고작이었다.

약속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차라리 자신과 반당이라면 한번쯤 위세를 떨쳐 보일 수 있었을 것인데 애걸하듯 들어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신들이 한심스러웠다. 처음부터 풍철영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듯한 느낌이 들었고, 더구나 이제는 담천의인가 하는 작자의 처분에 맡겨야 할 형편이었다. 지광계를 넘겨주겠다는 것은 그들이 바라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이었다. 손 쓸 빌미를 잡으려던 그들의 계획은 아주 간단하게 무산되었고, 더욱 움직이지 못할 처지가 된 것이다.


“빌어먹을….!”

그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비연호를 코로 가져가 흠흠 대며 걸었다. 그러자 그의 기척을 느낀 어둠 속의 신형이 옆으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미세한 흐름이었지만 진독수의 눈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곳은 백양각 안이었다. 자신의 수하는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신검산장 내 인물이라도 이곳만큼은 자신들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의 머리로 하나의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장난을 쳐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지?)

그는 숨을 불어내며 술 냄새를 더욱 풍기며 천천히 오른쪽으로 다가갔다. 그것은 상대가 도망갈 퇴로를 끊으며 상대가 움직여 공격권 내로 들어오게끔 바라는 행동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은근히 퇴로를 차단하자 상대는 담시 주춤거리는 것 같더니 갑자기 나무 뒤쪽으로 움직였다.

“퇘--! 요사이 왜 이리 쥐새끼들이 설치지?”


그는 침을 뱉으며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나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고 상대가 먼저 손쓰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상대의 기척이 사라졌다. 이것은 위험신호다. 상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고수인 것 같았다. 두 번째 나무 옆으로 도는 순간 나무 위에서 소리도 없이 흑영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흑표(黑豹)가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향해 소리 없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순간 진독수의 몸이 기우뚱 앞으로 넘어질 듯 하더니 몸을 홱 뒤집으며 오른 팔을 쭉 뻗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뒤 이어 왼손을 뿌리듯 허공으로 휘저어갔다.


사사라락---!

그의 다섯 손가락에서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만개한 화영(花影)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주위는 마치 봄날 화창한 꽃들이 피어난 듯 계화(桂花)의 향기가 가득 찼다. 그것은 그의 독문무공인 만향지(滿香指)였다. 그것이 항상 그가 가지고 다니는 비연호에서 흘러나온 액체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의 지공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헛…! 만향지…?”

상대의 입에서 헛바람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경악성이 튀어 나왔다. 쏘아 오던 날카로운 손톱들이 한순간에 감추어지고 양손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변화하면서 비수처럼 양 가슴을 파고 들렀다.

“어… 제법이네… 표조공을 익혔나?”

응조공이 날카롭고 빠른데 비하여 표조공은 은밀하고 정확했다. 더구나 어둠 속에 신형을 묻어 버리는 표조공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절기였다. 표조공은 어둠 속에서 그 위력을 더욱 발하는 무공이었지만 그의 공격은 단지 몸을 빼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진독수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상대는 어둠을 타고 나무 위로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담장을 넘어가려는 듯 했다.

“빠져 나갈 수 있다구…?”

진독수의 신형이 어느새 나무를 가로질러 상대를 따라 붙었다. 육순이 넘은 노인이라고 볼 수 없는 신속한 움직임은 그의 양팔이 활짝 펴지며 한눈에 들어났다. 열손가락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허공을 누비자 순식간에 주위는 온통 향기에 가득 차며 꽃잎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것은 조금전의 위력과는 천양지차여서 너무나 빠르고 현란했다. 그의 외호 앞에 왜 우단사련(藕斷絲連)이란 말이 붙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마치 눈이 내리 듯 휘몰아치는 그의 손가락 끝에서 쏘아지는 지력은 그물처럼 허공을 가두고 있었다.

“으흑--!”

비명이 터져 나오며 허공을 가르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진독수의 신형이 바로 따라 붙으며 떨어져 내린 인물의 옆으로 다가 들었다. 이미 혈도를 집힌 듯 움직이지 못한 채 있었는데 그는 경악에 찬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어라… 이 자식… 표조귀살인지 뭔지 하는 놈 같은데….”

진독수는 입고 있는 흑의에 여기저기 구명이 뚫리고 걷혀진 소매서부터 손가락 끝까지 연결되어 날카로운 손톱을 대신하고 있는 철조갑(鐵爪鉀)을 보며 말했다. 철조에는 극독이 발라져 있는 듯 녹색을 띠고 있었다.

“그… 그렇소… 나는… 우광(寓鑛)이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지금 눈만 끔뻑거리며 누워있는 인물은 표조귀살 우광이었다. 그는 상대가 누군지 알았는지 경악과 함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우광을 잡은 진독수의 눈엔 실망스런 기색이 흘렀다.

“이 빌어먹을 자식… 나가(羅家)의 멍청스런 놈하고 같이 들어 왔다더니 여기는 왜 기웃거리는 게야….”

뭔가 생각한대로 안 풀린다는 듯 진독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 신검산장을 드나들고 있는 인물들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보고가 들어오고 있어 이 자가 이곳에 오늘 들어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그가 바란 것은 이게 아니었다. 신검산장의 인물이기를 바랬다. 어차피 움직이지 못할 바에야 한번쯤 신검산장 내 인물이라면 적당히 주물러 주고 돌려보낼 셈이었던 것이다.

“그… 그건… 여기저기… 살피다….”

혼자서 중얼거린 진독수의 말에 표조귀살은 황급히 대답했다. 진독수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너… 여기는 왜 왔어. 네놈을 데리고 다니는 그 나가 놈은 이곳에 왜 온거구.”

“그… 그건….”

표조귀살은 망설였다. 돈 때문에 나충일에게 몸담고는 있다 하지만 나충일의 부끄러운 일을 구구절절 말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었다.

“왜…? 노부에게 말하기 싫어? 그러면 냉혈도나 일월신륜이라면 말하고 싶겠지? 별 더러운 자식이 피곤하게 만드네. 들어가 자야겠군.”

몸을 돌려 걸음을 떼어 놓는 진독수를 보며 표조귀살 우광은 악을 쓰듯 외쳤다.

“아… 아니오. 다 말씀드리겠소.”

무림을 횡행하면서 표조귀살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원칙은 자신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고수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고, 그 고수 중에 누구에게 걸리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우광이 알기로는 냉혈도 반당이나 일월신륜 육능풍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적어도 만향지 진독수는 사정을 하면 목숨만은 붙여주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것이 진독수가 육능풍과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음에도 철혈보 내에서 서열 칠위에 있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여하튼 표조귀살 우광은 그 순간부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쉴 새 없이 불어야 했고, 울부짖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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